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권 앓이’가 시작됩니다
『다섯 번째 계절』은 세상의 종말과 함께 한 개인, 남편의 손에 아들을 잃고 오로진이라는 정체가 발각된 여성 에쑨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글ㆍ사진 장은진(황금가지 편집자)
2019.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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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세상의 종말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빨리 끝내고 더 재미있는 부분으로 넘어가야 하니까.”

 

N. K. 제미신은 이 작품을 통해 SF계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휴고 상 최우수 장편상을 흑인 작가로서는 최초로 수상했다. 보다 앞서 흑인 여성 작가로서 큰 족적을 남겼던 ‘그랜드 데임’ 옥타비아 버틀러가 단편과 중편으로 휴고 상을 수상했던 시기가 80년대 중반이었음을 생각하면, 획기적이지만 참 늦게 일어난 변화다.

 

휴고 상 역사에서 유례없는 기록을 세운 시리즈이지만 사실 작가와 작품에 끌리게 된 데는 좀 더 개인적이고 소박한(?) 이유가 있었다. 1) 42세 유색인 여성이 복수와 구출이란 사명을 띠고 모험을 떠나는데, 혹하지 않을 수가? 2) 작가가 영향을 받았다는 다른 작가(어슐러 르 귄, 옥타비아 버틀러, 스티븐 킹, 요시나가 후미 등)의 면면. 왠지 독서 취향이 비슷한 작가라면 더욱 내 취향에 맞는 작품을 써주지 않을까 싶어졌다. 3) 고양이 집사인 것도 호감이지만, 키우는 고양이 이름이 ‘오지만디어스 왕’이란 데서 느껴지는 어떤 비범함.(지금은 ‘맥파이’란 비교적 무난한 이름의 둘째 고양이도 있다.) 이런 이유로 관심을 갖고 검토하던 와중에 후속작이 또다시 덜컥 휴고 상을 수상했고, 시리즈를 계약하고 나니 다음 해에는 마지막 작품까지 수상에 성공했다. 기쁘기야 물론 기뻤지만, 그 이후 번역자와 디자이너와 함께 느낀 부담감을 떠올리자니 갑자기 다시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다.

 

그런데 SF상을 수상한 작품이라면서 왜 작품 소개에서 판타지란 단어는 이렇게 많이 나오는 것일까? 외국에서도 장르의 분류에 관해 의문을 던지는 이들이 제법 많은 모양인지 작가가 본인의 소셜 미디어에 다음과 같은 유머러스한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부서진 대지’ 시리즈는 판타지인가요, SF인가요?”


나: (하품을 한다.)

 

“좀 알려줘 봐요.”
나: (기지개를 한다.)

 

“중요한 문제라니까요!”


나: ……음, 판타지를 축으로 한 이야기인데.

 

“아이고, 휴, 드디어 분야가……


나: 그렇지만 실제 사회과학, 지구과학, 물리학을 적용했지요……

 

“체에에에엣.”

 

이런 장르를 일컫는 ‘사이언스 판타지’라는 용어도 있긴 하지만, 특별히 계보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면 작가의 말대로 특별히 분류에 구애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어쨌든 번역 원고를 처음으로 쭉 읽어 봤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장르소설에 익숙하든 익숙하지 않든 이 책은 어느 독자에게나 새롭게 느껴질 작품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여기 ‘고요’가 있다. 평온하고 화창한 날에도 결코 고요하지 않은 땅.”

 

작중 무대가 되는 ‘고요 대륙’에는 짧게는 반년, 길게는 수 세대가 지나도록 지진 활동과 환경 변화가 일어나는 재해의 시기가 있다. 그리고 산맥을 생성하는 지각변동인 조산운동(orogeny)에서 유래한 ‘마술’과, 이 능력을 지닌 채 태어나는 종족 ‘오로진(orogene)’이 존재한다. 평소 지질학과 지구물리학에 관심이 깊었던 작가는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해 관련 학자를 인터뷰하고 직접 하와이로 화산 답사를 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만큼 탄탄하고 매력적인 설정들이 무척 인상적인데, 지구과학에 젬병이었던 입장에서 보장하지만 관련 학문을 전혀 몰라도 작품을 즐기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다.

 

『다섯 번째 계절』 은 세상의 종말과 함께 한 개인, 남편의 손에 아들을 잃고 오로진이라는 정체가 발각된 여성 에쑨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강력한 힘 때문에 오히려 사회에서 멸시당하고 억압을 받는 오로진에 관한 묘사는 충격적이고 참혹하다.(‘엑스맨’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강도는 그보다 몇 배는 된다고 할까?) 읽다가 감정적으로 힘들어서 잠시 멈추고도 싶은적도 수차례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너무 재미있고 다음 내용이 보고 싶어 심란하기도 했다. 비극으로 시작된 에쑨의 여정은 다른 두 오로진 여성인 다마야와 시에나이트의 이야기와 번갈아 진행되면서 점차 한 운명으로 직조되어 가는데, 몇 번이고 읽은 지금 떠올려 봐도 그 과정은 놀랍도록 근사하고 가슴 아프다. 극적인 긴장감과 감정선이 최고조에 이르는 22장에 이어 마지막 23장을 거치면 지독한 ‘다음 권 앓이’에 시달리게 될 사람이 왠지 나만은 아닐 것이란 확신이 든다. 2권의 원고가 빠르게 들어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려 본다.


 

 

다섯 번째 계절N. K. 제미신 저/박슬라 역 | 황금가지
가혹한 운명에 따라 모험을 떠나게 되는 세 인물의 관계가 차츰 밝혀질수록, 억겁의 세월 동안 오로진이 차별과 멸시를 당하게 된 근원과 대륙에 닥친 계절의 비밀 역시 실체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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