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보다 그리운 밥, 한식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하던데, 오랜 시간 집 떠나니 식욕이 고생이다.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에서는 별로 생각나지 않았던 한국 음식이었는데 스리랑카의 ‘온리 라이스앤커리’를 겪으며 한식 욕구가 폭발했다. 그리하여 이번 열일곱 번째 상은 여행 중 한식 한상.
글ㆍ사진 윤곱
2016.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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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시작한 지 80일이 지났다. 그동안 다닌 나라에서는 다양한 음식들을 즐기느라 한국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나 보다. 하지만 스리랑카의 단순한 음식들을 먹다 보니 자연스레 한식이 먹고 싶어졌다. 그 시작은 아마 고산지대였을 것이다.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날씨에 뜨끈하고 칼칼한 국물이 당겼다. 칼국수, 순두부찌개, 콩나물국밥 등등.. 다양한 요리가 떠올랐지만 현실적으로 난 라면을 꿈꾸기 시작했다. ‘아.. 지금 누가 나에게 라면 한 냄비를 끓여준다면 5만원이라도 줄 수 있을 거 같아’라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2주일 정도를 지내니 내 증상은 중증이 되었다. 수도 콜롬보에 잠깐 머물면서 스리랑카에 딱 하나 있는 한인 슈퍼를 가보기로 했다. 온도 36도 습도 80%를 넘는 날씨에 남편과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G지도를 길잡이 삼아 찾아갔다. 눈에 불을 키지 않았으면 모른 척 지나갈뻔한 숨겨져 있던 작은 슈퍼. 드디어 발견한 다양한 한국 라면들! 5개들이 한 팩에 1,200루피, 약 10,000원. 한국 가격의 2배가 넘는다. 세금 때문에 비싸다는 사장님의 말씀에 그래도 괜찮다면서 당장 구입해서 호스텔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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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디 더웠던 콜롬보의 날씨. 하지만 그리운 맛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좌충우돌 라면 조리기

 

호스텔의 공용 주방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아주머니의 의심쩍은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냄비를 찾아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려놨다. 물이 끓자 수프와 면을 넣었다. 이런 상황에서 채소나 달걀을 물어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보글보글 2분 끓이니 라면 완성! 당장 먹을 준비를 해서 식탁이 있는 거실로 나갔다. 수많은 서양인들 사이에서 라면을 후루룩 쩝쩝하려니 약간 민망했지만 잠깐이었다. 순식간에 면을 흡입한 우리. “아.. 세 개 끓일걸..”이라는 남편의 말이 너무나도 공감됐다. 찬밥이 있는 눈치여서 물어보려고 했지만 아주머니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그냥 참고 국물과 건더기까지 모두 마무리하고 올라왔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세 개의 라면.

 

다음 행선지인 동쪽 해변 트링코말리에서 스노클링을 하고 먹기로 다짐하며 가방에 고이 싸서 이틀 뒤 출발했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피죤 아일랜드라는 곳으로 배 타고 들어가 스노클링을 3시간 가까이했다. 온몸이 빨갛게 익었고 라면을 향한 우리의 열정도 활활 타올랐다. 이번엔 숙소에 부탁해 일정 금액을 내고 주방을 사용하기로 했다. 작은 채소가게에 가서 라면에 넣을 만한 야채들을 살펴보았다. 양파 두 개와 풋고추 하나, 토마토 몇 알을 사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장이 우리의 요리에 관심을 보인다. 물을 올리고 수프와 면을 넣고 토마토와 양파도 적당한 크기로 썰어 넣었다. 혹시나 해서 달걀을 물어보니 하나 남았다며 흔쾌히 준다. 역시 묻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문은 열리는 것인가. 식탁에 라면을 두고 먹기 시작했다. 때는 오후 1시. 인도양의 태양이 내리쬐는 시간. 푹푹 찌는 날씨에 팍팍 삶은 라면을 먹자니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쏟아진다. 휴지로 땀을 슥슥 닦아내며 칼칼한 맛에 대한 그리움도 같이 닦아냈다. 그렇게 우리의 라면 5개는 일주일도 안돼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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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링코말리에서 라면 한 상. ‘5개 한 팩 말고 종류별로 살 걸’이라는 후회가 남았지만 정말 맛있었다.

 

 

한식 별천지, 웰컴 투 포카라

 

며칠 후 우리는 네팔로 오게 되었다. 카트만두에서의 하룻밤을 보내고 포카라로 입성! 2번의 장기 버스와 2번의 비행의 여독을 풀기 위해 며칠간 쉴 계획을 세웠다. 숙소를 찾기 위해 골목을 들어선 순간 낯익은 글자들이 보인다. 이것은! 한식당!! 포카라에 한국 식당이 있는 건 들었지만 이렇게 쉽게 찾으리라곤 생각지 못 했다. 숙소를 정하고 짐을 풀고 거리 구경을 나왔다. 여기저기 보이는 한식당들. 네팔 전문가 ㅎ님의 말에 따르면 포카라엔 10여 개가 넘는 한식당이 운영 중이라고 한다. 80여 일간 여행하며 본 한식당의 수보다 하루 동안 본 포카라의 한식당 수가 훨씬 많다. 그날 저녁 우리는 우선 김치찌개를 먹어보자며 숙소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역시 한국인은 해외에 나오면 김치와 라면만 찾는 것이 분명하다. 메뉴판이 모두 김치OO이고 XX라면이다. 그중 꽁치김치찌개를 시켰다. 네팔 아저씨가 창문 넘어 주방에서 무언가를 송송 썰어 넣으신다. 그리고 나온 밥과 찌개. 한술 뜨니 시큼 매콤 익숙한 맛이 입안을 가득 메운다. 회사 점심시간에 몰려가 시켜 먹던 백반집의 맛이다.

 

사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내가 이렇게 한식당을 보면 반가워할지 몰랐다. 숙소마다 공용 주방시설이 잘 갖춰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무언가를 먹고 싶으면 만들어 먹으면 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남아의 숙소들은 대부분 공용 주방이 없었다. 『엄마, 결국은 해피엔딩이야!』에는 엄마와 같이 여행을 떠난 아들이 여행 중반이 지난 후 카우치 서핑을 하면서 비빔밥을 만들어서 집주인과 같이 먹고 문화도 나누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물론 음식이 현지인과의 문화교류에 큰 역할을 하긴 하지만 아들과 엄마는 라면을 끓여 먹고 고추장으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으면서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기운도 내진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에게 그리운 건 집이라는 장소보다 내가 원하는 맛을 만들 수 있는 부엌, 내가 좋아하는 맛을 내어주는 식당과 카페이다. 역시 집보다 그리운 건 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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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치김치찌개와 밥으로 단출한 한 상. 처음엔 양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먹고 나니 그런 게 아니었다.

 

 

(부록) 남편의 상: 네팔 돼지의 비밀

 

안녕하세요. 사실 여편님과 달리 한식에 대한 갈망이 별로 없는 남편입니다. 여편님이 꽁치김치찌개를 시킬 때도 전 그냥 일본식 제육덮밥을 시켜 먹었습니다. 그래도 네팔에 오니 행복한 것은 돼지고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스리랑카에선 돼지코 한 번 못 봤습니다. 꽁치김치찌개를 먹은 다음 날, 우리가 향한 곳은 포카라에서 가장 맛있다고 추천받은 한식당입니다. 식당에 가서 다른 메뉴는 볼 것도 없이 삼겹살 2인분을 시켰습니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거쳐가서 그런지 네팔 종업원은 테이블에서 구울 것인지를 먼저 물었습니다. 잠시 뒤 불판과 고기, 쌈 채소에 밑반찬까지 삼겹살 한 상이 차려졌습니다. 적당히 익은 김치와 마늘도 함께, 불판에 고기를 지글지글 굽습니다. 여기까진 너무나 익숙합니다. 잘 익은 삼겹살에 된장을 살짝 찍어 먹어봅니다.

 

고기살이 약간 질긴 것이 한국에서 먹는 삼겹살과는 좀 다릅니다. 기름기가 많지만 쫀득쫀득하고 눅눅하지 않습니다. 조심스레 이 넓은 산골에서 자유롭게 자란 네팔 돼지가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여편님은 말도 안 된다며 웃습니다. 역시나 사장님께서 네팔 돼지는 방목을 하기 때문에 좀 더 질기지만 오래 구우면 맛이 좋다고 합니다. 30년간 돼지의 고장 제주도에서 부지런히 돼지를 먹은 보람을 느꼈습니다. 영화 『푸드주식회사』를 통해 가혹한 집단 사육과 도축의 현장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바다 건너 미국의 이야기지만 우리가 주로 먹는 동물들의 현실도 비슷합니다. 스리랑카와 네팔에선 개는 물론이고, 소와 닭, 염소들이 골목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닙니다. 같은 가축이지만 이런 동물들에겐 나름 일과도 있고 사교 모임도 있어 보입니다. 조금 덜먹더라도 동물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생활하면 우리도 그 자유와 행복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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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쌈, 밥, 김치 네 박자를 다 갖춘 삼겹살 한 상, 둘이 2인분만 시켜도 배가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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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결국은 해피엔딩이야! 태원준 저 | 북로그컴퍼니
두 모자의 유럽 여행이 아시아 여행과 가장 다른 점은 현지인의 집을 찾아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며 온몸으로 현지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카우치서핑’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카우치서핑’은 전 세계 배낭여행자들의 비영리 커뮤니티로, 무료 잠자리 제공이 기본 콘셉트이지만 국경을 초월한 새로운 우정 만들기가 주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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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 #밥 #스리랑카 #라이스앤커리
3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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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j314

2016.04.15

근데 왜 호스텔 아주머니는 라면 끓여 먹는것에 대해 불편해 하셨을까요? 냄새가 싫은건가?? 역시 나가면 라면이 땡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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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2016.04.15

매일 한끼 이상 한식을 먹고 있는 저조차 사진을 보니 군침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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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귤

2016.04.14

외국나가면 한식이 그렇게 땡긴다고하던데 진자 꿀맛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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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곱

무리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