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아하는 소리는 소주병을 따고 첫 잔을 따를 때 나는 소리다. 똘똘똘똘과 꼴꼴꼴꼴 사이 어디쯤에 있는, 초미니 서브 우퍼로 약간의 울림을 더한 것 같은 이 청아한 소리는 들을 때마다 마음까지 맑아진다. 오직 새로운 병의 첫 잔을 따를 때만 나는 소리라는 점에서 애달픈 구석도 있다. 다음 소리를 들으려면 소주 한 병, 그러니까 소주 일곱 잔을 비워야 하는데, 여러 명이서야 금방이지만 둘이서 마실 때는 지나치게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나는 술을 매우 천천히 마시는 편이다). 게다가 퇴근 후 두 명이서 만나 잠깐 마셔봐야 세 번이나 들을 수 있을까?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평일에는 일찍 술자리를 파한다. 특별한 일이 지나치게 자주 생기기는 하지만...)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혼비 작가의 에세이 『아무튼, 술』 속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인터뷰 - 김혼비 작가 편>
오늘 모신 분은 책읽아웃 청취자들의 마음에 우아한 ‘로빙슛’을 꽂아 넣으셨던 분입니다. 이번에는 술술 넘어가는 술 이야기로 저희를 취하게 만드실 생각이신 것 같은데요. 기절할 만큼 축구를 좋아해서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를 쓰셨고, 말도 안 되게 술을 좋아해서 『아무튼, 술』 을 쓰셨습니다. 김혼비 작가님입니다.
김하나 : 음주방송은 <김하나의 측면돌파>에서 두 번째이기는 한데요. 오늘은 최초로 소주가 등장했네요. 김혼비 작가님이 좋아하시는 빨간 라벨. 왜 빨간 라벨 소주를 좋아하시나요?
김혼비 : 제일 술 다워서...? (웃음) 요새 소주 도수가 점점 낮아지면서 순해지는데, 그 와중에서 조금 독보적으로 아직도 소주답게...
김하나 : 야성미가 있군요. 빨간 라벨은 몇 도인가요?
김혼비 : 20.1도예요.
김하나 : 와, 20도가 넘는 술이네요. 일단, 『아무튼, 술』 을 읽으신 분들에게는 ‘그 소리를 다시 들어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일어날 것 같은데요. ‘그 소리’라 함은, 김혼비 작가님이 너무 찰지게 묘사하신 ‘똘똘똘똘 또는 꼴꼴꼴꼴’의 소리가 나는 것인데요. 무슨 소리죠, 그게?
김혼비 : 소주 첫 잔 따를 때 나는 소리입니다(웃음).
김하나 : 저는 첫 잔에서만 그런 소리가 난다는 걸 인식 못 하고 있었어요. 그 부분을 읽고 난 뒤에 제가 처음으로 소주를 만난 것인데, 그 소리를 한 번 여러분께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똘똘똘똘과 꼴꼴꼴꼴 사이 어디쯤에 있는, 초미니 서브 우퍼로 약간의 울림을 더한 것 같은 청아한 소리))
김하나 : 아, 그러네요! 똘똘똘똘인지 꼴꼴꼴꼴인지 모를 이 소리가 첫 잔에서만 난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김혼비 작가님이 책에서 밝히신 노하우가 있었죠. 이 소리를 즐기기 위한 방법!
김혼비 : 네, 한 병을 더 시켜서 따라낸 병에 소주를 다시 채워 넣은 다음에 다시 따른다(웃음).
김하나 : 맛에는 영향이 없지만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
김혼비 : 네(웃음).
김하나 : 이런 소리들이 은연중에 술자리의 오감을 만족시켜주는 것 같아요. 술맛을 더 돋우면서.
김혼비 : 네. 약간 ASMR 같지 않아요?
김하나 : 그렇죠.
김하나 : 이 책에 보면 수능 백일주부터 여러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일기 같은 걸 쓰시나요? 음주일기라든가(웃음).
김혼비 : 그러면 매년 일기장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요(웃음).
김하나 : 잊을 수 없는 사건들로 책을 쓰신 거군요. 그러면 글을 쓰실 때 잊고 있던 음주에 관련된 기억들이 생각나는 것들이 있었겠어요.
김혼비 : 네.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책이 350~380매 정도 되는데, 처음에는 충분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분량이 충분하지 않더라고요.
김하나 : 그러시면 책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쓰고 싶었던 에피소드 중에 들려주실 수 있는 건 있을까요?
김혼비 : 실제로 썼다가 넣지 않은 에피소드가 두 개 있어요. 하나는 출판사 대표님과 상의를 해서, 분량 걱정 말고 넣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결국 들어갔어요. 그게 와인 이야기인데, 원래는 뒷부분들을 안 넣으려고 했었어요. 그러다가 대표님의 판단 하에 넣었고요. 끝까지 안 넣은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분량 때문은 아니고, 이야기에 나오는 분한테 조금 실례인 것 같아서(웃음). 방송에서는 뼈대만 이야기하면 되니까 차라리 괜찮은데, 책은 세밀하게 묘사해야 해서 쓰다가 너무 실례인 것 같아서 뺐는데요.
김하나 : 그러면 말로 한 번 풀어놔 보시죠(웃음).
김혼비 : 예전에, 사귄 건 아니지만 요즘 말로 하면 ‘썸’이었던 분이 있었는데, 되게 좋은 분이셨고 술도 꽤 즐기셔서 퇴근하고 같이 저녁 먹으면서 반주하고 했었거든요. 어느 날 그 분이 오더니 어머님이 한약을 지어 오셔서 3개월 동안 술을 못 마신다고 하신 거예요. 그래서 술 없이 만났죠. 저는 앞에서 누가 술을 안 마시는데 혼자 술을 마시는 타입은 아니거든요. 같이 나눠 마셔야 재밌는데. 계속 만남을 가졌는데 점점 재미가 없어지고 뭔가 허전하고 점점 호감도 줄고... 그렇게 됐어요. 조금 썸이 길어져서 결정을 해야 될 타이밍에 그 분이 사귀자고 이야기를 했을 때...
김하나 : 3개월의 와중에요?
김혼비 : 네, 3개월은 아직 안 됐고 한 달 반 정도 지났어요.
김하나 : 아, 타이밍 선정이 너무 잘못된 거 아닐까요.
김혼비 : 네. 그래서 사귀자고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죄송한데 저희는 안 맞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그 분이 우셨어요. 저는 막 따라 울고... 그 분이 잠긴 목소리로 ‘제가 마음에 안 든 이유를 이야기해주실 수 있느냐’고 하시는데... 다 울고, 이 자리에 온갖 비극이란 다 있고, 애틋하고, 애절한데 ‘한약을 드셔서 그랬다’라고 말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 슬픈 이별의 이유가 ‘한약 복용’으로 귀결되는 게 너무 싫은 거예요. (웃음) 그래서 말을 못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그런데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그 분이 또 한약이 되게 잘 받는 타입이셨던 거예요. 그래서 제 눈에도 그 분의 혈색이 좋아지는 게 막 보였어요. 그래서 제가 한 번 슬쩍 물어봤어요. 그렇게 한약의 효과를 잘 보시는 분들이 3개월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드시거든요. 그래서 제가 ‘혹시 장복하실 계획인지’ 물어봤어요. 장복의 기미가 보여서. 그랬더니, 그럴지도 모른다고 하셔서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을 했어요. 어쨌든 그 분이 막 울고 그러는데, 좋아진 혈색으로 우시니까 너무 마음이 복잡하고(웃음). 그 에피소드를 썼다가 ‘이걸 글로 쓰는 건 아닌 것 같다’ 싶었는데, 제가 붙였던 제목이 ‘한약 아니면 사약’이었어요. 그 분의 건강은 한약이 지켜줬으나 우리의 관계에는 사약 같은 존재였던 건데, 이건 3일 동안 썼다가 실례인 것 같아서 뺐어요.
김하나 : 그런데 너무 재밌네요(웃음).
김하나 : 책의 첫 부분에 ‘주류 작가가 되고 말겠다’는 열망을 품게 된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내가 술에 대해서 쓰면 주류(酒類) 작가가 될 수 있겠구나, 메이저가 아니더라도 주류(酒類), 커피나 사이다 같은 비주류가 아니라 주류 작가가 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을 하셨었는데, 거기에 어머님의 영향이 있었잖아요. 어머님이 주류 작가가 되기를 원하셨나요?
김혼비 : 네, 어렸을 때부터 뭔가 주류로 살았으면 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항상 어머님의 기대에 어긋나는 딸이어서, 그런데 책(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도 마이너하니까, 주류가 되길 바라셨어요.
김하나 : 주류로 산다는 건 어머니께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김혼비 : 그냥 그게 편안한 삶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어쨌든 모든 시스템이 대다수에게 편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니까 대다수에 속해 있으면 부딪힐 일이 많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제가 조금 편안한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마음에서 그러셨던 것 같아요.
김하나 : 그랬더니 온 몸으로 부딪히며 여자 축구를 하지 않나, <책읽아웃>에서 소주를 마시며 녹음을 하지 않나, 이렇게 당당히 주류 작가가 되시고 말았는데요. 어머님은 책을 보시고 뭐라고 하시던가요?
김혼비 : 결론부터 말하면, 엄마는 이 책을 너무 싫어하세요.
김하나 : 정말요? 어머니 주량은 어떻게 되시나요?
김혼비 : 어머니는 소주 한 잔이요.
김하나 : ‘꼴꼴꼴꼴 첫 잔’이군요.
김혼비 : 네. 이번 책이 마침 5월 8일에 2쇄를 찍었어요(웃음). 그래서 좋은 어버이날 선물이 되지 않을까 해서 전화로 말씀드렸는데, 그때 엄마가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시는 거예요. ‘나는 내 친구들이 이 책의 존재를 제발 모르고 지나갔으면 좋겠고, 세상에 한 사람이라도 이 책을 덜 읽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네가 그러고 사는 걸 세상 사람들한테 다 알릴 필요가 있냐’고 하시면서 너무 싫어하시고요. 아마 저희 엄마는 돈이 진짜 많으셨으면 전국 서점을 돌아다니면서 책들을 다 사셨을 것 같아요.
김하나 : 사서 다 불태우시고(웃음).
김혼비 : 네. 그랬으면 20쇄까지 갔겠네요. (일동 폭소) 책은 20쇄까지 갔는데 읽은 사람은 거의 없는(웃음).
김하나 : 되게 컬트적인 책이 될 수 있었겠네요(웃음).
김혼비 : 네, 그랬을 것 같아요.
김하나 : 어머니, 그런데 저는 이 책을 보고 너무너무 반가웠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또 있구나’ 싶어서요(웃음).
*오디오클립 바로듣기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391/clips/161
김하나(작가)
브랜딩, 카피라이팅, 네이밍, 브랜드 스토리, 광고, 퍼블리싱까지 종횡무진 활약중이다. 『힘 빼기의 기술』,『15도』,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등을 썼고 예스24 팟캐스트 <책읽아웃>을 진행 중이다.
쥘리에트
2021.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