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한 저녁, 블로그를 타고 넘어가며 이런 저런 글을 보고는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서늘한여름밤’의 블로그를 알게 되었다. 그림체는 정식 미술 교육이나 만화 훈련을 받은 작가는 아닌 것이 분명했는데, 내용이 묘하게 공감이 갔다. 자기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 인간관계, 마음의 갈등에 대해서 1등신인 주인공이 투덜거린다. 예를 들어
“어른들은 조개는 상처를 통해 영롱한 진주를 만든다고 하지만, 영롱한 진주로 즐거움을 얻는 것은 조개가 아니라 그 조개를 캐서 진주를 얻은 인간일 뿐이다. 조개에게 진주 생겨서 좋냐고 물어봐라. 퍽도 좋아하겠다”(라는 말과 함께 조개가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그때 상처만 안받았어도, 속에 이딴 거 없이 사는 건데.”
이런 조개의 말 옆에 저자는 덧붙인다.
“누군가 상처를 통해 배운다 해도 상처를 주는 행위가 옹호되어서는 안 된다.”
뭔가 쩡~ 하고 가슴을 울리고,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기발한 반전이 있었다. 책 깨나 읽고 써온 나의 가슴을 한 방에 움직이는 이거 뭐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블로그의 애독자가 되었다. 보다 보니 ‘서늘한여름밤’은 대학원에서 임상심리를 전공하고, 대학병원에서 임상심리 수련과정을 들어갔다가 바로 그만두고 나온 이쪽 물 좀 먹은 사람이었다. 어쩐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새 웹툰을 기다리는 재미로 지내왔다. 그러던 중 웹툰을 모아서 『어차피 내 마음입니다』라는 책이 나오게 된 것이다.
나는 블로그로 매회 보았지만, 이번에 추천사를 쓰게 되면서 모아놓은 내용을 일찍 받아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추천사 의뢰가 많이 들어오지만 대부분 거절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블로그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 이 책의 추천 의뢰가 들어온 것만은 기쁜 마음으로 한 번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 거기다 심리 이야기니까 말이다.
웹툰을 읽으며 내가 느낀 서늘한여름밤의 이미지는 예민함과 까칠함이다. 저자는 얼마 전까지 정해진 길대로 심리학과를 나와 임상심리 석사를 하고, 유명 대학병원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수련 과정에 들어갔다. 전력질주를 하며 살아왔지만 자발적으로 튕겨져 나왔고, 그 후 소외감과 열등감을 느끼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다. ‘난 괜찮아’, ‘옳은 결정이야’라고 여러 번 되뇌지만, 한 편으로 몇 년 후 웹툰에서 예민하게 투덜거린 ‘시스템의 거지같음’과 ‘보수적 권위주의’, ‘지나치게 바쁘고 소진됨’을 견뎌낸 친구들은 전문가가 되었을 때 자신은 여전히 이 모습일까 두렵기도 하다. 이런 인식은 현실적이고 상식적으로 지극히 당연하다. 이 불안에 대해 저자는 이제는 “남들에게 보여주겠다고 이를 갈며 살고 싶지 않다“는 결심으로 답한다. 물론 결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돈과 안정, 소속감을 놓아야 하겠지만. 혼자 남겨진 것을 견뎌내는 것만큼 얻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그 안에서 저자의 단호함이 또한 느껴졌다.
이 책은 처음부터 독자에게 읽히기 위해 만들어졌다기보다, 정해진 트랙 위를 질주하다가 탁 멈춰버린 한 사람이 자기 마음 따라 가기로 결심한 후 생긴 불안을 정리하고 다스리기 위해 혼자 그림을 그리고 올리면서 세상과 소통을 하면서 만들어진 일종의 자가치유의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지향점이 외부를 향하고 거기에 맞추기보다 저자 자신의 속내에 맞춰있다.
그런 점에서 엄마와 관계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말한다. 내 눈에 서늘한여름밤의 어머니는 ‘육아서’에 나오는 적당한 거리를 두며 아이가 혼자 자립할 수 있게 키우는 어머니의 전형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서늘한여름밤이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다면서 어머니에게 말하면 “선생님이라고 다 맞는 게 아니야”라고 냉정하게 말한다. 외고에 떨어지는 실패를 경험하자 “실패는 축하할 일이지”라고 위로 아닌 위로,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말을 한다.
저자는 어머니가 자식을 독립적 존재로 크기를 바랐다고 한다. 반면 저자는 이런 어머니로부터 사랑 받는 자식이 되고자 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이런 면은 저자가 자라나 비슷한 패턴을 보이는 아이러니한 면을 보인다. 그의 대인관계에서 모든 이는 독립적 존재라 생각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한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근본적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은 것을 느끼며 불안해한다. 이 불편은 결혼할 남자를 만났을 때 비슷하게 반복되어 관계에 불안해 거리를 두고, 끝없이 시험했다. 불안을 확인해도 언제나 같은 자세로 확인해주고 그 자리에 있어주는 파트너를 만나면서 비로소 안정을 찾으면서 “너한테만큼은 언제나 칭찬받고 싶다”고 고백한다. 냉정하게 객관적 평가를 받기보다 한없는 지지와 칭찬을 해주는 항구와 같은 존재를 갈구한 것이고, 남자친구를 만난 후에 어느 정도 해갈이 될 수 있었다.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에게는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파트너가, 그 반대로 엄격하고 냉정한 사람에게는 관대한 사람이 파트너로 필요하고 그것이 상호발전과 성숙을 위해, 또 관계의 균형을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이 책에서 서늘한여름밤이 말하는 소소한 일상과 중요한 고민의 결과들을 보면서 느낄 수 있다.
이 글 전체에서 느껴지는 서늘한여름밤의 기조는 저자가 ‘my bitter sweet mother'에서 묘사한 어머니와 비슷한 면이 있다. 이성적이려고 노력하고, 예민하면서 수준 있는 테이스트를 갖고 있고, 독립적인 삶을 지향한다. 시류에 휘말리기보다 개인의 주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허전하고 비어있는 느낌이 있다는 것도 함께 느끼고 있다는 것이 서늘한여름밤의 자기성찰과 고민의 결과물이다. 그냥 “나 이미 이렇게 자라왔어. 어쩌라고, 나 이런 사람이니까 너희들이 이걸 봤으면 그런 줄아. 앞으로도 이런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으니까”라고 소리치기보다, 어떻게 해서 마음의 흐름을 그림과 글을 통해 깊이 이해하고, 성인이 된 이후에 새로운 관계를 찾아 빈 공간을 채우면서 한 발 한 발 성숙한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지 몸소 보여주고 있다. 그 점이 이 책이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완벽할 수 없는 존재다. ‘자아의 확장’이자 ‘내 뱃속의 아이’같은 한국의 전형적인 어머니상과 다른 어머니를 가진 새로운 존재로 자라났다. 아마 많은 육아전문가들이 책에서 지시하는 이상적인 면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어머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존재로 자라난 것은 아닌 듯하다. 본인은 결핍을 느끼고, 존재에 불안해한다. 그럼에도 자아의 힘은 강하고 많은 긍정적인 장점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를 기반으로 서늘한여름밤은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면서 말한다.
“최선을 고민하고 어디로 가는지 몰라 불안해하고, 잠 못 드는 밤이 있지만 멈춰있지 않은 채 매일의 발자취를 남기며 나아가고 있는 자신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려 하고 있다.”
그것이 자신에게 뿐 아니라 공감하고 있는 독자들에게도 용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이런 작은 용기와 수많은 오늘의 실수를 인정할 때, 막 뛰다가 넘어진 다음에 ‘난 망했어’라고 절망하기보다 잠시 쉬고 나서 숨을 고르고 나면 다시 일어서 뚜벅뚜벅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누누이 말하지만 마음의 건강함은 완벽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완벽할 필요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현(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