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와 황제병
새벽의 통증을 떠올리면 당장은 술병을 쳐다보기도 싫었지만 평생을 멀리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명진 씨는 또다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글ㆍ사진 오승원(서울대병원 강남센터 가정의학과 교수)
2017.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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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 unsplash

 

“하나! 둘! 셋!”

 

우렁찬 구령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복 입은 아이들이 구령에 맞춰 제법 매섭게 주먹을 뻗었다. 아이들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했다. 공기엔 시큼한 땀냄새가 배어 있었다. 임명진 씨는 관장실 의자에 엉거주춤 앉아 도장 안을 바라보았다. 일요일이었지만 대회에 출전할 아이들의 특별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여느 때라면 직접 구령을 붙이며 아이들의 품새를 바로잡아주고 있었겠지만 오늘 명진 씨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게 다 그 멀대 같은 검도 때문이다.’

 

통증이 다시 심해지는 것 같아 명진 씨는 얼굴을 찌푸렸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은 아직 퉁퉁 부어 있었다. 오후에 진통제를 두 번이나 먹었지만 나아지는 건 잠시뿐이었다. 그래도 오늘 새벽을 생각하면 지금 상태는 양반이었다. 잠에서 막 깨었을 때는 자는 동안 누군가 프레스나 망치 같은 걸로 발가락을 짓뭉개 뜯어낸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픔이 극심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눈을 뜨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발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발가락은 제자리에 있었지만 빨갛게 부어오른 상태였다. 일어나서 걸어보려 했지만 발을 딛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119를 부른 건 난생 처음이었다. 기다리는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발가락이 붙어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아플 수 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구급차가 조금 더 늦게 도착했다면 구급대원을 붙잡고 엉엉 울었을지도 모른다. 응급실의 의사는 잠에서 덜 깬 듯한 얼굴로 발가락을 보더니 한마디 툭 던졌다. 통풍이군요. 하지만 명진 씨에게 원인이 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발가락을 잘근잘근 씹히는 것 같은 통증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진통제를 맞고 아픔이 가라앉으면서 작년에 건강검진을 했을 때 통풍이 생길 수 있다고 들었던 게 생각났다. 혈액 속에 있는 요산이란 성분이 높아져서 관절에 쌓이는 병이라고 했다. 요산이 높다고 해도 대개 증상은 없지만 일단 통풍이 생기면 통증이 심하다고도 했다. 그때는 의사가 겁주기 위해 과장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겪어보니 그저 심한 정도가 아니었다. 경험할 수는 없겠지만 애를 낳을 때 진통이 이만할까. 의사는 언젠가 찾아올 수 있는 통증에 대해 훨씬 더 심각하게 경고해주었어야 했다. 명진 씨는 좀 더 강조해 설명해주지 않았던 의사를 다시 찾아가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통풍 발작은 보통 과음한 다음에 생깁니다. 당분간 술을 끊으셔야 해요.”

 

응급실 의사가 여전히 잠이 덜 깬 듯한 표정으로 무심히 말했다. 그러니까 멀대 같은 검도관장이 아니었으면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실 일도 없었을 것이고, 과음을 하지 않았다면 밤중에 빌어먹을 통증 땜에 깨지도 않았을 테니, 지금 응급실에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건 전적으로 그 인간 때문인 것이다.

 

명진 씨가 화니프라자 5층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한 것은 3년째다. 사범으로서 나름 오랜 경력을 쌓았지만 막상 관장 입장이 되니 사범을 고용하는 것부터 차량 운행과 같은 사소한 일들까지 신경써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아이들의 부모를 대하는 것이었다. 태권도장을 다니는 것은 아이들이지만 실제 고객은 부모라 할 수 있다. 부모의 마음을 잡기 위한 적절한 영업은 필수였지만 명진 씨는 마음에 없는 말은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처음엔 가정통신문을 만들거나 문자를 보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도장을 인수하고 처음 1년 간은 원생이 늘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아이들의 실력 향상에 집중하면서 예의를 강조하는 교육 방침이 입소문을 타면서 숫자가 조금씩 늘어 지금은 백 명 남짓한 아이들이 도장을 다니고 있다. 아직 대출금이 남아 있었지만 대출 이자와 도장 운영비를 제외하고 저축도 할 수 있는 정도의 벌이가 되었다. 이대로라면 몇 년 내에 대출금도 갚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불과 삼 개월 전 같은 층에 검도장이 생기기 전까지는.

 

명진 씨에게 태권도와 검도는 예수와 마호메트만큼이나 동떨어진 존재였지만 아이와 부모들에겐 둘 다 체력 단련을 위한 운동일 뿐이었다. 맞벌이 부모들에겐 방과 후에 아이들을 맡아주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부모들이 같은 건물에 있는 태권도장과 검도장 중 어떤 곳을 선택할까. 태권도장에 다니는 아이를 검도장으로 옮겨볼까 저울질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삼 개월 동안 원생이 열 명이나 줄었다. 며칠 전엔 검도복을 입은 낯익은 아이를 복도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태권도장을 다니던 아이가 명진 씨의 눈길을 피해 복도 반대편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이런 상황에서 받은 상가 번영회 모임 소식이 반가울 리 없었다. 화니프라자 번영회에서는 두 달에 한 번씩 회의를 했다. 말이 회의지 실제론 친목 도모를 위한 회식 자리다. 게다가 이번 모임에선 새로 오픈한 검도관장 환영회를 한다고 했다. 이번엔 빠질까 생각했던 명진 씨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적을 알아야 전략도 세울 수 있는 법이다.

 

“검도장 최 관장님은 운동하는 사람 같지 않게 어째 얼굴이 해사하시오.”

 

번영회 회장인 일 층 대신부동산 홍영자 씨가 살가운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이곳에 입점한 상가는 대부분 이 부동산을 거쳤기에 영자 씨는 모든 상가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상가별 매출 정보부터 어느 집 직원이 그만두었다는 사소한 일까지 이 건물에서 누구보다 빨리 소식을 듣는 것이 그녀였다. 일단 영자 씨의 귀에 들어간 소식을 상가의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검도관장은 185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다. 흰 피부에 남자가 봐도 잘생긴 얼굴이라 초등학생 엄마들에게도 호감을 줄 만한 외모였다. 그것은 앞으로도 그가 태권도장의 매출에 걸림돌이 될 여지가 많다는 의미였다. 명진 씨는 그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근데 태권도랑 검도 중에 뭐가 더 센가요?”

 

술잔이 몇 순배 돌고 불판에 돼지 목살이 먹기 좋게 익어갈 때쯤 2층 편의점 사장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밤새 편의점을 지키는 탓에 그의 얼굴은 늘 다크서클을 달고 있었는데, 오늘은 아내에게 가게를 맡기고 왔다고 했다.

 

“맨 손으로 싸우면 태권도, 손에 쥘 수 있는 게 있다면 검도가 아닐까요?”

 

4층에 있는 최강수학학원 원장이 신중하게 대답하자 몇 사람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쌈박질하려고 운동하는가? 정신 수양이 중요하지. 정신 하면 검도 아니겠어? ‘길 도(道)’ 자를 쓰잖아. 검술이 정신 수양을 도모하는 과정이란 뜻이지. 그렇지, 최관장?”

 

혀를 차며 대화에 끼어든 것은 3층 한돌기원 원장이었다. 검도관장은 말 없이 빙긋이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태권도의 도 자는 그럼 ‘섬 도(島)’ 자라도 된다는 건가. 명진 씨는 부아가 치밀어 술잔을 들이켰다.

 

“그나저나 우리 임 관장님은 오늘 술이 잘 받으시나. 시원시원하게 들이키시네.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상가에서 주량은 검도보다 태권도가 더 센 게 확실해.”

 

영자 씨가 너스레를 떨자 모두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명진 씨는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연거푸 술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같은 건물에 있었지만 반딧불 의원을 직접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조무사 김희정 씨가 일그러진 그의 얼굴과 걸음걸이를 보고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아이들 가르치다 부딪히셨어요?”


“아뇨. 그게 아니고, 어젯밤에 응급실에 갔었는데 통풍이라고 하더라구요. 아직도 통증이 심해서….”

 

명진 씨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김희정 씨도 어제 회식 자리에 함께 있었으므로 그가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셨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술을 마시지 않으므로 분위기를 더 잘 느꼈을 것이다. 번영회 모임에서도 늘 다른 사람들을 먼저 살피고 배려하는 그녀다. 어쩌면 그가 새로 온 검도관장을 불편해하는 것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명진 씨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예전엔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만 걸리는 병이었죠. 그래서 황제병이라고 불러요.”

 

절뚝거리며 진료실에 들어온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나서 이수현 씨가 말했다. 명진 씨는 무슨 뜻인지 얼른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통풍 말이에요. 술과 고기에 요산을 높이는 성분이 많거든요. 비만한 사람이 많이 걸리기도 하구요. 체중 문제는 관장님에게 해당되는 건 아니지만, 요산이 높은데 어제처럼 고기 안주에 과음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2차로 곱창집에 가셨다면서요? 내장에도 같은 성분이 많아요. 어제 같은 경우는 통풍 발작을 부르는 음식의 교과서적인 조합이라 할 수 있죠.”

 

평소의 그라면 의사의 가르치는 듯한 말투가 못마땅해, 당신은 고기나 곱창 안 먹느냐고 볼멘 대꾸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욱신거리는 통증만 빨리 나아질 수 있다면 고까운 훈계쯤은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열감이 많네요. 통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발을 되도록 움직이지 않는 게 좋습니다. 얼음찜질도 도움이 될 거에요. 염증을 가라앉히는 약을 처방해드릴 테니 드시고 닷새 뒤에 다시 오세요.”

 

머뭇거리던 명진 씨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제가 맥주를 좋아하는데 맥주가 요산을 높인다고 해서 그동안 줄창 소주만 마셨거든요. 그런데도 이런 일이 생겨서 당황스럽네요. 맥주를 안 마셔도 통풍이 올 수 있나요?”

 

수현 씨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맥주가 요산을 더 높이는 건 맞지만 다른 술도 다 마찬가지에요. 요산 수치가 낮아질 때까지 술은 끊어야 합니다. 소주, 양주, 와인, 막걸리, 뭐든 다요. 술 대신 물을 많이 드세요. 한 번 더 통풍 발작이 생기면 요산 낮추는 약을 평소에도 계속 드셔야 할 겁니다.”

 

명진 씨는 풀이 죽어 진료실을 나왔다. 새벽의 통증을 떠올리면 당장은 술병을 쳐다보기도 싫었지만 평생을 멀리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명진 씨는 또다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통풍(痛風, gout)은 요산이 체내에 과하게 축적되어 생기는 병이다. 아플 통, 바람 풍. 바람만 불어도 아픈 병이라는 의미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통증이 극심해서 요로결석, 치수염과 함께 의학계의 3대 급성 통증의 하나로 꼽힌다. 요산이 과하게 만들어지거나 요산의 배출이 안되어 몸에 쌓이면 결정 형태로 침착이 되고, 보통 발가락이나 발목 등의 관절에 염증을 일으켜 발작이 진행된다.

 

요산이 높아지더라도 통풍 발작이 바로 생기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 증상이 없는 고요산혈증 상태가 수 년간 지속된다. 이 시기에 원인을 관리하지 않으면 시간이 갈수록 실제 증상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진다. 유전 이외에 대표적인 원인은 비만이며, 요산을 만드는 물질인 퓨린(purine)이 많이 들어 있는 음식, 그중에서도 고단백 식품인 육류가 피해야 할 음식으로 꼽힌다. 등 푸른 생선이나 오징어, 새우 등의 해산물도 퓨린이 많이 들었지만, 이들은 건강에 이로운 측면도 많으므로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무엇보다 제한해야 할 것은 술이다. 퓨린 함량이 가장 높은 술은 맥주이지만 다른 술도 요산의 배출을 감소시켜 통풍 위험을 높일 수 있으므로 모든 술은 금기다. 통풍 발작의 위험은 알코올의 양에 비례해 높아진다.

 

일단 통풍 발작이 생기면 재발이 흔하다. 반복되면 관절이 망가지게 되므로 애초에 통풍의 원인을 다스려 증상이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최근 연구들에 따르면, 식이 조절을 통해 낮출 수 있는 요산 수치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통풍이 재발하면 관절 손상을 막기 위해 요산을 낮추는 약을 복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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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Gillray, The Gout, 1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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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통증 #통풍 #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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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차

2017.08.31

오, 소설로 보는 질병! 재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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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원(서울대병원 강남센터 가정의학과 교수)

가정의학과 의사입니다. 만성 질환 예방과 건강 증진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환자를 만나고 그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에세이 <반딧불 의원>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