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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에게 미안하다

스페인, 마요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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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시간’이 많은 사람이 가장 부러운 시대이다. 한 달 살기는 ‘시간 부자’ 즉 현대에서 가장 비싼 가치를 들여야지만 할 수 있는 여행법이자 그 나라의 그 도시를 즐길 수 있는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 (2017.08.22)

 

남녀, 여행사정 29-01@마요르카.jpg

당신처럼 내 맘이 편해졌으면 좋겠어요.

 

휴양지에선 다 필요 없다

 

여행을 원 없이 해 온 내게도 지중해 섬을 향한 로망이 있다. 모 이온 음료 광고 마냥 옷을 후루룩 벗어던지고 에메랄드빛 바다로 뛰어들거나 돈 걱정, 일 걱정, 가족 걱정 없이 지중해의 고운 모래 위에 일광욕하는, 그러다 올리브유와 소금으로만 양념한 싱싱한 해산물 요리를 매일 먹는 이미지를 그려봤다. 그 남자가 지중해 한가운데에 위치한 스페인 마요르카에 숙소를 구한다고 했을 때 마음은 고맙지만 우리 예산(한 달 숙소 비용은 500달러에 맞춰 있다.)으로는 한 달짜리 방은 턱도 없다고 호언장담 했다. 하지만 나의 확신은 보기 좋게 무너졌고 그렇게 우린 최고 성수기인 8월, 마요르카에 와 있다.


바다는 따뜻하고, 물은 맑으며, 모래는 곱다. 파도는 언제나 평온하여 갑작스러운 이안류에 휩쓸릴 걱정도 없다. 급격한 깊이 변화가 없는 해변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편안히 놀 수 있다. 주변에는 온갖 편의 시설들이 들어서 있어 먹고, 마시고, 쇼핑하고, 쉬는 것 외에는 신경 쓸 일이 없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오가는 셔틀에서 내려 짐을 풀고 나면 일 년 내내 먹고사는 문제에 시달리다가 여름 한 철은 화끈하게 쉬어 갈 수 있는 곳이 마요르카다.


그러니까 이곳은 휴양지를 찾아온 이들에게 확실한 낙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딜레마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수영복 하나만 걸친 채 호텔에서 해변으로 나오는 이들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그들은 배가 고프면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을 수 있고 물놀이가 끝나면 모래를 툭툭 털고 호텔로 들어가 씻을 수 있다. 갈아입을 옷과 샌드위치, 과일, 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버스를 타고 해변까지 걸어 나온 나와는 대조적이다. 호텔이나 리조트 대신 호스텔과 남의 집에 머무르는 상황이 커다란 괴리감을 만든다.


석 달을 스페인에서 머문다고 하면 사람들은 우리가 대단한 부자인 것 마냥 여긴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사람들이 일주일 유럽 여행을 하는 경비나 그 남자와 내가 한 달을 머무는 비용이나 비슷하니 돈이 많아서는 아니다. 그럼에도 계속 여행할 수 있는 이유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모두에게 24시간이 주어지는 공평한 가치인데 어떻게 남들보다 많다고 할 수 있을까? 지금은 ‘시간’이 많은 사람이 가장 부러운 시대이다. 한 달 살기는 ‘시간 부자’ 즉 현대에서 가장 비싼 가치를 들여야지만 할 수 있는 여행법이자 그 나라의 그 도시를 즐길 수 있는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


다른 이들이 휴가 가는 시기를 피하면 여행지 물가는 저렴해진다. 한 달 숙소 비용 또한 낮아진다. 다른 이들이 빠듯한 일정에 쫓겨 택시 뒷좌석에 짐을 실을 때 시간이 많은 여행자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다. 조금 돌아가고 천천히 간다 해도 시간을 돈으로 메우지 않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남들보다 저렴하면서도 더 다양한 경험을 하고 다녔다.


그동안 시간이 많은 여행자라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가진 돈은 적지만 여행지를 더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요르카에서는 그 남자도 나도 어딘지 모르게 기가 죽어 있다. 아낌없이 돈을 쓰려고 작정한 마요르카의 휴양객 틈에서 궁색한 여행을 하고 있는 우리가 초라하게 느껴진다. 섬이 다 그렇듯 대중교통이 불편해서 이곳을 찾는 대부분의 여행객은 차를 렌트한다. 부담스러운 차는 선택에서 제외하고 오토바이라도 찾아보려고 했으나 그 비용도 만만치 않다. 섬에서 쓸 수 있는 정기 교통권을 샀지만 땡볕 아래에서 한 시간에 한 대씩 오는 버스가 야속하기만 하다.


휴양지에도 사람이 있다

 

남녀, 여행사정 29-02@마요르카.jpg
이 중에 우리가 먹을 빠에야도 있다는 거죠?

 

마요르카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휴식을 원해서 찾아온 이들에게 확실한 낙원이 되어주지만 그 여자는 마음 한 곳이 허전하다. 완벽할 것 같은 섬 생활에 뭔가 중요한 게 빠져 있기 때문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달릴 수 있는 도로는 렌터카를 빌린 이들의 것 같고, 해변에 늘어서 있는 지중해풍 식당들은 지갑 두둑한 사람을 위한 메뉴만 준비해 놓은 듯 보인다. 목 좋은 자리에는 어김없이 호텔이 들어서 있고, 성수기에는 2~3배 가격이 올라 그 비싼 객실도 구하기 힘든 곳이 바로 휴양지이다.


휴양지에서 돈을 쓰지 않는 이들이 할 일은 없어 보인다. 호텔에 머물지도, 자동차도 빌리지 않은 여행객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느라 일주일을 멍하니 있었다. 애당초 삶이 풍족하지 않은 사람을 반기지 않는 곳임에도 유럽 최고의 휴양지를 극성수기에 골라 찾아온 내 잘못이 크다. 그 여자에게 미안하다.


남들 다 가는 관광지가 아니라 현지인 틈으로 잠시나마 머물 수 있다는 것이 한 달 살기의 최대 매력이다. 낯선 이국의 공간에 잠시 소속되어 현지인의 친구가 되어 보고 그들의 공간을 나누고, 작은 추억을 공유하는 사이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여행 안에 ‘사람’을 넣었다. 현지인들의 삶을 보고 친구가 되어 도시를 즐기게 되는 법을 배웠다.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방식을 볼 수 있었던 ‘살아보는 여행’ 이기에 가능했다. 바쁘게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한 곳에 머물며 현지인의 삶을 바라보는 것도 여행이라 생각한다. 바라보는 관점을 조금만 바꿔도 전혀 다른 재미가 찾아오니 한 번쯤 여행 방식을 바꿔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실 한 달을 머물 비용으로 일주일 동안 호사스럽게 지냈다면 이런 고민도 없었을 게다.


그런데 풍족하지 않은 이들은 휴양지에 발조차 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마요르카 곳곳에도 저렴한 숙소인 호스텔이 존재하고, 100년 전부터 섬 구석구석을 연결해주는 대중교통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니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어디든 갈 수 있다. 휴양지에서도 다른 도시처럼 현지인을 만나며 여행할 수 있는데 우리는 다른 이들의 여행만 부러워하고 있었다. 또한 시내 식당들 대부분이 뜨내기 관광객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찾아보면 동네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식당도 있다.


그 식당 문을 연 것은 우연이었다. 문 앞에는 하얀 머리 성성한 노인들이 모여 큰 목소리로 수다 중이고, 안에서는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고민할 것 없이 자리에 앉아 식사를 주문한 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음식을 맛보았다. ‘단골 식당으로 삼아야지’ 생각하며 일어나던 차에 일요일 점심은 예약 손님만 받는다는 문구가 보였다. 얼마나 대단한 요리를 내놓길래 한정된 인원으로 손님을 받을까 싶어서 냉큼 예약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 달라 했다. 식당 주인은 내 이름도, 예약금도 받지 않고 일요일 오후 2시에 오라고 했다. 괜찮겠냐고 물었더니 ‘우리 식당을 찾는 동양인은 너뿐이라 네 얼굴이 이름’이란다.


일요일 오후, 식당 문 앞에는 지난 점심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식당 주인은 나를 알아보고 자리 안내보다 먼저 야외 테라스에서 요리 중인 빠에야Paella를 보여준다. 새우와 해산물이 가득한 150인분의 음식이 끓고 있었다. 일요일 특선 메뉴를 맛보기 위해 동네 사람들도 일주일에 한 번 파티를 즐기듯 식당을 찾는다고 했다. 휴양객들이 찾아와 섬이 북적거리기 전부터 이 식당은 동네 사람들의 마실이었다. 이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는데 관광지를 포장하는 진한 향에 묻혀서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 여자에게 미안한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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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백종민/김은덕

두 사람은 늘 함께 하는 부부작가이다. 파리, 뉴욕, 런던, 도쿄, 타이베이 등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도시를 찾아다니며 한 달씩 머무는 삶을 살고 있고 여행자인 듯, 생활자인 듯한 이야기를 담아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를 썼다.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일상을 여행하듯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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