솔직하게 말하자. 법조계에서 10년을 버텨온 나의 내면에는 학벌주의자로서의 편견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학벌주의를 “개인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출신 학교의 지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말 그대로, 나는 개인의 능력보다 포장으로 쓰이는 학벌(학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렇다면 학벌주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능력주의는 어떤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사회 비평가 박권일은 『한국의 능력주의』에서 “학력주의는 능력주의와 유사적·비례적인 관계에 있다”고 단언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학력주의 또는 학벌주의는 능력주의와 상반하거나 충돌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건 많은 사람이 겉으로 학력·학벌은 ‘진정한 능력’이 아니라고 끊임없이 부정하면서도 실제 현실에서는 학력을 능력의 지표로 명백히 인정해왔다는 점이다. 즉 학력·학벌주의는 진정한 능력주의의 환상을 끝없이 키우는 ‘미완의 능력주의’이자 ‘도착된 능력주의’였다.” _(78쪽)
이 책의 ‘불평등은 참아도 불공정은 못 참는’ 한국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은 매우 적실한 것이지만, 어떤 영역에선 이상적 능력주의가 필요할 때가 있다. 이른바 전문가들에 대한 평가가 그러한데, 전문직의 능력과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고 이를 축적해나가는 것이 시장의 왜곡을 방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법조계에서는 정보의 비대칭을 해결하기 위해, 일을 잘하는 변호사를 가리는 평가 기준이 시장 참여자들을 위해 마련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오히려 이곳 법조 시장이야말로 어떤 면에선 출신 학부(로스쿨) - 사법 시험(변호사 시험) 성적 - 판·검사 임용이라는 죽음의 트라이앵글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카스트의 정점에 서 있다.
사실 법조계 밖의 현실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학벌주의는 우리 사회 도처에 자리하고 있다. 예컨대 학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기대되는) 문학판도 예외가 아니다. 내가 매년 사 보는 문학동네의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 보여준 학벌주의의 징후는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다.
이 작품집은 매년 등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소설가의 단편 소설을 심사하여 대상을 선정한다. 12년에 걸쳐 묶여진 작품집은 나름의 편집 규칙이 있는데, 소설가의 작품 뒤에 평론가의 해설이 곧바로 실려 있는 형식이 그것이다. 이런 편집은 나 같은 해석 강박자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하는데, 마치 고등학교 수능 문제를 풀듯이 작가의 작품(문제)을 읽곤 곧바로 다음 페이지의 평론(정답)을 읽는 데서 오는 깨달음이 그러하다. “아, 이건 사랑 얘기인 줄 알았는데 자본주의 일상에 대한 풍자로 읽는 게 더 정확하겠구나” 하는 식이다. 그런데 이 작품집에는 묘한 작가·평론가 소개 규칙이 숨겨져 있었다. 작가의 최종 학력은 기재되지 않으면서도 평론가의 경우에는 반드시 학력이 소개되는 것이다. 수상 작가는 출신 학교 대신 작품 이력이 소개되지만, 평론가의 경우엔 극소수를 제외하곤 출신 학부나 대학원이 모두 기재되어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2010년 제1회 작품집 출간 이후 이 ‘규칙’이 유지되다가 2018년 제9회 작품집부터는 평론가들 역시 등단 연도나 이력 소개로 바뀌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과거 편집자의 의도는 독자의 어떤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박사 출신 평론가의 글은 지방대 출신의 글과 ‘무언가 다르다’는 일반 독자의 편견을 고려한 것일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문학평론가가 어떤 대학에서 어떤 전공을 했는지 아는 것은 평론 자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어떤 문학평론가의 글은 그의 학력과 함께 읽을 때 좀 더 잘 이해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독자들의 학력 관음증이 문학판에도 침투한 것에 불과한가.
학벌주의의 정점에 서 있는 법조계로 돌아와보자. 이곳 한국의 사법 인력 시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줄곧 내부자들의 학력 수준이 가장 높은 곳이었다. 음서제로 불리는 로스쿨 이전 사법 시험 체제에서도 ‘스카이’를 위시한 명문 대학 출신자들은 압도적인 다수를 형성해왔으니, 제도의 문제라고 보기도 어렵다.
법조계 내에서도 상위 인력 시장이라 할 수 있는 대형 로펌의 경우 상위 학벌 출신의 과점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가장 선호하는 대형 로펌 6개사의 출신 학교를 따지면, 로스쿨 ‘스카이’ 출신이 약 77%를 차지한다는 보도가 있었고 학부로 따지면 그 비율은 90%에 육박한다(2021년 기준). 한국의 어떤 고용 시장에서도 이처럼 소수 대학 출신이 자리를 독점하는 경우는 없다.
법조계 내의 학력 분포는 법률 소비자인 의뢰인에게는 어떤 영향을 줄까. 말하자면 의뢰인들은 변호사의 학벌에 대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할까. 나의 지난 10여 년 변호사 생활에 비추어보면, 출신 학교를 의뢰인이 직접 묻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궁금한 경우엔 이미 홈페이지에 적혀 있는 학력란을 살펴보면 되니까 그럴 수 있겠다. 다만 몇몇 특별한 경험은 있는데, 의뢰인 중 기업인 출신은 식사나 술자리에서 변호사의 학벌을 묻는 경우가 다른 이들보다 더 많았다. 중소기업 중 규모가 제법 되는 경우가 더 그러했는데, 회사 대표의 경우에는 자신의 학벌을 내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그런 질문을 던지기도 했고, 자신의 지인이라는 서울대를 졸업한 판검사 출신 변호사를 과시하는 데 질문을 이용하기도 했다(그들은 왜 그 지인을 찾아가지 않고 나를 찾아왔을까?).
나는 스카이 학부를 졸업하고, 지방대 로스쿨을 졸업한 ‘모순된 학벌’의 소유자다. 그래서 몇 번 되지 않는 저 질문을 들었을 때 출신 로스쿨을 말하면서 약간의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어느 학교 출신인가요?”라고 묻는 의뢰인에게, 질문 의도에 따라 출신 로스쿨이나 학부를 말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이때 출신 대학만을 말해야 하는 경우 나는 조금은 의기양양해져 학부 이름을 힘주어 말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의뢰인에게 다소간의 안도감을 선사했다고 자위한다. 반대로 출신 학부를 말할 기회를 잃게 되면 나는 영락없이 (능력 없는) 지방대 출신 변호사가 되어 의기소침해지는 것이다.
얘기를 꺼낸 김에 한 가지 더 고백하자. 3년 전에 나는 책 한 권을 썼는데, 책날개의 저자 소개에는 학부만 소개하고 대학원은 슬며시 빼놓았다. 다른 출판사도 그러한지 모르겠지만, 우리 출판사는 편집자가 저자 소개 글 초안을 보내와 그것을 내가 수정하는 형식으로 글을 완성했는데, 나는 초안에서 이미 감추어진 로스쿨 출신 부분을 애써 외면했다(지금도 책 편집에 정성을 다해주신 편집자님께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다). 아마도 지방대 로스쿨 출신의 저자는 책 판매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짐작이 작용했을 것이다. 지금도 책날개를 볼 때면 내 마음속 주홍글씨를 보는 것만 같다. 요컨대 학벌주의자에게 어떤 벌을 내릴 수 있다면, 나는 고의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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