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김현영의 여자들의 사회>
여성학자 권김현영이 영화, 소설,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등에 나온
‘여자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3주에 한 번 글을 씁니다.
앤과 다이애나의 관계만큼 노골적으로 여자들의 우정에 대해 몰두하여 묘사한 작품이 또 있었을까. 내 기억엔 없다. 그렇게나 다른 둘이 어떻게 해서 만나자마자 단짝이 되었을까. 내게 그건 커다란 수수께끼였다.
단짝은 어떻게 만드는 거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5학년을 거의 마칠 때 즈음에 전학을 갔다. 그전까지 동네의 골목에서 함께 나고 자란 애들과 방과 후의 시간을 보내고 학교에서는 또 비슷한 자리에 우연히 앉게 된 애들과 학교에서의 시간을 보내면서 태평하게 지내온 터였는데 전학 간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은 사뭇 달랐다. 호기심과 호의도 아니라 서열을 정하려는 질문 공세를 받고 난 다음에야 나는 전학 가기 전에 함께 지냈던 친구들이 무척 그리워졌다. 편지를 썼다. 뭔지 모르겠지만 여기는 아주 달라. 나는 아무래도 점수가 매겨지고 있나 본데 아무도 그 점수를 어디에 쓰는지 말해주지 않아. 친구에게선 함께 보냈던 시간을 추억하는 답장이 왔다. 아 우리는 이미 과거가 되었구나. 몇 번 더 편지가 오가다가 어느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멈췄다. 학년이 바뀌어서 6학년이 되기를 기다렸다. 6학년이 되자 반에는 무리가 생겨났는데, 이때 만들어진 무리는 그전 학교에서도 직전 학년에서도 한번도 보지 못한 형태였다. 여자애들과 남자애들은 한 반이었지만 더 이상 친구로는 지내지 못하는 방식으로 분리되었고 남자애들 사이에서는 양극단의 서열이 만들어졌다. 중간지대는 그 질서를 모른 척 하는 애들로 채워졌다. 여자애들은 크게 세 그룹 정도로 나뉘었는데, 남자애들에 비해서는 노골적이지 않았지만 그룹 간에는 분명한 서열이 있었다. 이제 막 “일본에는 이지메라는 게 있다며?”라는 말이 떠돌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팽팽한 긴장이 시시때때로 흘렀다. 그전처럼 태평하게 있다가는 휩쓸려가기 딱 좋은 상황에서 단짝 친구 한 명이 간절했다. 하지만 독점적인 단짝 친구 같은 형태의 인간관계를 그 전에 한번도 만들어보지 않았던 터였다. 단짝은 어떻게 만드는 거지?
<빨간 머리 앤>을 녹화해서 보고 또 보았던 건 그때의 긴장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일요일 아침과 평일 6시는 텔레비전에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주는 시간대였다. 세계명작극장판 <빨간 머리 앤>도 그때 방영되었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창립멤버인 타카하다 이사오가 연출과 감독을 맡았고 <귀를 기울이면>의 콘도 요시후미가 작화를 맡은 이 50부작 TV시리즈는 지금 다시 봐도 명작이다. 루스 M. 몽고메리의 원작소설에 매우 충실하게 만들어졌는데, 일설에 따르면 타카하다 이사오가 앤이라는 인물의 심리 상태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 차라리 원작에 충실하겠다고 결심한 결과였다고 한다. 여성인물을 입체적으로 묘사하는데 정평이 나있는 타카하다 이사오조차 곤란을 겪었다니 역시 앤 셜리답달까. 최근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빨간 머리 앤> 시리즈는 원작의 기본 설정과 주요 등장인물만 남겨두고 새로운 인물과 에피소드가 추가되었다. 21세기답게 다양성을 고려해서 만들어진 넷플릭스 시리즈도 무척 좋아한다. 다만 다이애나와의 관계성이 지나치게 축소되어 그려진다는 점은 아쉬웠다. 빨간 머리 앤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앤과 다이애나의 관계성이니까.
영원한 맹세
50부작 애니메이션 TV시리즈에서는 단연 다이애나의 존재가 부각되어있다. 다이애나가 제목에 등장하는 편만 꼽아도 4편(다이애나를 다과회에 초대하다, 다이애나의 생일, 다이애나의 추억, 다이애나와의 마찰)이다. 다이애나가 앤의 실수로 술에 취한 사건, 다이애나의 막내 여동생 미니 메이에게 닥친 시련과 이를 해결하는 앤, 다이애나의 부모님으로부터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앤, 이후 진학과 취업 등 꿈을 향해 나아가는 앤과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어 하지 않는 다이애나...둘 사이에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펼쳐졌다. 서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은 길버트의 머리를 석판으로 내려치는 때가 아니라 다이애나와의 우정이 부모라는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위기에 처해진 상황이 극적인 사건으로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이를 계기로 앤의 출신과 과거의 경험은 더 이상 문제거리가 아니라 공동체의 위기를 해결해낼 수 있는 중요한 지적 자원의 원천으로 이동한다. 중요한 건 이런 쓸모를 증명하기 이전에 다이애나와 이미 영원한 맹세를 했다는 점이다. ‘영원한 맹세’ 편은 아예 다이애나와의 우정 서약을 맺는 내용으로만 채워져 있다. 앤과 다이애나와의 첫만남은 서로에게 한눈에 반하는 장면처럼 연출된다. 앤은 다이애나를 보자마자 그대로 돌진하여 자신을 좋아해달라고 친구가 되자고 한다. 앤은 다이애나의 손을 잡고 태양과 달이 비추는 한 내 마음의 벗에게 충실하겠다고 맹세한다. 다이애나는 그런 앤에게 네가 참 이상한 애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나는 널 좋아하게 될 것 같다며 함께 손을 잡는다. 둘은 서정적이라기에 격렬하고 낭만적이라기엔 지나치게 과장되어서 조금은 우스꽝스러울 정도인데, 결국은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을 더없이 사랑스럽게 지켜보게 된다. 검은 머리를 곱게 땋아 올리고 아름다운 외모를 한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의 장녀인 다이애나와 빨간 머리 단벌 옷에 주근깨가 도드라지고 볼품없이 빼빼 마른 고아 소녀 앤은 낮과 밤처럼 달랐지만 보자마자 둘도 없는 단짝이 되었다.
자매애는 여성의 우정을 지칭하는 온당한 말일까
대체 둘은 어떻게 서로를 바로 알아보았을까. 내게 이건 정말 반드시 풀고 싶은 수수께끼였다. 스핑크스의 두 번째 수수께끼처럼 원래 서로 하나였던 걸까. 스핑크스 신화는 이집트판과 그리스판이 사뭇 다르다. 이집트의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에 인간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고 선한 이들의 보호신 역할을 한다. 그리스의 스핑크스는 여인의 얼굴과 가슴을 하고 있고 사자의 몸에 독수리 날개를 달고 있고 꼬리는 뱀이다. 그리스어로 스핑크스의 뜻은 ‘목 졸라 죽이는 자’이다. 의미 그대로 그리스의 스핑크스는 인간의 안위를 위협하는 사악한 존재로 나온다. 스핑크스는 테베의 길목을 막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수수께끼를 낸다. 맞추지 못한 자는 죽는다. 이 유명한 장면은 오이디푸스의 귀환 서사에 등장한다. 무역상들의 발길이 끊겨 테베는 점차 고립되던 터에 오이디프스는 스핑크스와 대결에 이겨 영웅적으로 귀환한다. 스핑크스가 낸 첫 번째 수수께끼는 아주 유명하다. “아침에는 발이 4개, 점심에는 발이 2개, 저녁에는 발이 3개인 것은?” 정답은 인간. 두 번째 수수께끼는 조금 덜 알려져 있다. “두 자매가 있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낳는다. 이들은 누구인가?” 정답은 낮과 밤이다. 그리스어로 낮과 밤은 모두 여성형 명사이고, 각각 낮의 여신 헤메라와 밤의 여신 닉스를 뜻한다. 이들은 표리일체의 존재로 세계의 서쪽 끝 지하에 함께 관을 쓰는데 낮과 밤이 바뀔 때 스쳐 지나갈 뿐 함께 있을 수 없는 운명이다. 빛과 어두움을 나누고 빛을 낮이라 칭하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했다는 창세기에 따르면, 태초의 시작에 두 자매의 분리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앤과 다이애나도 이렇게 원래 하나였을까. 사랑에만 운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정에도 운명이 있을까. 그리고 여자의 우정을 혈연 가족에 대한 상상력에 기반한 ‘자매애’로 부르는 것이 과연 온당할까. 찬드라 모한티는 “자매애가 그 자체로 개인적인 의도, 태도 혹은 욕망을 기반으로 정의된다면, 갈등 또한 자동적으로 심리학적 수준에 의해서만 구성된다”고 쓴 바 있다. 다이애나는 앤을 통해 부모가 미리 정해준 삶의 한계를 넘어갈 수 있었고, 앤은 다이애나를 통해 그린게이블즈의 실질적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둘 사이의 우정이 상호인정과 욕망으로 재배치되고 나면 주변 가족의 인정 속에서 관계는 안정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서로의 차이에 대해서는 침묵하게 된다. 그리고 단언컨대, 그런 우정은 더 이상 빛나지 않는다. 둘 사이에는 말하지 않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진다. 비밀이어서가 아니라 서로에 대해 더이상 궁금하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우정이란 무엇인가
대학교 1학년 교양 수업 때의 일이다. 칠판에 ‘우정이란 무엇인가’를 적었던 선생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인용하며 “다른 모든 좋은 것을 가졌다고 해도 필로스(philos)가 없는 삶은 누구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며 동기들끼리 잘 지내라고 했다. 그러더니 “특히 여학생들 말이야”라고 덧붙였는데, 그 사족의 뉘앙스는 분명 부정적이었다. 여자들 사이의 우정은 이렇게 종종 공개적으로 모욕당하곤 했다. 선생님뿐만 아니라 선배들도 종종 그런 말을 입에 올렸다. 동기사랑 나라사랑 같은 말을 술자리에서 건배사로 하라고 시키곤 했던 선배들 중 누구 하나는 꼭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친구란 없는 거야~라며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내곤 했다. 뭘 어쩌라는 걸까. 그러는 선배님 동기는 왜 저 멀리 떨어져 앉아 있는 거죠...라고 물어보고 싶은 걸 참으며 나는 언젠가는 여자의 우정에 대한 이 오래된 폄훼의 역사에 대해 글을 쓰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찾아 읽어본 바에 따르면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친구들 사이의 우정을 필리아(philia)라고 하고 필로스(philos)는 친구를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사랑할만한 것(phileton)이 사랑받는다”는 가정과 “친구는 또 다른 자기”(allos autos)라는 설명은 친구를 탁월한 인간의 자기애가 확장된 형태로 인식하도록 했고, 그 결과 우정을 근대 시민 남성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방식으로 특권화시켰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정에 대한 설명, 필로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순수하고 상호적이며 서로가 친구라는 걸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내용에 밑줄을 그으며 앤과 다이애나를 생각하곤 했다. 서로 유익하되 그것이 우정의 조건이 되면 안 되고, 동등하되 집단의 무리로서 소속하는 것 이상의 배타적 특별함이 있는 것. 무엇보다 순수하게 상대의 좋은 점을 좋아해 주는 것. 그것이 빨간 머리 앤과 검은 머리 다이애나가 나눈 우정이었다.
동맹으로서의 우정에 대하여
탁월한 이들끼리의 확장된 자기애라거나 ’친구는 또 다른 자기‘라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앤과 길버트의 관계가 떠올랐다. 앤은 다이애나와의 관계에서 휠씬 덜 경쟁적이고 호혜적이며, 길버트와는 내내 경쟁하고 비교한다. 성별에 따라 달랐다기보다는 우정의 형태가 달랐다. 그래서 길버트가 앤과 더 이상 경쟁하지 않고 양보한 것은 사랑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그동안 내내 쌓아 올린 특유의 우정을 일방적으로 끝내는 일이기도 했다. 성인이 된 앤은 대학에 가서 내내 길버트와의 우정을 유지하고자 애쓰지만 결국 실패한다. 앤과 길버트가 연인이 되고 둘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이야기가 10권까지 이어지지만 이때부터의 앤은 규범적이고 모범적인 여성상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찬드라 모한티는 버니스 존슨 레이곤의 동맹과 연대 개념을 가져온다. 레이곤은 ’집안의 여성(in-house)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여성만의 공간, 혹은 여성으로 정체성을 이루는 공간을 강제하는 관념을 비판한다. 레이곤은 자동적으로 단결로 이어지는 기반으로서의 여성이라는 기호를 사용하는 것은 결국 여성이라는 특별한 규범적 정의가 강요하는 배제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 이상 “자매애는 힘이 세다”는 환상적 단결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서로 만나게 하지 못하는 인종적, 계급적, 지역적,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의 차이에 대해 말할 때만이, 가족 은유에 포섭되어버린 자매애가 아니라 동맹으로서의 우정에 대해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넷플릭스 <빨간 머리 앤> 시즌 3에 등장하는 퀴어 소년 콜과 선주민 족장의 딸인 카퀫과의 우정은 <빨간 머리 앤>이란 이야기가 백 년 동안 살아남으며 다음 세기로 자기 자신을 내던졌을 때 만나게 된 새로운 운명의 상대들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우정의 인간’인 앤이 카퀫의 곤경에 기꺼이 자신을 내던지는 장면을 이어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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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김현영(여성학자)
여성학 연구자. 언제나 여자들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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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