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민화 ‘잭과 콩 나무(Jack and Beanstalk)’에서 잭은 하늘을 향해 끝없이 자라나는 콩 나무에 올라타고 구름 위에 있는 거인의 성에 간다. 콩은 나무가 아니기 때문에 콩 줄기를 타고 갔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어려서 이 이야기를 먼저 알았고 나중에 콩밭에 갔다. 여린 콩잎과 콩 줄기를 보면서 어떻게 이걸 타고 그 높은 곳까지 갔을까 생각했다. 이장미의 그림책 『달에 간 나팔꽃』은 낮달을 본 나팔꽃이 달에 가겠다는 꿈에 도전하는 이야기다. 첫 장면을 보면 빨간 개미와 나팔꽃이 달을 본다. 개미는 앞면지에서 얼굴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독자는 개미를 놓치지 않겠지만 글 텍스트는 개미를 못 본 척 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림책에서 이러한 글과 그림의 ‘따로 가기 전략’은 독자의 관전평을 유도하는 효과적인 장치다. “여기 개미도 있는데, 개미 얘기를 왜 안 하지?” 독자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글이 모른 척 하는 그림 속의 개미와 함께 나팔꽃의 서사를 따라간다.
나팔꽃이 달에 가고 싶다고 할 때마다 개미도 꼬박꼬박 고개를 들어 낮달을 본다. 나팔꽃은 초록 열매가 갈색이 되고 온통 그 잎이 말라붙어도 달에 가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서 독자가 더 걱정하는 것은 겨울이 되고나서 도통 보이지 않는 빨간 개미의 안부다. 함박눈 장면에 이르면 그림에 없는 개미가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한다. 나팔꽃에 대해서만 말하는 글을 잠시 원망한다. 봄이 오고 그림의 배경이 선명하게 현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배경이 사실적일수록 서사는 환상으로 간다. 다시 싹 튼 나팔꽃 줄기가 끝도 없이 자라는 것이다. 그림 속 롯데월드타워는 “정신 차려, 여기는 서울이야.”라고 독자에게 말한다. 김동수의 2005년 그림책 『천하무적 고무동력기』에서는 남산타워가 이런 랜드 마크 역할을 맡았던 적이 있다. 나팔꽃은 성층권에 진입하고 그림책은 옆으로, 더 옆으로 펼쳐지면서 그가 우주로 나아갈 길을 만들어준다. 책의 가로 폭은 딱 세 배 넓어지는데 독자는 무중력 우주에 놓인 기분으로 그 장면을 본다. 독자가 나팔꽃 씨앗이 되어버려서 가능한 상대적 크기의 숭고한 경험이다.
그런데 개미는, 사라진 빨간 개미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팔꽃이 달에 꽃을 피울 때까지도 글은 개미에 대해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대답은 마지막에 가서야 나온다. 이 그림책이 좋았던 하나의 이유는 나팔꽃의 꿈을 이루어주었다는 것이다. 이 그림책이 좋았던 더 큰 이유는 개미를 잊지 않고, 그의 삶을 생각하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그림책에서는 글이 말하지 않을 때 독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때로는 내가 잘못 본 것인가 눈을 의심하고, 가끔 글에게 토라져가면서 그림 속의 인물을 발견하고 돌보고 지켜내는 것은 그림을 알아본 독자들이다. 그림을 짚으며 “작가는 왜 이 부분을 글에서 이야기하지 않아?”라는 중얼거림이 그림책을 붙잡는 동력이 된다. 종이를 실로 묶어놓았을 뿐인 간단한 책인데 이렇게 어려운 심리적 긴장을 만들어낸다. 아드리앵 파를랑주의 『내가 여기에 있어』도 독자를 말하게 만드는 걸작이다. 이 책에서 소년은 글을 끌고 걷고 뱀은 느릿느릿 그림 안에서 기어간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깬 소년이 침대 머리맡에서 커다란 뱀의 꼬리를 발견한다. 소년은 뱀의 몸통을 따라서 집을 나가고 도시를 빠져나와 국경을 지나 뱀의 머리를 만나러 간다. 소년이 자줏빛 선을 따라가는 것은 1955년에 크로켓 존슨이 그렸던 걸작 『해럴드와 자주색 크레파스』의 창의적 오마주로 보인다. 그림 속의 뱀은 『어린왕자』의 보아뱀 만큼이나 완만하면서 묵직한 매력을 자랑한다. 그리고 글만 따라갔던 독자는 뱀 모양의 마지막 단서를 짚어 읽고 나서야 무릎을 치며 서둘러 책의 앞장으로 되돌아간다. 놓친 그림의 이야기를 찾기 위해서다. 물론 그림을 따라간 독자는 내내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여기서 이들이 있잖아.”하고. 이처럼 글과 그림이 하나가 되는 책을 보면 가슴이 뛴다. 그림책의 존재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다.
* 지금까지 <김지은의 모두 함께 읽는 책>을 사랑해주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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