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 스테르박Jana Sterbak, 생고기 드레스(Vanitas; Flesh Dress for an Albino Anorectic), 1987년
이탈리아 식당에서 간단히 모임을 가진 후 마무리를 하는 중 누군가 식탁 위에 남은 음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누가 좀 빨리 먹지그래. 보기에 모양도 좀 그렇고...... (일동 웃음)” 보기에 모양이? 나는 가만히 식탁을 들여다보았다. 이것저것 시켜서 함께 먹다 보니 모두가 마지막 수저를 양보하느라 거의 빈 접시 위에 약간의 음식이 붙어 있었다. 껍질 없는 홍합 두어 개가 버터에 버무려져 번들거리며 벌러덩 누워 있다. 홍합의 모양이 거슬렸던 모양이다.
언어적 수사는 인간의 상상력의 범주를 보여준다. 기와도 암기와와 숫기와로 나뉘고, 실과 바늘, 볼트와 너트처럼 인간 여성과 남성을 상징하는 이미지는 대체로 동일한 시각적 틀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암수 구별이라는 이분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길쭉하고 튀어나온 것은 남성기로, 둥글고 구멍이 있거나 평평하면 여성기로 비유한다. 더구나 식과 성이 인간의 일상에서 밀접하다 보니 성을 먹거리에 비유하거나 음식으로 은유하는 경우가 자연스럽게 있기 마련이다. 특히 언어가 남성의 지배 속에 있기에 여성을 향한 비유가 더욱 풍성하다. 앵두 같은 입술, 복숭아 같은 뺨이라는 ‘아름다운’ 표현부터 작은 가슴을 비하하는 건포도, 성기를 칭하는 조개처럼 비속어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몸은 부위별로 먹거리다. 여자를 음식 맛보듯이 생각하기 때문에 낯선 여자의 뺨에 혀를 내밀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연출하기까지 한다.
여자의 몸이 구석구석 과일과 어패류가 되어가는 한편, 가슴 큰 여자는 젖소 부인이라 부른다. 여성의 가슴골을 ‘젖무덤’이라 표현하는 목소리를 들으면 여자 인간은 그냥 포유류 암컷인가 싶다. 하지만 어린 여자를 영계라 부르는 걸 보면 여자는 조류인 것도 같다. 아니다. 성폭력 피해자가 꽃뱀이 되는 걸 보면 여자는 파충류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다. “룸에 가면 자연산을 더 찾는다”는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의 발언을 떠올려 보니 여자는 자연산 활어회, 그러니까 어류일 수도 있구나. 하지만 만취한 여자는 골뱅이라 부르니 패류로 확장되기도 한다.
한 커뮤니티에서 남편의 외도를 놓고 공방전이 벌어졌다. 남자의 외도를 나름 ‘쿨’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표현 중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매일 집밥만 먹으면 질리니까 가끔 외식도 해줘야죠” 여성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깊은 무의식을 드러내는 언어가 바로 여성을 ‘먹는다’고 하는 표현이다. 성관계를 ‘떡친다’고 하거나 구멍에 빨대 꽂기 등등으로 표현한다. 김치녀, 스시녀, 된장녀, 간장녀, 밀크티녀, 미국 치즈녀 등 별별 종류의 ‘먹거리 여성’이 온 지구에 있다. 성 매수를 뜻하는 ‘2차’라는 표현도 여성을 먹거리로 여기는 발상에서 비롯한다. 여자가 후식인 줄 안다. 영어에서 또한 eat동사를 여자와의 성관계에 활용하기도 한다.
여성의 몸은 먹히는 고기이자 보여지는 꽃이다. 여성은 식용과 관상용 사이를 오간다. 때로는 여성의 생산성 때문에 열매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먹거나 꺾는다, 따먹는다는 동사를 사용한다. 좋은 말로 여성을 표현한다고 해봤자 꽃이나 열매다. 여성의 몸은 남성에게 먹는 음식으로 대상화되어 남성의 쾌락의 도구가 된다. 여성의 뒤태에 대한 언론의 각종 집착도 여성을 시선이 있는 생명체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성적대상화Sexual objectification. 우선 대상화란 무엇일까. 느낄 줄 알며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다른 주체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대상으로만 여기는 태도를 대상화라고 한다. ‘성적’ 대상화란 이 대상을 성적인 목적/도구로만 여긴다는 뜻이다. 대상화란 달리 말하면 ‘사물화’다. 생각하고 느끼는 인격체로 ‘보지 않는다’. 화化는 ‘되다’라는 의미다. 여성을 사물이 되게 하여 의식이 없도록 만드는 상태가 바로 성적 대상화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 여기기에 여성을 식재료나 음식으로 여겨 ‘먹는다’. 강간을 위해 강간 약물을 사용하는 이유도 여성을 의식이 없는 사물로 만들기 위해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서 홀로 성’관계’라는 강간을 한다. 여성을 사물화하는 방식 중 하나가 ‘상납’이다. 성 상납에서 ‘성’을 남성이라고 생각할 리는 없다. 여성을 남성에게 상납한다.
소설 『태백산맥』으로 유명해진 꼬막 맛은 강간에 대한 표현이다. 염상구가 외서댁을 강간한 뒤 “쫄깃쫄깃한 것이 꼭 겨울 꼬막 맛”이라고 회상하는 표현은 유명하다. 폭력 이후, 염상구에게는 ‘맛’이 남았다. 소설 속 인물이지만 이런 인물이 소설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여성을 ‘좋게’ 다룬 문학은 또 어떨까. 화려한 『아라비안나이트』에서 여자는 역시 과일과 잼과 맛있는 과자처럼 달콤한 쾌락의 원천이다. 초현실주의 운동의 대부라 불리는 앙드레 브르통은 여성의 입을 사랑했으나 그가 사랑한 여성의 입에 말은 없었다. 그의 시 ‘자유로운 결합’에서는 여자의 입과 혀를 비롯하여 온몸을 구석구석 찬양하며 “옛날 사탕과 해초 같은 성기가 있다”고 한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에서 살해되는 인물은 모두 여성이다. 이 여성들에게서 좋은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여성은 향과 맛을 뿜는 존재다. 심지어 음악도 여성이 만들었다고 하면 소리에서 ‘자궁 냄새’를 맡는 초능력을 가진 남성이 있다.
야나 스테르박Jana Sterbak의 작품 ‘생고기 드레스’는 70kg이나 되는 소의 옆구리 살로 만든 드레스다. 살로 옷을 만들었으니 이 옷은 살인가 의복인가. 소-고기-옷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소라는 동물(생명)은 고기라는 먹거리를 거쳐 옷이라는 사물이 된다. 여성에 대한 대상화를 비틀고, 동물과 여성을 ‘살’로만 대하는 남성사회의 시각을 비판한 작품이다.
남성에게 ‘자유’란 많은 경우 여성을 향한 폭력으로 향한다. 여성을 자유, 상상력, 해방의 제물로 삼아 정치적 진보와 예술 창작을 일구어 나간다. 그들의 자유는 ‘나와 자유롭게 섹스하는 여자’의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 정치와 예술에서 “말랑말랑한 뇌가 기여”한 진보와 자유가 많은 경우 여성에게 폭력적이고, 이에 대한 문제 제기 앞에서 ‘말랑말랑한 뇌’는 순식간에 굳어 버린다.
인간의 도덕성에 여성 비하는 포함되지 않는다. 성적 취향, 젊은 혈기 정도로 가볍게 여긴다. 흉하기 그지없는 내 마음을 ‘남자 마음’이라 둔갑시켜도 안전한 현상을 보며, 대체 ‘일반화’는 누구의 주종목인가 새삼스레 되묻게 된다. 보통 남자의 기준을 과하게 낮춰서 남성의 도덕성 검증을 편하게 만든다. 언제나 그렇듯이, 문제의 당사자보다 더욱 기가 막히게 만드는 인물들은 당사자를 옹호하기 위해 불순한 침묵을 택하거나 적극적으로 그를 감싸는 무시무시한 남성연대의 주역들이다.
청와대에는 여성을 성적대상화 하는 책을 쓴 탁현민 기획자가 있으며 법정에서는 여자를 죽인 자와 죽임당한 이의 아버지 사이에서 일어난 합의가 빛을 발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여성의 몸은 구석구석 비인격적인 ‘살’이다. 여성의 사물화란 사소한 성희롱에서 살인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온 사방에서 여자를 먹는 아귀들의 소리가 가라앉질 않는다. 관계 맺을 줄 모르는 불쌍한 인간들의 소음이다. “몸을 기억하게 만드는 여자”도 남자를 기억할 줄 아는 의식이 있다. 그 기억 속의 나는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보길.
아, 이쯤 되면 “남자도 음식으로 대상화된다!”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라영(예술사회학 연구자)
프랑스에서 예술사회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예술과 정치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여자 사람, 여자』(전자책),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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