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멈아 이 꽃은 냄새가 별로구나.
초등학교 5학년, 가을 운동회가 열릴 즈음 짱아와의 동거가 시작됐다. 어느덧 내 나이 27살이 되었고, 짱아도 견생 16년 차에 접어들었다. ‘키운다’는 개념이 무색해진 지는 오래. ‘우리 가족이 짱아를 돌본다’에서 ‘네 발로 걷는 룸메이트와 함께 생활한다’를 지나 ‘짱아 발아귀에 우리가 있다’의 단계에 다다랐달까.
짱아의 발아귀
이젠 그녀에게서 강한 인간의 기운이 느껴진다. 사람인 듯 사람 아닌 사람 같은 개와의 에피소드 몇 가지를 들려드리겠다.
# 인간의 표정을 짓는 개
짱아도 인형을 물고 아장아장 걸어와 놀아달라고 칭얼대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정반대의 상황. 내가 인형을 들고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 짱아에게 놀자고 보채는 날이 늘고 있다. 그럼 짱아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굉장히 인형이 갖고 싶은 개 역을 연기해 보인다. 신이 난 내가 인형을 빼앗겨주면(?) 짱아는 도망가는 시늉을 한다. 열심히 뒤를 쫓은 내게 돌아오는 건 그녀의 찌푸려진 미간뿐. 짱아의 미간은 내게 이렇게 속삭인다. “이제 됐냐.”
인형이 갖고 싶은 개를 연기 중이다.
# 효견, 네가 나보다 낫다
養志之孝 양지지효. 부모의 뜻을 받들어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효행. 나도 하지 못하고 있는 걸 짱아는 용변을 보는 중에도 해내고 있다면 믿으시겠는가.
개에게는 간식, 산책 등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짧은 단어의 수준을 넘어 ‘가서 쉬 하고 와’ ‘작은 언니 좀 깨워’ 등과 같은 고차원적인 문장을 이해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짱아도 어느 새부턴가 화장실에 다녀오라는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고, 가족 중 특히 엄마가 짱아의 이런 면을 높게 샀다. 여느 날과 같이 잠자리에 들기 전, 엄마가 기특해하는 눈빛을 쏘며 짱아에게 쉬를 권유했다. 그런데 짱아가 얼굴에 난감한 기색을 비치는 게 아닌가. 잠시 눈알을 굴리며 머뭇거리던 짱아는 이내 화장실에 주저앉아 오줌 누는 자세를 취했다. 혹 어디 아픈가 싶어 짱아를 살펴보러 다가갔는데... 거기서 나는 보고 말았다. 그녀가 앉았다 일어난 배변 패드에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은 것을.
개의 방광 사정이 어찌 매일 한결같겠는가. 자기 전에 방광이 텅 비어있는 날도 있을 테다. 그러나 효견 짱아는 방광 사정과 무관하게 부모의 뜻을 받들기로 한 것이다. 자신이 오줌을 누지 않아 혹여 어머니가 실망하실까 염려하는 갸륵한 마음! 오줌 누는 시늉이라도 함으로써 부모의 근심을 덜어드리려는 지극한 효행! 이러니 엄마 입에서 “으이그 짱아 반만 닮아라.”라는 소리가 나오지.
짱아의 잃어버린 동생을 찾았다.
# 이 집에서 나가려거든 날 밟고 가라
짱아는 누군가 외출하려는 낌새를 엄청 빠르게 알아차린다. 가령 아빠, 엄마, 나, 짱아 이렇게 네 사람이 집에 있다고 해보자. 짱아가 아빠 곁에서 놀고 있었는데, 아빠가 나갈 채비를 한다? 짱아는 아빠를 버리고 엄마에게로 간다. 짱아를 쓰다듬던 엄마가 머리를 감는다? 짱아는 엄마를 버리고 내게로 온다. 함께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던 내가 옷을 갈아입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종전의 상황과 달리 선택할 수 있는 남은 사람이 없다. 그럼 짱아는 ‘날 밟고 가라’ 작전을 시행한다.
수업에 늦어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기려던 찰나. 아래와 같은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내가 백팩을 메려던 건 어떻게 알고 딱 그 가방을 깔고 앉다니! “이 집에서 나가려거든 날 밟고 가라”며 뒤통수로 시위하는 그녀에게 홀린 나는, 결국 수업을 째고 말았다.
너의 외출을 불허한다.
# 도봉구의 판사견
부모와 자식은 살면서 소소하거나 격렬한 의견 충돌을 겪기 마련이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다. 엄마와 내가 다툴 때면 짱아는 골몰하는 자세로 소파에 앉아 우리 둘을 지켜보곤 한다. 휴전이든 파국이든 일단 싸움이 종결되어 각자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판사견 짱아의 심판이 시작된다. 짱아가 엄마 옆에 웅크리고 앉아 엄마를 위로한다면, 그날은 내가 잘못한 것이다. (거의 드물지만) 짱아가 내 무릎에 앉아 나를 위로한다면, 엄마가 심했던 날이다. 그렇게 생긴 우리 가족의 규칙 : 짱아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이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 것.
나는 짱아가 부럽다. 밥을 게걸스럽게 먹어도 귀엽고, 잠버릇이 고약해도 귀엽고, 심지어 똥을 싸도 귀여우니 말이다. 짱아 나이 열여섯. 사람으로 치면 여든이 넘었다. 아마 짱아는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사랑스러운 할머니가 아닐까? 이렇게 ‘인간미’ 넘치는 어르신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으리!
아 참, 이 원고는 마감 전에 짱아에게 첨삭을 받았다.
짱아의 치명적인 옆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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