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는 흔히 학교라는 수레바퀴 아래에 깔려버린 소년의 이야기로 읽힌다. 하지만 꼭 어린 소년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상의 수레바퀴는 소년, 어른 할 것 없이 우리의 꿈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스를 지켜보면서 내가 안타까웠던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현실이었다. 자연 속을 거닐며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면서 행복을 느꼈던 한스였지만 현실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다. 학교 공부도, 아버지 곁도, 대장간 일도, 모두 자기 것이 아니었다. 가장 꿈이 많을 그 나이에 하고 싶은 일조차 찾지 못했던 한스는 불행한 아이였다.
이런 얘기를 하면 “내가 한스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법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보면 청소년 시절에 갖게 되는 희망이라는 것이, 자기 내면의 선택에서 나오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대개는 어른들의 바람이 그대로 아이들의 희망이 되는 경우가 많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 서론』에서 이를 ‘부모의 나르시시즘’이라고 표현했다. 사내아이는 자기 아버지를 대신하여 위대한 사람이 되고 영웅이 되어야 하며, 계집아이는 어머니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뒤늦은 보상으로 잘생긴 왕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유치한 속성을 지닌 부모의 사랑이란, 결국 부모의 나르시시즘을 자식이라는 대상에게 그대로 내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부모들은 자신이 포기했던 나르시시즘을 부활시켜 자식을 통해 이루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의 욕망은 불행하게도 자신이 아닌, 타자로서 부모의 욕망일 뿐이다.
바로 오늘 우리의 이야기다. 부모들은 자신이 못 다 이룬 꿈을 자식을 통해 실현하려 한다. 어느 사이 아이들은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어주는 존재가 되고 만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살고자 한다면
그러다 보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꿈이 무엇인가 찾지도 못한 채 흘러가기도 하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도전해보지 못하는 삶을 살곤 한다. 그것은 불행한 삶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살면서 누릴 수 있는 큰 행복 가운데 하나다.
나에게도 그 자유로운 삶의 행복을 내 손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결단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방송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방송이 다 끊길 때까지, 방송이란 방송은 정말 원 없이 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시사방송은 정치적 환경 변화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2007년 대통령 선거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정권에 비판적인 이야기를 할 소지가 있는 사람들은 방송에서 전부 배제되었다. 방송인으로서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정부가 들어섰고, 방송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시간이 5년 더 연장되었다. 그때 생각했다. 이렇게 10년의 세월을 보낼 것인가. 언제까지 외부 환경에 휘둘리는 삶을 살 것인가. 내 삶의 주인은 나인데, 어째서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내 삶을 결정짓는단 말인가. 나는 그 부조리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내가 원하던 삶이 아니었다. 책을 들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방송 활동을 자유롭게 하기 어렵다면, 시대를 무기력하게 쳐다보며 허비할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힘을 키우기 위한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속에서 내가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외부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삶의 길을 열어가는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늦깎이 인문학 공부였다. 남아 있는 생의 시간을 따져보면서, 진즉에 시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 때가 있다. 돌고 돌아 이제 진짜 나의 것을 찾은 느낌이다.
그동안 자유인으로서의 삶은 누렸지만, 그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나는 혼자 일한다. 혼자서 방송하고 글 쓰고 강의하는 프리랜서였다. 믿을 것은 나 자신밖에 없기에 항상 긴장하며 일하고 준비해야 했으며, 남들이 잠들어 있는 시간에 깨어 움직여야 했다. 공짜로 얻어지는 자유는 없고, 고생 없이 이루어지는 꿈은 없다. 그 대가를 지불할 의지가 있는 사람만이 자유인의 삶을 얻을 수 있다.
물론 그러다 보면 생계와 일의 긴장관계가 만들어진다. 앞날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무척 신경이 쓰이고 스트레스를 받는 과정이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이라면 그런 것조차 건강한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하다. 세상과 삶에 대해 말하고 글을 쓰면서 ‘생활’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마치 발을 땅에 딛지 않은 채 삶의 공론(空論)을 일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괴테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천상의 높은 힘을 알지 못한다”라고 했듯이,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고민을 해본 사람만이 삶의 고귀함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단 한 번밖에 살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의 결단에 따라서는 여러 번의 삶을 살 수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삶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새로운 삶을 위한 결단을 내린다면 우리는 또 한 번의 삶을 살 수 있다. 나는 지금 그렇게 또 한 번 살고 있다. 아직 꿈이 있다. 그것이 욕망의 꿈이 아닌, 열매처럼 익어가고 싶은 꿈이기에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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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유창선 저 | 사우
환자들은 단순히 인문학 고전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자신의 내면 풍경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오늘 이곳에서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밀도 있게 보여준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