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것을 모두 기억하는 일
어떤 행위를 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라고. 맘 편히 살다가 꽤 시간이 지나 성공의 정점에 다다른 시점에 디지털이란 우주를 떠돌고 있던 기억의 편린들이 모여서 그 정점을 한 번에 부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글ㆍ사진 하지현(정신과 전문의)
2019.06.10
작게
크게

언스플래쉬 1.jpg

            언스플래쉬

 

 

무의식의 세계, 트라우마와 콤플렉스

 

프로이트로부터 시작한 정신분석은 주관적 기억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한 사람의 서사에 주목한다. 외상적 기억은 무의식 깊이 억압이 돼 의식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되고, 그 덕분에 의식하는 개인의 서사는 왜곡이 일어난다. 이를 위해 많은 심리 에너지가 투입되며, 의식으로 올라오려는 본능적 충동을 막기 위해 방어하는 과정에 증상이 발생한다. 이를 해결하는 길이 정신분석이다. ‘굴뚝 청소’라고 이름을 붙인 말로 하는 자유연상을 이용해서 무의식에 저장되었던 기억의 실체를 의식화하여 비로소 온전한 기억으로 통합되며 증상에서 벗어나고 안정적 심리상태로 회복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정신분석을 포함한 모든 정신치료는 한 사람의 기억과 이를 둘러싼 충돌과 억압을 해결해 다시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이다.

 

어떤 기억은 원치 않게 망각이 되어버리고, 어떤 것은 제발 사라지기를 바라지만 껌딱지 같이 달라붙어 사라지지 않아 원치 않을 때마다 불쑥불쑥 튀어나와 사람을 괴롭힌다. 사실 기억이 불완전하고,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고 자연히 망각의 프로세스를 거치는 것은 생존과 삶의 효율성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지하 주차장에 매일 다른 곳에 주차하는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차한 곳이 모두 기억되어 있어 겹쳐져 있으면 문제다. 바로 오늘 금요일 아침 주차한 곳만 기억해야 바로 찾는데 금요일 저녁에 5일치 기억이 모두 겹쳐서 나오면 다섯 곳을 돌아보아야 겨우 내 차를 찾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용서와 화해도 기억의 망각 덕분인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은 옅어지고, 죽이고 싶고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던 사건도 멀리 느껴지는 날이 오고야 만다. 겨우 용서하고, 그 상대와 화해를 할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절대 잊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을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기억의 박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난 몇 년 사이 디지털이 일상화되고, 우리의 많은 삶의 한 순간들이 디지털에 남으면서 원치 않는 박제된 사건들이 몇 년 만에 갑툭튀를 하는 사건들을 보게 되기도 한다. 잘 나가던 셀렙이 몇 년 전에 막 나가던 10대 시절의 SNS 사진이나 게시판 글 몇 개가 발굴 되면서 바로 퇴출되는 사건도 있었다. 행위의 디지털화와 엄청나고 무한한 저장의 세계가 내 머릿속으로 직렬연결되어 이식되어 모든 걸 다 저장하고 회상할 수 있게 되는 건 무의식의 세계와, 트라우마와 콤플렉스의 영역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더 이상 앞으로 못 나아가게 할 위험

 

 

800x0.jpg

                                                    

 

 

여기에 대해 재미있는 가상 시뮬레이션을 해볼 기회를 주는 소설 하나를 만났다. SF소설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이후 17년만에 내놓은 두 번째 소설집  『숨(exhalation)』 에 수록된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이다. 실현가능한 설정을 이용해서 기억의 보존, 주관성, 감정적 기억과 서사적 진실이란 것에 대해 깊은 통찰을 할 기회를 줬다.

 

이 소설의 공간은 미래다. 화자는 저널리스트로 아내 엔젤라가 집을 나간 후 10대 딸 니콜을 혼자 키웠고, 지금은 니콜은 성인이 되어 독립을 한 상태다. 지난 몇 십년 동안 웻스톤이라는 회사는 신종 검색툴인 리멤(remem)을 출시해서 몸에 장착된 개인 카메라로 모든 일상을 촬영해서 저장하는 라이프 로그를 유지할 수 있게 몇 천 만명이 사용 중이다. 엄청난 정보가 저장되어 있다 검색어를 말하면 아주 쉽게 그와 연관된 기억을 끄집어 내서 시야의 좌측 하단에 보여준다. 예를 들어 부부가 과거 일에 대해 다툼을 하다가 서로의 기억이 다를 때 서로 그 사건을 떠올리면서 시시비비를 가리기가 한결 쉬워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논쟁을 해결할 때에는 유용하지만, 화자는 모든 걸 다 영원히 기억하는 것이 좋은 게 아니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개발을 한 웻스톤은 이 검색 기능에 익숙해지면 기억 자체를 이 검색기에 의존하게 되면서 기억 자체를 할 필요를 줄이면서, 사고 과정 자체도 변화할 것이라 예상하였다. 그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원하지 않는 수십 년 전 기억이 백 퍼센트 생생하게 회상되는 것은 괴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심적 고통을 더 이상 생생하게 느끼지 못해야 용서도 쉬워지고 해당 기억의 중요도가 감소할 수 있어야 용서와 화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게 인간이 수십 만년 동안 살아온 방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리멤은 그 오랜 역사의 피드백을 완전히 저해해서 현재에 머무르고 더 이상 앞으로 못 나아가게 할 위험이 있다고 화자는 우려했다.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그것이 끊임없이 떠오르면 그 임팩트를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반응하고 소화하느라 정작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기회는 놓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였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테드 창만의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한다. 화자는 그때까지 아내 엔젤라가 집을 나간 후 힘들게 살아가던 시기에 10대 딸 니콜과 다투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부녀 모두가 견디기 힘든 시기였고, 자주 사춘기 딸과 언쟁을 했다. 그러던 중 니콜이 분노에 차서 “엄마가 누구 때문에 나갔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지금 내 앞에서 사라져!”라고 말을 하고는 가출을 한 사건이 있었다. 큰 충격을 받았고, 반성과 성찰을 하고 다른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고, 대학 졸업식에서 니콜의 포옹을 받으면서 자신의 노력의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이제 화자는 취재 기사를 쓰기 위해 자신의 라이프로그를 주변으로부터 받아서 구해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니콜과의 대화는 전혀 달랐다는 것이 라이프 로그 검색으로 알게 된다. 감정적 임팩트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지, 사건 자체의 구도와 말을 한 사람, 대화의 내용이 완전히 다른 형태로 화자의 기억에 저장되어 있다는 것을 니콜의 라이프 로그로 밝혀진 것이다. 전혀 다른 사실을 알게 된 화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피해자 인줄 알았는데 가해자였고, 자신의 노력으로 화해가 된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닌 다른 일이 더 큰 영향을 준 것이었다. 이 일을 겪고 난 후 화자는 큰 성찰을 하게 된다. 모든 걸 모두 기억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는데, 반대로 디지털 기억이란 박제된 기억,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주관적 기억의 왜곡과 막무가내 자기 합리화를 없앨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소설의 통찰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 인간 본성과 뇌의 세팅에 대한 향수를 바탕으로 디지털에 대한 비판을 하는 일반적 문제의식에 머무르지 않은 것이다.

 

 

언스플래쉬 2.jpg

             언스플래쉬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소설에서는 말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틀린 일, 잔인한 일, 위선적인 일을 모두 망각해버린다. 없었다고 여기고 나는 착한 사람, 피해자일 뿐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간다. 스스로에 대해서 거의 모른다. 우리는 사실은 나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잘못을 저질렀을 수 있다. 내 마음 안에 내가 갖고 있는 나란 사람에 대한 가정은 실제는 거짓말이 훨씬 많을지 모른다. 최소한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걸 인정한다는 것은 다시 그런 행위를 되풀이할 가능성을 많이 줄여줄 것이다. 화자는 리멤이 라이프 로그로 모든 걸 기록하고 있다는 걸 인식하는 한, 내 자아상이 진실에서 너무 멀어지는 걸 막아줄 것이라 말한다. 최상의 행위만 기억하고 행복해하기보다, 스스로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가능성에 대해서 섣불리 재단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이야기는 마무리를 짓는다.

 

이 짧은 소설을 읽고 기억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있다. 무엇보다 정보가 영원히 박제되는 디지털이 일상화된 21세기 사회에서 수 만년 동안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합리화를 위해 기억을 왜곡하고, 선택적으로 망각해오던 일을 더 이상 지금같이 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도 고민을 할 필요가 있었다.

 

최근 유명 연예인이 거의 10년전 학교 폭력의 가해자였다는 것이 피해자를 통해 폭로됐다. 증거로 제시된 것들은 과거의 SNS 글과 사진이었다. 가해자인 연예인은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해명했고, 일부에서는 거짓 변명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기억의 메커니즘을 이해한다면 그럴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 그는 그걸 기억하고 간직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또 그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상의 행동이었을 수 있으니까. 또 자기 나름대로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왜곡해서 기억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니 한 편 ‘뭘 그런 걸 가지고 공격하나’ 억울해 할 수 있다. 반면 피해자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감정의 기억이었던 것이다. 이런 간극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시시비비를 가리기 어려운 일이 되기 쉽다.

 

싸이월드와 같은 SNS 초기 사이트가 시작한 시대에 많은 정보가 사이버 공간에 올라온 세대에서는 마치 이 소설에서 라이프 로그로 기억의 왜곡을 찾아낼 수 있었듯, 저장되었던 사진과 글로 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었다. 테드 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 핵심이 아니었을까? 디지털 세상이 왔으니, 타인에게 잔인한, 위선적, 이기적 행동을 아무렇지 않듯이 하고 자의적으로 쉽게 망각해버리고 편하게 사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고. 그러니, 어떤 행위를 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라고. 맘 편히 살다가 꽤 시간이 지나 성공의 정점에 다다른 시점에 디지털이란 우주를 떠돌고 있던 기억의 편린들이 모여서 그 정점을 한 번에 부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기억 #숨 #테드창 #망각
0의 댓글
Writer Avatar

하지현(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