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이 없었다면 지금의 서울도 없었을 것
역사 추리소설 『적패』, 좀비를 소재로 한 논픽션 『좀비 제너레이션』, 역사 인문서 『조선의 명탐정들』, 장편 창작동화 『사라진 조우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 작가 정명섭이 새로운 소설 『별세계 사건부 : 조선총독부 토막살인』(이하 『별세계 사건부』)로 돌아왔다. 이번 작품은 일제강점기의 경성을 배경으로, 조선총독부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치밀한 자료 조사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과 생활상을 생생하게 재현해 낸 정명섭 소설가는 독자들을 위해 특별한 시간을 마련했다. ‘정명섭 작가와 함께하는 경성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독자들과의 만남을 준비한 것이다.
지난 14일 저녁 서울 시민청에서 독자들과 만난 작가는 한양에서 경성, 현재의 서울로 이어지는 역사를 설명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오래된 그림과 지도, 사진 등 다양한 자료들이 이곳의 과거와 현재를 증언하고 있었다. 정명섭 작가는 “600년이 넘는 서울의 역사에서 경성이라고 불린 시기는 35년 정도에 불과하지만, 경성이 없었다면 지금의 서울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조선시대의 한양은 경복궁과 육조 거리, 운종가(종로)를 중심으로 한 작은 규모의 도시였지만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도시가 확장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일본인들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처음 한양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은 곳이 (서울) 남쪽이었거든요. 북쪽은 이미 조선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남산에는 딸깍발이들이 살았습니다. 나막신을 신고 다니는 가난한 선비들이 살았던 동네였죠. 그런데 이 자리에 일본인들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도시가 확 바뀝니다.”
경성은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거점 도시”로써 변화하기 시작했다. 거주 인구가 빠르게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도시의 풍경 역시 달라졌다.
“조선시대에 용산은 빈 땅이었어요. 범람이 너무 자주 됐거든요. 그런데 청일 전쟁 때 청나라군이 주둔한 것을 시작으로 군대가 주둔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군인들, 군인 가족, 관계자 등이 모이면서 일종의 도시가 형성됐어요. 그게 바로 신용산 일대입니다. 여기에서 일직선으로 올라가면 남대문에 있었던 경성역이 나오고요. 조금 더 올라가면 지금의 시민청인 경성부청이 나옵니다.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조선총독부가 있었고요. 남북으로 길게 길을 낸 거예요. 언제 군사적인 출동을 해야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군대가 최대한 빨리 이동할 수 있게 일직선으로 길을 만들어 놓은 거죠.”
도시의 좌우 축선 역시 달라졌다. 창경궁과 종묘를 가르는 ‘율곡로’라는 이름의 길이 생겨난 것도 이 무렵이다. 조선총독부가 남산에서 광화문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청계천은 일본인과 조선인의 거주지를 가르는 경계선으로 기능했다. 대부분은 청계천 남쪽에 일본인이, 북쪽에는 조선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경계는 조선총독부가 새로 건설되면서 더욱 희미해졌다.
“조선총독부 공사가 1916년에 시작됐습니다. 명분은 북쪽 지역을 개발하겠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이곳에 총독부를 크게 지어놓으면 조선 사람이 어디를 지나가더라도 보게 되어있거든요. 실제로는 ‘너희들의 주인은 우리야’라는 걸 강력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만 있었을까?
조선총독부는 10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바로 그 시점에서 『별세계 사건부』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낙성식을 얼마 앞두고 조선총독부 안에서 조선인 건축사의 시신이 발견된다.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대(大)’자 형태로 흩뿌려진 모습이었다. 총독부는 조선인들을 자극하게 될까 우려하며 사건을 조용히 수습하려 하고, 육당 최남선은 통속잡지 ‘별세계’에서 기자 생활을 하고 있는 류경호에게 사건 조사를 부탁한다.
류경호는 일본의 게이오 대학을 졸업한 수재로, 비상한 두뇌와 남다른 관찰력을 발휘하며 진실에 다가간다. 정명섭 작가는 그가 “자신과 독자 대다수를 상징하는 인물”이자 “『태백산맥』의 김범우처럼 좌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상처를 입는 인물”이라고 말한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떠나거나 총독부에서 일을 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당시 지식인의 상황과 고뇌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시대에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만 있었던 것처럼 오해하지만, 사실 대부분은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비상도 계속되면 비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듯이, 일제강점기 시대에 경성에서는 수많은 변화들이 일어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나름의 방식으로 돌파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노력 중에 하나가 『별세계 사건부』에 나오는 이야기들입니다.”
조선총독부는 1926년 4월에 완공된 뒤 10월 1일에 문을 열었다. 첫 날에만 15만 명이 찾아와 구경했을 만큼 건물 내부는 최첨단 시설로 채워져 있었다. 같은 날, 항일정신을 담은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개봉됐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조선총독부의 개방과 영화 <아리랑>의 개봉, 두 개의 상징적인 사건이 같이 일어났어요. 물론 조선총독부가 개방되는 날짜에 영화 개봉일을 맞춘 겁니다. 그 날 사람들이 많이 몰려올 줄 알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총독부에서 영화가 상영됐던 종로까지는 걸어갈 수 있는 거리거든요. 총독부를 구경했던 15만 명 가운데에는 (그 날) 나운규의 <아리랑>을 봤던 사람도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그때 당사자가 느꼈을 복잡 미묘한 감정은, 저는 절대로 책으로 옮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작가로서는 가장 매력적으로 담고 싶은 시기이기도 해요. 아마 그걸 찾는 여행을 계속 할 것 같습니다.”
강연을 마친 후 정명섭 작가는 독자들의 질문에 응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별세계 사건부』의 집필 과정과 함께, 추리소설 작가로서의 고민과 노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초고는 얼마 만에 쓰셨는지, 퇴고하시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셨는지 궁금합니다.
초고는 굉장히 빨리 쓰는 편입니다. 『별세계 사건부』 같은 경우는 분량이 꽤 많지만, 초고는 2달 조금 넘게 걸렸습니다. 대신에 준비하는 시간, 자료를 보는 시간이 아주 많았죠. 퇴고하는 시간도 굉장히 많았고요. 퇴고는 제가 끝을 내는 게 아니라, 출판사에서 이만하면 됐다고 하실 때까지 계속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이야기가 재미없을까 봐 불안할 때는 없으세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하세요?
제가 쓴 이야기가 재미없을까 봐 불안하면 계속 글을 씁니다. 언젠가 재밌는 이야기가 나오겠죠(웃음). 재밌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써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역사와 추리를 결합해 흥미로운 작품을 집필하셨는데요. 작품의 소재는 어디에서 얻으시는지, 역사적 사실과 배경에 대한 확인은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실록을 찾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 같은 자료들은 요즘은 다 인터넷에서 볼 수 있어요. 참고로 제가 기다리고 있는 건 ‘승정원일기’인데요. 앞부분은 임진왜란 때 타버렸고, 남은 부분은 ‘조선왕조실록’의 14배 정도 되는 분량이라고 합니다. 저는 실록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재밌는 주제들을 발견하고요. 실록을 보기 전과 후의 작품이 뚜렷하게 차이가 납니다. 항상 작가는 신비감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제 비밀은 실록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실록을 보고 주제를 찾으면 그 다음에는 논문을 봅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많이 집필하셨는데요. 그 시대에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나 계기가 있나요?
저도 조금 궁금하기는 한데요. 일종의 트렌드 같은 겁니다. 조선시대를 어느 정도 파고들다 보니까 다음에는 어떤 시대를 다뤄볼까 생각하게 됐는데요. 고려시대라든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에는 조금 애매하더라고요. 그래서 한말로 넘어가기 시작하니까 일제강점기에 주목하게 됐고 ‘이 시대가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어요. 그러면서 자료를 보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일제강점기에 대한 작품을 쓰게 된 것 같습니다.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1945년 해방 이후의 시기예요. 1947~1948년이 굉장한 혼란기였거든요. 혼란하면서도 재밌는 시대였는데, 그때를 한 번 다뤄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
샹그리라
2017.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