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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큰 문제들은 죄다 꼬여있다.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소유관계의 모순”을 말했다. 어떤 시스템(관계망)을 기반으로 생산력은 증가하는데, 생산력이 어느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면 그 시스템은 깨질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월러스틴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와 국가간 체계”에 주목했다. 전 세계의 경제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만 중요한 문제에 대한 결정권은 국가별로 지니고 있다는 것, 이 근본적인 모순을 품은 게 오늘날의 세계체제라는 이야기다. 요즘 핫한 폴라니도 마찬가지다. 시장경제(자기조정적 시장)은 규제 없이 스스로 작동하며 문제를 조정하는 시스템이라 하는데, 시장경제 스스로가 끊임없이 규제를 요청하는 대항운동을 낳을 수 밖에 없다 말한다.
10년 전에 큰 주목을 끌었던 『88만원 세대』는 100세 인생 시대에 더 오래 일하려는 기성세대의 (자연스런) 노력이 청년 세대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일 수 있음을 지적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오랜 반공교육의 토대 위에서 지지를 구해야만 했다. 위험천만한 원자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이미 많은 전력을 필요로 하는 사회가 구축된 후에서야 시동을 걸게 되었다.
세상에 참 단순한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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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세계에 유행하는 바람은 ‘강력하고도 단순한 문제해결’인 것 같다. 영국인들은 자국 문제를 단순화하기 위해 ‘브렉시트(Brexit)’라는 강력한 결정을 내렸다. 미국인들은 ‘미국을 다시 강력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만들겠다며 이주자들을 추방하거나 입국 금지하고, 미국에 손해를 끼치는 나라들에는 강력하게 대처하겠다는 트럼프를 선택했다. 유럽 각국에서는 이미 트럼프와 유사한 주장을 하는 극우정당들이 집권에 가까이 다가갔거나, 유의미한 원내 거점을 확보했다. 눈을 돌리면 아시아에도 있다.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마약사범들을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했다. 두테르테에 대한 지지율은 최근 조사에 따르면 67~75%에 이른다.
최근 출간된 책 『거대한 후퇴』는 이 같은 현상을 현대 사회의 퇴행현상, 즉 ‘거대한 후퇴’로 명명하며 이에 대한 인식과 대안 마련의 틀을 제공하는데, 역시나 이 문제도 꼬여있다. 만인이 평등하다는 의식은 갈수록 공고해졌는데, 만인의 현실은 갈수록 불평등해졌기에 발생한 문제라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역행' 현상은 사회 '진보'과정에서 발생한 일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서양사회는 다양한 집단 사이의 '수평적' 평등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발달로 인한 새로운 형태의 '수직적' 불평등과 차별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퇴행적 현대화란 수평적 평등과 수직적 불평등이 맞물리면서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 지그문트 바우만, 슬라보예 지젝 등, 『거대한 후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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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현대 국가들이 헌법적 원리로 채택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합의와 조정의 원리다. 서로 다른 국민을 대변하는 세력들이 합의를 형성하기 위해 긴 조정을 거치는 방식으로 대개 진행된다. 동시에 ‘민주주의’는 국가의 운영과 정책의 실행은 국민 다수(아래로부터의 다수)의 행복을 실현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수직적 불평등이 극심해지면서 ‘변화’에 대한 요구가 높은 오늘날, ‘민주주의’는 곧 개혁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정과 합의의 과정만 길게 진행되고, 개혁은 미지근하기만 하니 대중은 민주주의에 만족감을 느끼기 힘들다.
바로 이런 틈새 속에서 복잡한 숙고와 합의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문제를 강력하고 단순하게 해결하겠다는 새로운 세력이 자라나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모든 포퓰리스트 이데올로기에서와 마찬가지로 트럼프는 사람들에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이유를 주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각이란 대단히 복잡한 국제정세에 대한 생각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모든 것을 아주, 아주 단순하게 만들고 있다"라고 명료하게 분석했다.
- 지그문트 바우만, 슬라보예 지젝 등,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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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게 꼬인 문제를 단순하게 풀기 위해서는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복잡하게 묶여서 풀어낼 수 없는 매듭을 가위로 자르면, 끈의 일부는 잘려나가게 된다. 실제로 이들은 사회 구성원 중 일부를 ‘적’으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잘라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상하게도 최초의 불만은 엘리트들에 대한 것이었지만, 실제 공격은 대개 이주민, 여성, 동성애자, 소수민족 같은 사회적 약자를 향하고 있다. 단순한 해결책을 내세우는 새로운 정치 엘리트들이, 다수의 약자들에게 소수의 약자들을 문제의 원인으로 간단명료하게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직적 불평등의 문제는 사회를 아주 깊은 영역에서부터 뜯어고쳐야 해결할 수 있는 큰 문제다. 단순한 해결에 욕망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풀 방법은 없다. 또한 이런 큰 문제를 건드리면 많은 저항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 저항을 넘어서려면 많은 정치적 지지가 상당기간 지속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하나의 동질화된 집단들이 뭉친다고 되는 일은 아니고, 다양한 차이를 지닌 사람들이 같은 길을 오래 함께 걸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서로 간의 공격이 아니라, 수평적 평등에 기반한 숙고와 연대라는 것이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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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적 평등을 위한 연대는 서로 간의 스킨십 없이는 자라날 수 없다. 교류를 하면서 서로를 존중한다는 신뢰를 키워야 긴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다. 하지만 최근의 사회-문화적 흐름은 다른 결로 가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각각의 공간으로 분절되고 있다. 앱을 통해 간편히 배달음식을 주문할 수 있고, 매장에서도 키오스크로 혼자 주문한다. 계좌를 개설하기 위해 은행에 갈 필요도 없다. SNS에만 들어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기술의 발전을 기반으로 우리는 타인과 대변하지 않고도 삶을 누릴 수 있는 세상에 들어서고 있다. 제조업의 비중이 낮아지고, 서비스업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노동자들도 이제 하나의 공간에 집단적으로 모인 존재가 아니다. 기존의 조직들도 재생산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렇게 분절된 사람들에게 쏟아지고 있는 것은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이다. 이 정보들은 사람마다 다르게 제공된다. SNS의 알고리즘이란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으로 분리된 채, 각자에 맞게 편향된 정보를 제공받으며 서로 멀어지고 있다.
정보는 미국 대기업 두 곳의 비밀 알고리즘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우리는 마음 맞는 ‘친구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아늑한 필터버블로 서서히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반대쪽 사람들이 감히 우리에게 말을 걸면, 우리는 그들을 ‘트롤’(악플러)라고 부릅니다. 페이스북이 우리에게 투명 벽을 높이 쌓는다면, 구글은 벽의 양쪽을 검증되지 않은 콘텐츠로 채웁니다. 구글은 스스로 정보의 진실성을 결정하는 결정권자가 아니라 단지 플랫폼으로 여깁니다. 그 결과 가짜 뉴스가 현대 민주주의 생활의 결정적인 특징이 되었습니다.
- 지그문트 바우만, 슬라보예 지젝 등, 같은 책
『거대한 후퇴』는 정치와 경제만이 아니라 우리가 관계 맺는 문화 역시 큰 보폭으로 뒷걸음질 중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제기한다. 타인과 대면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세계에서 우리가 손을 잡아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이 불평등의 시대에, 세상이 이대로 점점 편해지면 그것으로 좋은 걸까. 새로운 서비스들이 제공될수록, 우리들의 간격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김성광
다행히도, 책 읽는 게 점점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