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센 Martin Senn, <단식광대>, 스위스 작가 마틴 센은 카프카의 소설들을 주제로 시작예술을 발표하고 있다.
미국을 가로질러 멕시코만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미시시피 강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의 북쪽에 있는 이타스카 호수에서 강이 시작한다. 강의 시작과 끝. 나는 요즘 이런 별 의미없는 것들에서 의미를 찾아 숨쉬는 중이다. 이 호수의 생태를 지킨 사람이며 20세기 초에 최초로 공원 관리자였던 메리 깁스Mary Gibbs라는 사람이 있다. 일생에 걸쳐 환경운동을 했던 그는 일선에서 물러나 요양 중이던 102살에도 돌봄 서비스의 문제에 항의하며 단식투쟁을 했다. 그 후 2년을 더 살았고 104세에 세상을 떴다. 102세에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지키고 옳다고 생각하는 말을 하기 위해 과감히 단식투쟁에 돌입하다니. 할 말이 많은 사람은 음식이 들어갈 공간조차 자신의 말을 위해 기꺼이 자리를 내준다.
살아있는 사람들 중에는 먹는 사람뿐 아니라 먹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음식을 끊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아직 의견이 분분하지만) 간헐적 단식처럼 건강을 예방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정 기간 먹지 않거나 혹은 몸이 아파서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종교적 이유로 금식을 할 수도 있으며 여성들의 경우는 성차별적 사회에서 먹기를 거부하는 증상에 시달리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메리 깁스처럼 ‘먹지 않음’으로 의사 표현을 할 정도로 강력하게 투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도에서 군부 독재와 폭압에 항거하며 세계 최장 단식투쟁을 벌인 이롬 샤르밀라Irom Sharmila는 무려 16년 동안 단식했다. 코로 연결한 튜브를 통해 기본적인 영양을 공급받을 뿐 음식 섭취를 거부했다. 비유가 아니라, 투쟁으로써 단식은 정말 몸이 줄어들고 깎이는 고통을 감내하는 일이다. 몸 안의 지방이 연소되고, 근육량이 줄고, 뼈에 칼슘이 빠지고, 피부가 늙어간다. 삭발과 마찬가지로 단식이라는 투쟁의 방식은 제 몸의 뼈와 살을 깎아 자음과 모음을 만들어 말을 쌓아가는 행동이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2014년. 그해 여름 유가족인 김영오씨는 46일간 광화문에서 단식을 했다.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가 단식을 했던 이유다. 끔찍한 사건을 무책임하게 수습했기 때문에 그는 이에 항거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사고는 은폐와 방관을 거듭하여 사건이 되고, 사건은 늘 ‘진정성’의 습격을 받으며 ‘이제 그만’, ‘지겹다’ 등에 둘러싸여 고립된다. 사람을 상실한 사람들은 이 사건이 사회적으로 살아있기를 원한다면, ‘지겨운’ 사람들은 사건의 소멸을 원한다. 급기야 최악의 사태를 보고 말았다. 단식 투쟁 하는 유가족들 곁에서 피자와 치킨을 시켜 먹으며 폭식 투쟁을 하던 사람들. ‘일베’ 회원들을 비롯하여 단식투쟁에 반대하는 이들은 “생명을 존중하는 우리들은 삶의 징표인 ‘식’을 통해 투쟁합시다”라며 ‘생명 존중 폭식 투쟁’을 했다. ‘투쟁’의 이름을 빌린 잔인한 공격이었다.
맛의 75%는 냄새를 통해 느낀다고 한다. 요리에는 냄새를 처리하는 과정이 늘 있다. 어떤 냄새는 없애야 할 ‘잡내’나 ‘누린내’가 되어 사라지고, 어떤 냄새는 ‘향’으로 살아난다. 보이지 않는 이 냄새들의 향연은 함께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에게는 방해물이기도 하다. 소리와 냄새는 사람과 직접 대면하지 않고도 괴로움을 줄 수 있다. 층간 소음만이 아니라 층간 혹은 옆집 간에 음식 냄새 때문에 싸우는 일도 일어난다고 하니 그 괴로움이 오죽하면 그럴까. 냄새는 맛보다 오래 남아 혀에서 음식물이 사라져도 옷에 배고 공기 속에서 흔적을 남긴다.
냄새가 강한 짜장면과 피자, 치킨을 먹으며 단식투쟁을 조롱하는 이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고 있으면 나의 뇌가 기억하는 냄새가 코끝에서 맴돈다. 도대체 그들의 마음에는 누가 있길래 그토록 잔인하게 먹어야 했으며, 희생자들을 향해 굳이 글로 적고 싶지도 않은 끔찍한 조롱의 언어들을 풀어놔야 했을까. 폭식투쟁은 냄새를 통한 일종의 화학적 공격이며 사람에게 모멸감을 주는 인신공격이다. 제 몸을 굶겨 고통스럽게 피와 뼈로 쓰는 말들에 음식을 퍼붓는 공격이다.
유가족이 ‘곡기를 끊는’ 심정을 어찌 다 헤아릴까. 유가족들은 먹기를 끊음으로써 먹을 수 없는 죽은 자와 연대한다. ‘표현의 자유’와 더불어 ‘생명 존중’도 숱하게 악용되는 개념이다. ‘식’이 삶의 징표는 아니다. 어떻게 ‘식’을 하는가에 따라 단/식이 극도의 자유의지를 드러내는 생생한 삶의 징표가 된다. 자고 일어나보니 벌레로 변신해 있어 가족의 멸시를 받던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는 결국 굶어 죽는다. 카프카에게 인간의 굶는 상태가 예사롭지 않은 탐구 주제였음은 <단식광대>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카프카의 <단식광대>에서 광대는 40일씩 단식을 한다. 40일이 지나면 음식을 조금 먹고 쉰 다음 며칠 후 다시 40일 단식에 들어간다.
사람들은 때로 이 단식광대를 의심한다. 몰래 음식을 먹을지도 모른다고. 감시자들을 붙여 놓지만 이 감시자들은 형식적으로 단식광대를 지킬 뿐이다. 그들은 단식광대에게 몰래 준비한 음식이 있다면 먹어도 된다고 ‘배려’하지만 이런 태도는 단식광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단식광대는 자신이 갇힌 창살 안에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자신은 정말 아무 것도 먹지 않음을 계속 증명하기 위해 애쓴다.
단식광대의 불만은 원하는 만큼 단식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원할 때까지 단식하고 싶어한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지만 그는 결국 계약 기간인 40일을 넘어 계속 단식한다. 그의 뜻을 알 리 없는 관객들은 이 광대를 조롱한다. 그는 자신이 단식을 계속 하는 이유로 “맛있는 음식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음식을 발견했다면, 이렇게 이목을 끌려는 짓을 하지 않았을 거고, 당신네들처럼 배불리 먹었을 거요.”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공연 매니저는 죽은 단식광대를 치우고 그 자리에 젊은 표범을 들여 보낸다. 관객들은 창살 안의 표범을 보며 생명력을 느끼고 기분 전환을 한다. 벌레가 된 잠자를 묻고 가족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되찾는 『변신』의 마지막과 비슷하다.
마틴 센 Martin Senn, <단식광대>
이 단식광대가 정작 끊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이 추구하는 맛을 위해 그는 먹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먹기를 거부했다기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먹기 위해’ 원치 않는 먹기를 거부했다. 단식광대가 추구했던 것은 극단적 숭고다. 이 숭고는 자유의지에서 나온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단식광대를 순교자에 비유한다. 게다가 단식 일정이 40일이라는 점은 예수의 단식을 떠올린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마태 4:1~2) 예수가 본격적인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40일 단식을 했다. 추구하는 방향이 선명한 사람은 온 몸을 비워 자신의 말로 가득 채운다. 이제 그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공적인 생명이 된다.
단식광대는 “누군가에게 단식법을 설명하려고 해보라. 이를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이해시킬 수 없는 노릇이다”고 한다. 정확한 말이다.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이해시킬 수는 없다. <단식광대>는 카프카가 병으로 수척해 가는 말년에 썼다. 폐결핵이 심해지면서 나중에는 점점 후두까지 병이 퍼져 음식을 삼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 자신이 단식에 대해 느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글이었다.
일상의 정치는 느끼는 감각에서 시작한다. 마음이 없는 몸은 때와 장소를 분별하지 못하고 먹는다. ‘식’이 삶의 징표가 아니라 타인의 상처를 공격하는 무기가 되는 순간이다.
이라영(예술사회학 연구자)
프랑스에서 예술사회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예술과 정치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여자 사람, 여자』(전자책),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가 있다.
미미공주
2017.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