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게만 느껴졌던 영국이라는 나라가 꽤 멋진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느낌은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다.”
영국 시민권을 따기 위한 시험을 치르고 나서 며칠 뒤에 출판사 담당자를 만났다. 다정하고 인정 많은 래리 핀레이(Larry Finlay)와 내 다음 책에 대해 의논하면서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래리는 내가 메이미 아이젠하워(Mamie Eisenhower,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부인)의 자서전이나 캐나다를 주제로 한, 터무니없고 상업성이 떨어지는 책을 제안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살다 보니 항상 나보다 선수를 치며 제안하곤 한다.
“그런데, 선생님이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을 발간하신 지 어느덧 20년이나 됐더라고요.”
“정말요?”
아무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세월이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다.
“속편을 쓰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래리는 가벼운 어조로 물었지만 눈동자 속 홍채가 있어야 할 자리에 파운드화 부호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해봤다.
“사실, 시기가 적절하긴 하네요. 아시겠지만 엊그제 영국 시민권을 취득했거든요.”
래리의 눈동자에서 빛나던 파운드화 부호가 더 반짝이며 빛을 내더니 살며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선생님,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셨다고요?”
“아뇨. 가지고 있죠. 영국 시민권과 미국 시민권을 둘 다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러자 래리가 갑자기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마케팅 계획이 착착 세워지고 지나치게
크지 않은 아담한 크기의 지하철 홍보 포스터가 그려지고 있었다.
“새로운 조국을 탐사하실 수도 있겠네요.”
“예전에 갔던 곳에 가서 똑같은 이야기만 쓰기는 싫고요.”
“그럼 다른 장소로 가세요.”
래리도 수긍했다. 그는 아무도 가보지 않았음직한 장소들을 검색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가령 보그너레지스 같은 곳이요.”
나는 흥미롭게 래리를 바라봤다.
“이번 주에만 보그너레지스라는 지명을 두 번째 듣네요.”
“어떤 계시가 아닐까요?”
그날 오후 집에 돌아온 나는 어디 한번 보기나 하자는 심산으로 오래돼서 너덜너덜해진 영국 지도책 『AA 컴플리트 아틀라스 오브 브리튼(AA Complete Atlas of Britain)』을 꺼냈다(얼마나 오래된 책인지 오래전에 완공된 런던 외곽 순환 도로 M25도로가 완공을 열망하는 점선으로 표시돼 있었다). 다른 것들을 다 떠나서 일단 영국에서 직선거리로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지역들이 어디인지 궁금했다. 학습서에 나와 있는 대로 랜즈엔드에서 존오그로츠는 분명 아니었다(학습서에 나와 있는 내용을 그대로 공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영국 본토에서 가장 긴 거리는 스코틀랜드 북쪽 해안에 있는 존오그로츠에서 잉글랜드 남서쪽에 위치한 랜즈엔드다. 이 거리는 1,400킬로미터다’).
지도책을 펼쳐놓고 자로 재보니 놀랍게도 자는 마치 휜 컴퍼스 바늘처럼 존오그로츠와 랜즈엔드에 비스듬히 걸쳐졌다. 자로 재어본 결과 영국을 가장 길게 잇는 직선거리 가장 위쪽 지점은 지도상 북쪽 왼편에 있는 스코틀랜드의 케이프래스(Cape Wrath)였다. 그리고 아래쪽 지점은 정말 재미있게도 보그너레지스였다.
래리가 옳았다. 이건 계시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새로 발견한 경로를 따라(이 길의 이름이 브라이슨 길로 알려졌으면 좋겠다. 내가 그 경로를 발견했으니까!)
브라이슨 길은 내게 ‘테르미누스 에드 퀨(terminus ad quem)’ 즉 도달점이 될 것이다. 그 길을 따라가되 가급적 전에 여행하며 방문했던 곳들은 피할 것이다. 길모퉁이에 서서 마지막으로 왔을 때보다 얼마나 더 나빠졌는지 투덜거리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편견 없이 새로운 시각으로 여행지를 보기 위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여행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나의 두 번째 영국 탐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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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2빌 브라이슨 저/박여진 역 | 21세기북스
우리에게 신비로우면서도 낯선 영국 이야기를 맛깔나게 들려주던 밀리언셀러 작가 빌 브라이슨이 이번엔 영국 시골 마을로 여행을 떠났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여행의 묘미인 것처럼, 그 역시 수많은 사건 사고에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고 여전히 까칠한 본성을 숨기지 못해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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