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돈도 벌어야 했고, 대학도 가고 싶었다. 2003~2004년 당시 하루 두세 시간씩 밖에 자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내가 챙겨보던 예능프로그램이 <느낌표> 속의 코너 ‘책을 읽읍시다’였다. 물려받은 문화 자본은 전무하다시피 했지만 지적 허영심만큼은 어마어마했던 가난한 집 맏딸이었던 나는 그 프로그램에 소개된 책을 허겁지겁 따라 읽어 나갔다. 머리가 굵은 지금이야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책이 소개된다고 무작정 따라 읽지 않지만, 그때는 ‘좋은 책’의 기준이 너무나 절실했다. 아무튼 베스트셀러가 꼭 양서가 아니라는 느낌만큼은 있었으니까.
<느낌표>에서는 매달 ‘이 달의 책’을 선정했다. MC들은 본격적으로 어떤 책을 소개하기 직전, 길거리에서 시민들에게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라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러니까 『B급 좌파』 라는 책 이름이 방송된 시간은 채 2~3초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내게는 그 말을 한, 단발머리에 붉은 립을 칠한 언니가 내가 너무 닮고 싶은 지성인의 얼굴이었던 게 치명적이었다.
그렇게 불시에 ‘영업’ 당한 칼럼집 『B급 좌파』 를 읽고 난 후 더 이상 세상은 어제 같지 않았다. 나도 “여느 사람들이 이문열이나 김진명을 독서라 여길 때 지식인들은 구태여 촘스키나 부르디외니 하는 사람들을 읽”는(122쪽) 지식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언급된 두 저자를 내 책꽂이에서 장사 낸 것도 덕분(?)이었다. 그러나 지식인 코스프레는 너무나 어려웠고, 부르디외의 책은 지금껏 책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다.
『B급 좌파』 를 다 읽은 나는 정말 빨갱이가 되고 싶었다. 빨갱이가 멋있어 보였고, 세상의 많은 사건과 불의에 ‘연루’되고 싶었다. 2005년 대학 신입생에게 ‘워너비 운동권’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이상한지도, 그때는 몰랐다. ‘인 서울’ 턱걸이에 위치한 모교(사실 본교는 경기도에 있으니, 인 서울에 넣기에 다소 민망하지 않나 싶지만 우리는 그냥 우겼다)에서 목격한 학생운동은 입학한 해 3월 초 등록금 투쟁이 거의 전부였다. 그 투쟁의 ‘단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 따위에게까지 떨어졌는데, 13만 원쯤 돌려받아 흥청흥청 술을 먹을 수 있었던, 좋은 시절이었다. 모교 운동권의 부박함을 안타까워하는 나에게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서 만난 K대 출신 어른은 “명문대에 가야 한다, 지금이라도 편입하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지금 식으로 그이의 속내를 풀어보자면 “네가 더 노오오오오오력 했어야” 정도 아닐까. 그 말에 체한 밤에는 술을 많이 마셨다. 이른바 ‘명문대’ 출신들이 학벌 없는 사회 어쩌고 떠드는 거 너무 웃기지 않냐고, 진짜 설득력 없는데 또 그런 사람들이 떠들어야 그런 이야기가 그나마 사회에서 먹히는 게 현실이라 슬프다고. 정작 내가 붙들고 하소연을 한 친구도 정확히 그런 이유로 편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친구의 실패 덕분에 우리는 지금도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의 위치를 내주고 있다.
앎과 실천은 그즈음 나를 온통 사로잡은 두 단어였다. “아마도 교양이란 ‘사회적 분별력’일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 뜻과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반드시 자기 힘으로가 아니어도), 그게 교양이다. 그걸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이다. 교양은 근대적인 사회에 주어지는 축복이면서 더욱 근대적인 사회를 지향한다. 말하자면 교양은 그지없는 진보다(68쪽).” 엄마가 말하는 ‘불효’의 시작도 내 교양과 진보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되었을 테다. 나는 내 삶에도 교양을, 진보를 초대하고 싶었다.
『B급 좌파』 가 가장 크게 흔든 건 내 종교적 세계관이었다. 기독교 집안의 모태신앙으로 자란 나에게는 종종 떠올렸지만 해소되지 않는 질문이 있었다.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는데, 왜 엄마는 하필 기독교를 택했을까. 왜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종교를 가지게 됐는가. 다만, 그런 마음이 당장은 크게 불편하지 않았고, 교회 울타리 안의 사람들은 다정했으며, 그때의 나에게는 그 울타리가 필요했다.
서울에 올라와 몇 군데의 교회를 거쳐 엄마가 정착한 ‘세계에서 가장 교인이 많은’ 대형교회는 많은 사람만큼이나 잡음이 많은 교회였다. 그 잡음의 중심에는 거의 대부분 담임 목사와 그 가족이 있었다. 그의 비리가 만천하에 방송된 후에도 사람들은 담임 목사와 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사람들은 교회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고, ‘우리’의 고난을 서로 위로하느라 바빴다. ‘MBC 시청 거부’라는 문구가 적힌 스티커(이 교회에 대한 저격수 역할을
그러니 이런 문장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예수에 의지한다. (77쪽)” 교회라는 건물 밖에 ‘진짜 믿음’이 있다면, 교회에 매주 출석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면. 나 역시 ‘진짜’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서 교회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습관으로 믿음을 유지하고 싶지 않았고, 교회 안에서 만들어진 관계 때문에 믿는 ‘척’을 한다는 사실이 용납하기 힘들어졌다.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일보다 어렵다고 했지만, 교회는 물질 축복은 성실한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가르치지 않는가. 예수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언제나 세상에서 천대받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지만, 교회는 세상에서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지 않았는가. 예수는 세상으로 나가 세상을 섬기는 빛과 소금이 되라 했지만, 교회는 세상의 더러운 죄를 들어와서 씻어라 하지 않는가. 예수는 집도 절도 없이 동산과 벌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교회는 성전을 짓고 찬란하게 치장하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 가르치지 않는가(114~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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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옇기만 하던 나의 불만과 질문이 명확해졌다. 그렇다면 앎은 실천되어야 했다. 충동적이었지만 삶이 내게 준 충동 앞에 똑바로 서자고 마음먹었다. 함께 아동부 교사를 했던 동료 선생 중 한 명은 나를 만류하며 교회의 문제점을 깨달은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남아있어야 한다고 했다. 나의 선언이 용기가 아니라 도망이라고 했다. 도리어 그 말이 위안이 됐다. 그의 말처럼 여러 사람들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사실은 문제를 느끼고 있다면 다행 아닌가. 하지만 나는 그 거대하고 부조리한 조직 안에 남아서 견디고 바꿀 자신이 없었다.
그즈음 내 기도의 내용도 달라졌다. 나는 무릎 꿇고 손을 모으는 대신 똑바로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나님 계시긴 한 거냐고. 내 것만을 구하는 것이 믿음이냐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 위에서 아파하고 있는데 나만 하나님 안에서 즐겁고 기쁘면 되겠느냐고. “나는 제 새끼만 챙기는 내 부모보다 더 이기적인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게 됐다고(78쪽). “예수는 니 꺼 남 주는 게 사랑이다. 너도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라 그랬는데 교회는 믿으면 잘 살 수 있다, 남의 꺼 먹을 수 있다고 가르치니” 당신도 이 세상이 어처구니없지 않냐고, 때로는 비웃었다.
교회와의 단절은 예상보다 쉬웠지만 엄마와의 갈등은 쉽게 메꿔지지 않았다. 매 주일 반복됐다. 내가 조금만 아파도, 내게 조금의 무슨 일이 생겨도, 엄마는 그게 내가 교회에 가지 않기 때문에 받는 ‘벌’이라고 퍼부었다. 정확히 내가 교회를 벗어난 그 이유로, 엄마는 나를 비난했다. 지긋지긋한 기복신앙이었다. 나는 교회라는 껍데기를 버린 거지 신앙을 포기한 게 아니라는데도 엄마는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나도 엄마의 ‘무지’를 나무라며 함께 퍼부었다. 그땐 돌려줄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인 것 같았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성경 구절을 줄줄 외던 딸, 성가대에 서고,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던 딸의 난데없는 변심과 반항 앞에 엄마도 당황하지 않았을까. 교회와 교회 커뮤니티는 엄마에게 예나 지금이나 전부와 다름없었다. 그걸 부정하는 딸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 같지 않았을까. 나는 그런 엄마의 괴로움과 상실감을 못됐지만 조금은 즐겼다.
신앙이 엄마를 버티게 했다는 건 조금 뒤늦게 깨달았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할머니 덕분이었다. 2011년 최저생계비 취재를 위해 한 달간 서울 달동네에 들어가 살았을 때였다. 바로 옆방인 노부부의 집에서는 자주 나지막한 찬송가가 들려왔다. 얇디얇은 벽을 타고 무람없이 공유되는 소리야말로 가난의 맨 얼굴이었다. 여름의 끝이었고, 한 달 간의 취재가 끝나고 짐을 싸던 내게 할머니는 미숫가루 한 사발을 들고 왔다. “아가씨, 교회 다녀? 교회 다녔으면 좋겠다.” 대답 대신 나는 물었다. 엄마에게 묻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왜 교회에 다니세요?” 할머니가 지긋이 웃었다. “교회에서는 내가 평생 들어보지 못했던 예쁜 말만 해줘.” 맥이 풀렸다. 그 할머니도, 어쩌면 엄마도 교회가 아니었다면 삶의 비참을 견딜 수 없었겠구나. 나는 할머니에게 교회에 다니겠다는 약속 대신 “저도 예수를 믿어요.”라고 대답했다. 다만 나는 할머니도, 엄마도 아니었기 때문에 삶의 비참을 다르게 견디고 싶었을 뿐이다. 예수야말로, 그런 이성의 세계 안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적힌 김규항의 글은 여전히 통증이 있다. 지금도 유효한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은 세상이 그만큼 변하지 않았다는 증명 같기도 하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시쳇말로 ‘구리다’고 생각하는 교조적인 칼럼이 몇 있긴 하다. 『B급 좌파』 를 처음 읽은 시간으로부터 10년 가까이 흘렀다. 그 시간을 지나오며 나는 사람들의 욕망과 모순을 인정하는 순응주의자가 되었다. 한때 무척이나 굴욕적이라 생각했던 순응주의자라는 말은 내가 자주 걸치는 외투가 됐다. 어쩐지 지금은 빨갱이보다 그 말이 더 마음에 든다.
애먼 헤나시라는 평화운동가가 있다.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그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느냐”라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니요, 하지만 세상이 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애먼 헤나시의 저 대답은 스물 몇 살의 나에게 단 하나의 정답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내게 정답이 아니다. 아니, 무수한 정답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나는 예전처럼 함부로 확신하지 않는다. 여러 개의 진실과 사실 앞에서 차라리 무력한 자로 남기를 선택했다. 모든 사안에 늘 명확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때때로 부럽다. 이는 얼마간의 존중과 조금의 경멸이 포함된 평가다.
내가 통과한 세상에 하나의 입구를 만들어줬던 20대의 선생은 여전히 비슷한 이야기를 뻔한 패턴으로 반복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세상이 바뀌지 않아, 그도 그대로 고여 버린 걸까. 김규항을 바라보는 나는 언제나 마음이 복잡하다. 1962년생인 그도, 1983년생인 나도 그저 모든 부분의 압축을 경험하고 있는 ‘동시대인’이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이르렀을 때, 나는 내가 선생으로 여겼던 우상 하나를 깨뜨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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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좌파김규항 저 | 야간비행
'좌파적'인 일관성을 벗어나지 않는 그의 글들은 가끔은 혹독하다 싶기도 하다. 그런데 대체로 틀린 구석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고 가장 큰 장점, 너무나 잘 읽힌다.
장일호(시사IN 기자)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자주 ‘이상한 수치심’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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