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을 보며 이 가수나 저 가수나 똑같아 보인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하수다.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한 집약적 에너지와 눈이 아프도록 화려한 외양 탓에 자극이 역치를 넘어 감각이 둔화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똑같다고 뭉뚱그려 말할 수는 없다. 아는 사람은 안다. 케이팝은 오히려 남들과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다르기 위해 몸부림치는 장르다. 쉼 없이 다리를 움직이면서도 머리로는 끊임없이 다음 목적지를 정해야만 한다. 멈추는 순간, 그대로 탈락이다. 무엇보다 두려운 건 그 끝을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끝을 알 수 없는 무한 경주가 주는 숨 막히는 압박감은 때마다 나타나 전에 없던 길을 내주는 개척자들의 존재로 구원받는다. 이토록 모두가 케이팝에 한 마디 얹고 싶어 안달이 난 상황에서도 누구 하나 케이팝이 뭔지 속 시원히 정의 내리지 못하는 건, 결국 케이팝이 가진 고유한 속성 탓이다. 케이팝은 하나의 개념이지만, 한 마디로 설명하기 도무지 어렵다. A라는 결론을 내리려 하면 기다렸다는 듯 B가 등장하고, C가 주축이라고 설명하려면 D와 E가 나타나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버린다. 특별한 규칙도, 법칙도 없는 이 불안한 변칙투성이 세계는 케이팝이 가진 여러 특징 가운데 하나인 빠른 속도와 지루할 틈 없이 쏟아지는 새로움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지금껏 달려왔다. 그 속도를 감당하는 동시에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새로운 자극을 전달하기 위해, CL이 왔다.
오는 10월 발매를 앞둔 새 앨범
노래 ‘SPICY’의 주축은 프로듀서 바우어(Baauer)와 래퍼 소코도모(sokodomo)다. 바우어는 ‘Harlem Shake’로 유명한, 이미 지난해부터 CL과 함께 호흡을 맞춰온 인물이며 소코도모는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는 음악가 가운데 CL의 ‘이 세상 것이 아닌’ 매력을 누구보다 매력적으로 선보일 수 있는 적임자다. 릴 체리(Lil Cherry)나 오메가 사피엔(Omega Sapien) 등 현재 국내 힙합 신에서 가장 개성 넘치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인물들의 뮤직비디오 깜짝 출연이나, 곡의 도입부를 주술적인 내레이션으로 열어준 배우 존 말코비치(John Malkovich)가 CL의 팬으로서 ‘(CL이) 다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어 기쁘고 자랑스럽다’는 진심을 전한 인사말 영상까지, ‘SPICY’ 안의 퍼즐 조각은 오로지 CL만을 위해 존재한다.
이제 본격적인 첫 발자국을 뗀 CL의 새로운 도전이 어떤 결론을 맞이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대중음악을 듣고 즐기는 사람들에게 ‘어렵다’고 느껴질 만한 지점이 많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CL의 과감한 위치 선정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더 미치고 더 빨리 뛰고 싶다고 외치던 2009년의 에너지 그대로, CL은 더 강하고 그만큼 더 자신다워졌다. 그렇게 강해진 케이팝의 여왕은 언제나 그랬듯 두려움 없이 케이팝의 최전선에서 ‘한 수 넘어 두 수’를 놓았다. 거부할 수 없는 여왕의 진두지휘 아래, 케이팝은 다시 한 번 요괴 가오나시처럼 눈앞에 놓인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며 몸집을 불려 나갈 것이다. CL만의 ‘맛’이 더할 케이팝의 새로운 감칠맛이 새삼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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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