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어려운 책에 대한 어려운 리뷰]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
1990년대, 어려운 책을 어렵게 읽었던 시대. 쉬운 책, 쉽게 읽히는 리뷰가 대세인 요즘, 도전정신 반 허세 반으로 붙잡았던 그 시절의 사상가들이 문득 떠오른다. 90년대 스타일을 간직한 번역가 이정인 씨의 현대 사상가 리뷰를 열두 달 연속으로 연재할 예정이다.
글ㆍ사진 이정인
2017.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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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은 1942년 식민지 인도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1959년 캘거타대학 영문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유학을 떠난 스피박은 코넬 대학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해체비평가 폴 드만의 지도 아래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폴 드만의 해체비평이 탈정치적 언어유희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던 반면, 스피박은 데리다의 해체가 급진적 정치의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스피박은 1976년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 학계에 처음 이름을 알렸다. 장문의 옮긴이 서문을 붙인 이 번역판을 통해 그녀는 미국 학계에서 데리다의 권위 있는 소개자로 떠올랐다. 그와 같은 해에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출간되었고, 스피박이 유학생활을 하던 미국의 6, 70년대는 급진적 페미니즘의 시대이기도 했다. 비서구 여성인 스피박은 이러한 영향 속에서 80년대 들어 해체론과 페미니즘, 포스트식민담론의 결합을 추구하며 에드워드 사이드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로 떠올랐다.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

 

스피박에게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가져다 준 것은 1983년에 발표한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논문이다. 이 글은 80년대 초에 라나지트 구하 등 인도 역사학자들이 조직한 <서발턴 연구회>의 작업에 대한 우회적인 개입이었다.


원래 영국군대에서 하급 장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던 서발턴(subaltern)이란 영어 단어는 1930년대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사용하며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그람시는 산업화된 북부와 낙후된 남부로 나눠진 이탈리아에서 남부 농민의 저항을 고려하는데 기존의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으로 불충분하다고 보고, 서발턴 계급 혹은 서발턴 집단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서발턴은 한국에서 하위계급이나 하위주체로 흔히 번역되고 있지만 적어도 그람시가 사용한 맥락에서는 80년대 한국의 운동권이 흔히 사용하던 “기층민중”이란 말과 거의 유사하다.


초기 서발턴 연구회의 목적은 그동안 엘리트 식민주의나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기층민중의 투쟁을 복원하여 저항주체로서 온전한 위상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피박은 서발턴 연구회의 지향을 전반적으로 지지하면서도 과연 서발턴의 목소리를 온전히 복원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한다. 스피박은 글의 서두에서 1972년에 이루어진 푸코와 들뢰즈의 대담(『푸코의 맑스』에 수록)을 가져와 서구 급진담론의 한계를 비판한다. 그녀는 이 두 유명한 프랑스 지식인의 마오주의와 노동자투쟁에 대한 지지가 대한 추상적인 찬양에 그치고 있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서구적 주체 및 권력과 지식의 연계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비판자인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대중들이 지식인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뿐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한다고 대중들의 투쟁을 무비판적으로 예찬하고 있는데, 스피박은 가장 억압받는 비서구지역의 서발턴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이들 급진적 서구 지식인이 말하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결코 아님을 드러낸다. 그녀는 이러한 서발턴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묘사한 프랑스 소작농들을 예를 든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들은 하나의 계급으로 조직될 수 없어 스스로를 대표하지 못하고 언제나 타자에게 자신의 이해를 의탁할 수밖에 없다. 스피박은 비서구 사회의 서발턴이 바로 그와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이야기한다. 

 

포스트식민주의에서 초국가적 문화연구로


스피박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의 말미에서 1926년 십대 소녀로 자살한 자신의 이모할머니 부바네스와리 바두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두리는 생리 중에 자살했는데, 당시 인도에서 미혼여성의 자살은 대개 임신이 원인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은 오랫동안 가족 내에서 미스테리로 남아 있었다. 오랜 뒤에 바두리가 독립운동 단체의 조직원이었으며 정부 요인을 암살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그것을 수행할 자신이 없어서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스피박은 그녀가 자신이 불륜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생리 중에 자살을 선택했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그녀의 이러한 의도는 결코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스피박은 바두리의 죽음에 대해 자신이 직접 들은 두 가지 반응을 인용한다. 첫 번째는 왜 보다 온전한 삶을 누린 그녀의 언니들이 아니라 굳이 불운한 바두리에게 관심을 가지는가라는 반응이었고, 둘째는 불륜을 저지른 것 같다는 바두리의 조카들의 말이었다. 이를 씁쓸하게 인용하며 스피박은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고 탄식한다.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는 스피박의 탄식은 과도한 패배주의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녀의 글은 인도의 비주류 역사학에 불과했던 서발턴 연구를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하는데 크게 공헌했을 뿐 아니라, 허구적으로 부여된 동일성 속에서 묻혀 지고 있는 다양한 서발턴의 목소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듣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점을 환기시킴으로써 그 연구회의 작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피박의 본질주의에 대한 비판은 추상적인 노동계급, 추상적인 여성과 같은 일반적 범주 속의 이질성을 포착하고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접근해야 함을 보여준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를 비롯한 80년대 스피박의 저작들은 스스로 모든 “여성”, 모든 “노동자”, 모든 “투쟁”을 대표한다고 자임하는 서구지식인들의 백인중심적 비판담론과 오리엔탈리즘적인 태도를 꼬집고 비트는 글들을 썼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미국 대학 내에서 지역학이 제도화된 분과학문으로 안착되면서 포스트식민주의 담론이 제도권에서 각광받기 시작한다. 스피박과 호미 바바처럼 저명한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들은 하버드나 컬럼비아 같은 미국 유수의 명문대학에 교수로 초빙되었다.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은 이제 저항담론이라기 보다는 분과학문 내의 고급 지식인 담론으로 제도화됐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피박 자신인 포스트식민주의 담론에 거리를 두며 또 다시 현실에 대한 비판의 에토스를 활성화하고자 시도한다. 1999년에 발간된 『포스트식민이성 비판』의 서문에서 스피박은 “(이 책은) 에코 쪽의 공격을 받고서 식민담론 연구에서 초국가적 문화연구로 옮아간 한 실천가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 이 텍스트가 사라져 가는 현재를 포착하려고 할 때 내가 서 있는 입장은 ‘움직이는 토대’인 초국가적 문화연구이다”라고 자신의 변화된 입장을 요약한다.

 

포스트식민이성을 비판한다

 

“철학”, “문학”, “역사”, “문화”의 네 부분으로 구성된 『포스트식민이성 비판』은 많은 부분 과거에 발표한 글들을 재구성해 넣으면서 전지구적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맥락 속에 재배치시키고 있다.

 

스피박은 데리다의 해체논법을 가져와 근대 서양철학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인 칸트, 헤겔, 마르크스의 사상이 보편으로 자신을 주장하고 있는 속에서 어떻게 비서구의 “토착정보원”적인 개념들에 의존하고 있는 동시에 그것을 삭제하고 있는지 드러내려고 한다. 예컨대 칸트의 보편 주체는 “날 것의 인간”이라는 것에, 헤겔의 역사철학은 『바가바드기타』와 같은 비유럽 텍스트의 몰역사성을 부각시키는 것에, 마르크스의 보편적 역사유물론은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에 기대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어지는 두 번째 장에서는 기존 영문학 제도 내에서 페미니즘 혹은 포스트식민주의 텍스트로 읽혀온 문학작품들에 대한 정교한 독해를 통해 그것들이 어떻게 서발턴의 목소리를 은폐하고 있는지 보여주려고 한다.

 

“역사”라는 제목을 붙인 세 번째 장은 이미 80년대 발표한 여성의 목소리가 어떻게 은폐되는지를 추적한 두 논문 「시르무르의 라니」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두 논문을 재구성하여 전지구적 금융화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는 현재의 서발턴 문제와 연결을 시도한다. “문화”를 다룬 마지막 장은 프레데릭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 분석을 주요 비판대상으로 삼아 이런 부류의 서구 중심적인 자본주의 문화 분석이야말로 비서구 지역에서 벌어지는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을 은폐하는데 공모할 수 있다고 지적하며, 그보다 전지구적 금융화에 의해 비서구 여성들이 착취되는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제기한다.

 

스피박은 흔히 페미니스트-마르크스주의-해체론자로 불린다. 이에 기초하여 “제 3세계” 여성이라는 가장 억압받는 주체의 입장에 서고자하는 스피박의 논의는 많은 부분 기존의 진보이론들이 짚어내지 못한 지점들을 드러낸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의식이 정교한 텍스트분석 만큼 정치한 현실분석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아쉽다. 스스로도 프레데릭 제임슨의 후기자본주의 논의가 도식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그녀 역시 동구권 붕괴 이후 전지구적 금융화의 지배가 확립되었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전지구적 금융화”라는 개념은 자신의 주장을 최종적으로 지지하기 위한 추상적인 공리로만 활용되고 있는 것인데 이러한 태도야 말로 스피박이 줄곧 비판해왔던 것으로, 이미 80년대부터 사용해온 전지구적 노동 분업이라는 개념과 무엇이 다른지 명확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페미니스트, 마르크시스트, 해체론자

 

스피박의 글은 극도로 난해하다. 때문에 테리 이글턴 등 많은 평론가로부터 엘리트주의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스피박은 자신의 글쓰기가 자본주의적 속류화에 포섭되지 않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라고 반박하는 한편, 자신을 실천가로 규정하며 1세계의 교육제도 바깥의 가난한 비서구지역 여성들의 대상으로 실험적인 교육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찬양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이렇게 복잡한 이론적 논의의 끝에 다다른 지점이 결국 계몽운동과 유사한 것이라는 사실은 약간 실망스럽긴 하다.

 

스피박은 제도화된 지역학적 연구에 맞서 전지구화된 자본주의 속에서는 일국적ㆍ지역적 차원을 넘어서는 초국적 독해능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데, 이런 초국적 독해능력을 가지는 것은 스피박처럼 고도로 훈련된 지식인이 아니면 어려울 것이다. 서구 교육제도의 분과학문 체제를 비판하지만 그 대안으로 인문학적 상상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인문학 역시 서구의 교육문화제도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모순적으로 보인다. 이런 면들을 종합해볼 때 사실 스피박의 이론 내에 은근히 엘리트주의적 편향이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본질적 범주들을 해체하는 해체적 독법이 지적유희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많이 존재한다. 최근 한국에서는 유사 포스트식민주의 방법을 통해 민족/제국의 선악이분법을 해체하려 한다는 일부 지식인들의 시도가 오히려 가장 억압받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지우고, 국가와 기득권 세력의 이해에 봉사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스피박은 일찍부터 “전략적 본질주의”라는 입장을 취해왔다. 결국 스피박의 정치적 급진성은 난해하고 복잡한 해체작업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가장 억압받는 약자의 편에 서 있으려는 의지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라는 생각이 든다.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 가야트리 스피박 저/태혜숙,박미선 공저 | 갈무리
이 책은 ‘전 지구화’라는 시대의 흐름 안에서 페미니즘적 해체론적 맑스주의 입장에 따라 “토착정보원”(Native Informant)의 형상을 중심으로 철학ㆍ문학ㆍ역사ㆍ문화를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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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다양한 사회활동 틈틈이 추리소설, 교양서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한 번 글을 썼다 하면 정해진 원고 분량를 훌쩍 넘기며, 수많은 고유명사를 흩날리고, 뒷부분으로 갈수록 말투가 경직되는 그는 진정한 90년대 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