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인터뷰] 소설가 한지혜 “지나고 나면 슬픔은 아름답게 떠올랐다”
20년간 쓴 글을 한데 모으고 나니, 제가 살았던, 뭐라 말할 수 없던 시간에 비로소 이름을 붙여주고 손 내밀어 악수해주는 느낌이었어요.
글ㆍ사진 김윤주
2019.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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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흥종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는 내가 버텨온 흔적이 있고, 기쁨이 남은 자리에는 내가 돌아보지 못한 다른 슬픔이 있다.” 등단 21년 차 소설가 한지혜 저자의 글은 눈을 닮았다. 들끓지 않고 차분하되, 지나온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포근하다. 어디에나 내리는 눈처럼, 저자는 슬픔과 기쁨 모두를 공평하게 바라본다. 고달팠던 어린 시절에도 ‘성장’이 있었고, 가장 기쁘던 순간 뒤에도 힘듦이 찾아왔다. 버텨온 자신을 다독이고 외면했던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며, 저자는 지난날의 골목을 돌아 나온다.

 

과거를 보듬는 태도는 현재까지 이어진다. 저자는 공모전 심사를 할 때, 빛나지 않는 소설도 끝까지 읽으며, 중심에서 빛나는 것보다 “생략된 삶”에 주목한다. 53편의 산문이 향하는 길은 그래서 갈수록 넓어진다. ‘나’에서 이웃으로, 또 공동체로. 저자가 낸 4개의 골목을 따라 가는 길은 그래서 뿌듯하고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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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오신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으셨어요. 과거의 글을 다시 읽을 때 느낌이 어떠셨나요? 묶고 난 뒤의 소감도 궁금합니다.


책으로 묶인 글 중 순서상 가장 오래된 글이 서른 즈음에 쓴 글이니 거의 20여 년의 세월 동안 쓴 글입니다. 길다면 긴 그 시간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는데, 한데 모으고 나니 제가 살았던, 뭐라 말할 수 없던 시간에 비로소 이름을 붙여주고 손 내밀어 악수해주는 그런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애틋하고 뭉클하고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책이 4개의 골목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각각의 ‘골목’에 담긴 뜻이 있나요?


워낙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매체를 통해 쓴 글이라서 이것을 어떻게 읽기 좋게 분류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습니다. 시간별로도 애매하고, 주제별로도 애매하고요. 그래서 글에 담긴 시선을 생각해봤습니다. 첫 번째 골목은 제 자신을 보고 있지요. 두 번째 골목은 이웃과 가족을 봅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마을과 사회 같은 공동체를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나고 나면 슬픔은 더러 아름답게 떠오르는데, 기쁨은 종종 회한으로 남아 있다”(6쪽) 는 문장이 인상적입니다. 작가님에게 회한과 함께 떠오르는 기쁨의 기억은 무엇인가요?


책 본문에서 찾는다면 신춘문예 시상식에 가족을 부르지 않았던 일이겠지요. 상금 때문에 혼자 간 것처럼 써놓기는 했지만, 사실 여러 가지로 복잡한 날이었어요. 모두 생계를 위해 출근해야 했는데, 다 접고 나를 축하하러 와달라고 할 만한 자리도 아닌 것 같고, 가까운 친구 두 명이 혼자 쓸쓸할 거라고 겨우 시간을 내서 왔으니까요. 첫 산문집을 낸 요즘도 그날과 비슷한 순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이 기록을 보여드릴 수가 없어요. 두 분 다 이제는 세상에 계시지 않으니까요.

 

글 쓰는 여성은 ‘여성 문학’이라는 틀로만 평가받거나, 생계에 대한 부담이 없다는 편견도 있지요. 이런 현실이 여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여성이 쓰는 문학을 굳이 '여성 문학'이라고 부르는 사회는 지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 문학'이라는 단어는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리키는 내용이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과거의 '여성 문학'이 취미 문학 정도로 폄하되었다면 요새의 '여성 문학'은 페미니즘 이슈와 맞물려서 비판 혹은 비난을 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당선자보다 탈락자, “생략된 삶”을 향한 작가님의 일관된 시선이 느껴집니다. 심사할 때도 당선 여부와 관련 없이 빛나지 않는 소설도 끝까지 읽는다고 하셨어요. 그런 태도를 갖게 되신 계기(이유)가 있나요?


특별한 계기는 없고, 이유라면 누군가 제 소설을, 제 삶을 그렇게 찬찬히 봐주길 바랐던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겠죠. 제가 바라는 태도를 타인에게 취하는 건 아마도 제가 저를 위로하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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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흥종

 

 

엄마의 반찬이나 뻥튀기 등 어린 시절 느꼈던 ‘맛’에 대한 기억이 자주 언급됩니다. 작가님에게 가장 그리운 ‘맛’은 무엇인가요?


어느 해던가 엄마가 김장을 담그면서 배추를 잘못 절였어요. 소금을 지나치게 많이 넣었든지 아니면 너무 오래 절였든지 아니면 둘 다였을 텐데 웬만한 장아찌나 젓갈이 그보다 심심하다 싶을 만큼 독하게 짰어요. 실패했다고 버릴 수도 없고, 겨울에 배추가 나오던 시절도 아니고, 물에 담가놓아도 짠 기가 빠지지 않는, 혀끝이 아리던 그 김치를 겨우 내내 먹었어요. 저희 사 남매가 거의 유일하게 똑같이 기억하는 맛이에요. 어린 시절의 어떤 아찔하고 어이없고 혹독한 순간을 이야기할 때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김치 기억나? 하고 떠올리는 맛이기도 하고요. 그리운 맛은 아닌데, 이 질문에 그 맛이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IMF와 실직, 병중에 계신 부모님까지 힘든 일을 한꺼번에 겪으신 시기가 있었지요. 그 시절에 작가님을 지탱해준 것은 무엇이었나요?


어떤 무언가에 의지해서 시절을 지나왔던 것 같지는 않아요. 원래 성격이 예전에도 지금도 그다지 의연하지 않습니다. 바락바락 대들고 화내고, 울고 소리치고, 포기하고, 주저앉고. 그 시절 한가운데에 있을 때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나에게는 산문의 세계와 소설의 세계가 따로 있지 않다”고 하셨어요. 작가님에게 ‘산문’은 어떤 글쓰기인가요?


내가 누구인지를 들여다보는 글쓰기라고 할까요. 나를 관통해가는 시간과 사건을 정리하고 그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나란 사람이 궁극적으로 어떤 사람인지를 스스로 정리하게 됩니다. 내가 나를 수시로 들여다보고 정확하게 인식한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인생의 풍요로움은 꿈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86쪽) 고 하셨어요. 작가님의 현재 ‘꿈’은 무엇인가요?


바로 지금 당장의 꿈으로 제한한다면 제 글이, 제 생각이 멀리까지 닿는 거죠. 그곳에서부터 돌아올 이야기를 갖고 싶고요. 그런데 꿈보다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해놓고, 저는 제 꿈을 자꾸 허무맹랑한 것으로 몰아붙여요. 그러지 말자고 제가 저를 설득하고 있어요. 허무맹랑하면 또 어때, 원래 개꿈이 꿀 때는 제일 재밌더라, 하기도 하고요.

 

글쓰기를 계속해나갈 것이라는 다짐으로 책이 끝납니다. 작가님의 추후 집필 계획이 궁금해집니다.


그동안 쓴 단편을 모은 작품집을 내년에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출판사가 정해진 상태이고, 제 바람은 눈 내리는 겨울이 지날 즈음 보여드리고 싶지만 혼자서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서요. 늦어도 하반기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IMF 시절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후 사라진 어린 시절의 친구를 찾는 여정을 통해 실종 상태인 현세대를 다룬 연작을 묶은 경장편도 함께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지혜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작품집으로 『안녕, 레나』와 『미필적 고의에 대한 보고서』가 있으며, 각각 문예진흥원이 뽑은 우수문학도서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뽑은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었다. 일간지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참 괜찮은 눈이 온다한지혜 저 | 교유서가
문득 문득 어릴 적 엄마가 지어준 밥 냄새가 그리워질 만큼 친밀하고 소중한 삽화들로 가득 차 있다. ‘나의 살던 골목에는’이라는 부제처럼 작가는 살아오면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맞닥뜨린 세상의 풍경을 네 개의 골목으로 나누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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