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리버풀. 누군가에게는 전설의 록그룹 비틀즈의 도시로, 누군가에게는 프리미어리그 리버풀FC의 레즈(Reds)로 기억되는 도시. 지휘자 사이먼 래틀은 1955년 1월 19일 영국 리버풀에서 태어난다. 재즈밴드 연주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타악기를 배웠고 타악기 신동이라고 불렸다. 15세에 리버풀 관현악단의 타악기 주자가 되었으며, 19세이던 1974년에는 존 플레이어 국제지휘콩쿠르에 최연소 연주자로 참가하여 우승하였다. 1980년 25세의 나이로 런던 외곽의 무명 시골 악단인 버밍엄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취임하여 1998년까지 이 심포니를 세계적인 교향악단으로 성장시켰다. 그는 60여 명의 단원을 정리하면서 악단을 재정비하였고, 명연 명음반으로 주목받았다.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1987년 영국 왕실로부터 대영제국훈장(Order of the British Empire)을 받았다.
2002년,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손꼽히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3년간 그들의 상임지휘자로 있던 거장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후임 지휘자를 선정하기 위해 단원 투표를 실시했다. 투표 결과 단원들의 43%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사이먼 래틀을 새로운 베를린필의 제10대 수장으로 선출하게 되었다. 처음 베를린필 포디움에 선 래틀은 “리허설이 시작되고 15분쯤, 엄청난 즐거움을 깨닫게 됐다. 지휘에 따라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연주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다른 오케스트라에서 못 본 새로운 소리를 발견했다. 크고 깊은 소리였고 최저음의 베이스부터 가장 높은 목관악기까지 모든 섹션이 들렸다”고 말했다. 그는 베를린필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이후 그간 베를린필에서 잘 다루지 않던 현대음악을 주요 레퍼토리 라인업에 추가하면서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베를린필에 현대적인 감각을 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말러와 브루크너의 교향곡 해석에 있어서 권위를 보유하게 된다.
래틀은 현대음악에 특히 능하다. 언급한 바와 같이 래틀이 상임지휘자를 맡은 이후 베를린필에서 현대음악 래퍼토리가 상당히 늘었다. ‘Late Night at Philharmonie’처럼 현대음악으로만 꽉 채운 연주회도 인기가 많다. 그러나 다른 지휘자들이 잘 다루지 않는 현대음악을 다룬다는 사실만으로 래틀의 역량을 최고로 평가하는 것에는 무리수가 있다. 취임 초기에는 현대음악을 많이 다루는 래틀의 성향에 대해 베를린 청중이 반발하기도 하였고 언론도 이를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래틀은 이러한 여론을 수렴하여 현대음악의 비중을 줄이고 독일 고전주의 및 낭만주의 레퍼토리를 확대하며 본인 스스로 이러한 레퍼토리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브루크너 교향곡 해석은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주류 레퍼토리인 독일 낭만주의 음악 해석에는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편이다. 과거의 명연에 비하면 아쉽다는 평을 받는 것이 대부분이고, 고전주의 이전의 레퍼토리에 있어서 평범하다거나, 해석에 있어서 강점이입이 과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당초에는 2012년까지가 계약기간이었으나 베를린필은 이를 2018년까지로 연장했다. 단원들이나 관객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고, 래틀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영상화사업 ‘디지털 콘서트홀’이 말 그대로 ‘대박’을 거두면서 베를린필의 재정 상태를 크게 개선시켰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현대 음악을 연주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키즈 콘서트 같은 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는 강한 전통의 오케스트라를 변화로 이끄는 과정에 대해 “항상 까다로운 일이다. 하지만 주제에 따라 단원들의 반응이 달랐다. 우선 교육 프로그램은 내가 취임하기 전부터 단원들과 협의 했던 일이다.
현대 음악도 100년 넘은 보수적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젊은 작곡가의 곡을 연주하는 데에 거부감이 있었지만 곧 익숙해졌다”고 말하며 “문제는 디지털 콘서트홀이었다. 예산이 많이 필요한 사업이고, 단원들로서는 인생이 피곤해진다. 매주 자신의 연주가 녹음, 녹화되고 전세계로 배포된다고 생각해보라. 게다가 돈도 더 안주면서 말이다. 만약 내가 이 아이디어를 제시했으면 단원들이 ‘미쳤다’고 했을 거다. 다행히 아이디어는 오케스트라 사무국에서 나왔다(<중앙일보> 인용)”고 전했다. 래틀은 이어 디지털 콘서트홀에 대해 “한 장의 사진이 상징적이다. 미국 미네소타의 인디언 거주구역에 한쪽벽에 디지털 콘서트홀의 한 장면을 띄워놓고 보고 있는 사진이다.
‘우리는 누가 우리 연주를 보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극명히 말해준다. 돈을 벌기 위한 사업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게 된 한 장의 사진이었다. 이런 피드백이 늘어나면서 음악이 사람들의 삶 어디에나 있어야 한다는 것에 단원들도 동의하고 자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그는 베를린필의 재단법인화도 한몫을 했다. 여러 모로 금전적으로 베를린필을 발전시킨 지휘자라고 할 수 있다. 래틀은 워낙 비즈니스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사실 이러한 경영가로서의 면모가 베를린필의 상임지휘자로 선임되는 것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많다. 카라얀이 음악이라는 콘텐츠와 신기술에 의한 매체, 그리고 자신의 타고난 외모와 이미지를 잘 활용해 비즈니스맨으로 성공을 거두었다면, 래틀은 조직 전략을 기획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며 조직을 관리하고 바이어들과 협상하는 능력이 뛰어나 말 그대로 탁월한 비즈니스 재능이 있다.
래틀은 베를린필이 국가 보조금을 받는 상황에서 벗어나 재단으로 독립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래틀은 훗날 베를린필의 21세기 경영 모델을 체계화한 인물로 이름이 남을 것이다. 2017년 9월부터 음악감독을 맡게 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는 2015년을 기점으로 왕성한 무대를 갖고 있다. 래틀은 ‘상임 지휘자(Chief Conductor)’라는 명칭을 ‘음악 감독(Music Director)’으로 바꾸고 그 자리로 갔다.
사이먼 래틀이 베를린필의 예술감독으로서 함께하는 마지막 내한으로, 2017년 한 해 동안 가장 큰 관심을 받아온 이번 내한 공연은 협연자로 피아니스트 랑랑이 예정되어 있었다. 랑랑은 왼팔 건막염 증상으로 연주를 취소하였고, 베를린 필하모닉과 사이먼 래틀은 대체 프로그램으로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이 제안한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협연무대를 독일과 홍콩, 한국에서 선보이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조성진은 이번 한국 공연에 앞서 11월 4일 베를린 필하모니홀에서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공식 데뷔무대를 갖고, 이어 프랑크푸르트, 홍콩에서 협연을 펼친 뒤 한국무대에 오르게 된다.
<금호월드오케스트라시리즈> 2017 사이먼 래틀&베를린 필하모닉 내한공연은 11월 19일과 20일 두 차례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펼쳐진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지난 1984년 카라얀과 첫 내한공연을 가진 이후 2005, 2008, 2011, 2013년 한국공연을 펼쳐왔다. 이번이 6번째 내한공연이다. 최장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1954년부터 1989년까지 무려 34년 동안 상임 수석지휘자였고 그후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2002년까지 지휘를 맡다가 사이먼 래틀에게 지휘봉을 넘겨주었다. 래틀은 “저는 세계 최고의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베를린필 단원들의 연주를 들을 수 있으니까요”라고 밝힌바 있다. 이번 연주에서 진은숙의 곡을 위촉해 초연하는 베를린필과 래틀은 “우리의 목표는 바흐의 작품이 바로 어제 작곡한 것처럼 들리고, 현대작곡가인 진은숙과 불레즈의 곡이 수세기 전에 작곡한 것처럼 들리게 하는 것이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베를린필과의 지난 16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본향인 런던에서의 새 여정을 시작한 사이먼 래틀, 그 특유의 환한 미소처럼 그 음악의 마지막 마디가 들려온다. 3음을 살짝 올려 희망의 빛으로 인도하는 ‘피카르디 서드’처럼.
음악저널 편집부
음악 전문 잡지이다. 대중음악 보다는 주로 클래식 쪽으로 집중하고 있다. 국내외 교향음악단의 내용은 물론 해외 소식과 해외에서 활약하는 음악인에 대한 내용도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