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번째 문제. 편지로 주고받는 대화
<문제>
폴 오스터와 J. M. 쿳시의 서간집 『디어 존, 디어 폴』에는 (편지 역시 일종의 대화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대화가 등장한다. 다음 대화를 읽고, 빈칸에 어울리는 말을 고르시오.
한 사람의 허구의 세계에 휴대전화가 있는지 없는지는 사소한 문제가 아닐 것 같습니다. 왜냐고요? 과거와 현재, 소설의 역학 중 상당수가 등장 인물들에게 정보를 이용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든가, 그들이 정보를 이용하지 못하게 한다든가 사람들을 같은 방에 모이게 하거나 떨어져 있게 하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이지요. 갑자기 모두가 서로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면 - 말하자면 전자기기로 접속한다면 - 극적 구성은 다 어떻게 될까요? 이미 영화에서는, 왜 인물 A가 인물 B에게 말하지 못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틀에 박힌 구성 방식들이 적용되는 것을 익숙하게 봅니다 (택시에 전화기를 놓고 내렸다든가, 산에 가로막혀 전화기 전파가 잘 안 잡힌다든가). 그런데 이제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A가 항상 B와 연락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 당연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모두가 언제나 다른 모두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내일의 소설에서는 특정 허구의 세계에서 모두가 다른 모두에게 연락을 취할 수 없다면, 그 허구의 세계는 과거에 속한다는 규범이 생기게 될까요? (J. M. 쿳시가 폴 오스터에게 보낸 2011년 3월 14일의 편지 중에서)
저 또한 노트북을 저버리기는 했지만, 제가 21세기에 쓴 다른 소설에는 컴퓨터와 인터넷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저는 현실주의자니까요! 지나간 옛날을 그리워할 때도 있고 (음반 가게, 대궐 같던 영화관, 어디서나 허용되었던 흡연), 저녁 식사를 함께하던 친구들이 갑자기 말을 끊고 다들 자기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면 울적해지기도 하지만, 이 경이로운 도구에 대한 제 감정이 아무리 복합적일지라도 - 사람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 만들어졌지만 실은 종종 사람들을 따로 떼어 놓는 - 지금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이 이것이고, 저로서는 대범한 척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중략) 모두가 다른 모두에게 연락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입니다. (중략) 이 새로운 시스템에는 많은 이점이 있습니다 (특히 응급 사태나 사고가 터졌을 경우). 하지만 불리한 점 또한 만만치 않지요 (은밀한 불륜 관계들의 경우). 그러나 영화에 관해서는 휴대 전화 덕분에 한 단계 진보가 이루어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 ). (폴 오스터가 J. M. 쿳시에게 보낸 2011년 3월 28일의 편지 중에서)
1) 휴대전화로 촬영한 영상이 사건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경우가 꽤 많으니까요.
2) 문자 메시지는 영화의 플롯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영화에 휴대전화 영상을 삽입하면 화면의 톤을 바꿀 수 있습니다.
3) 휴대전화로 영상을 보는 세대들 덕분에 감독들은 더욱 화면에 민감하게 되었으니까요.
4) 이제는 아무도 담배를 피울 수 없으니까, 휴대전화가 배우들 손에 뭔가 할 거리를 주지요.
5) 영상 기술은 휴대전화 덕분에 더욱 발전하게 됐습니다. 이제는 휴대전화로도 HD 화면을 볼 수 있으니까요.
<하우스 오브 카드>의 한 장면
<해설>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시즌 2의 마지막 회에 등장한다. (워낙 많은 사람이 본 작품이니 짤막한 스포일러는 괜찮겠지?) 대통령에게 회심의 일격을 가하기 위한 편지를 쓰던 프랜시스 언더우드는 만년필을 내려놓고 벽장 속에 있던 타자기를 꺼낸다. (언더우드 타자기다!) 프랜시스는 적의 심장에 칼을 내려꽂듯 타자기로 거짓된 고백을 찍어낸다. 종이 위에 찍힌 글자들은 모두 거짓말이지만, 거짓말로 된 단어들이어서 강력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끔찍한 추억들까지 꺼낸 프랜시스는 결국 대통령을 굴복시킨다. 만년필이 아닌 타자기로만 가능한 전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손으로 쓴 글씨는 친근해 보이지만 타자기로 쓴 글씨는 어딘지 모르게 엄격해 보인다. 컴퓨터로 쓴 글을 프린트한 것과도 느낌이 다르다. 타자기로 쓴 글에서는 한 글자 한 글자 직접 ‘때려 박아’ 넣은 게 느껴진다. 타자기 마니아인 소설가 폴 오스터는 자신의 책 『타자기를 치켜세움』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조용한 올림피아 타자기가 더 좋았다. 그 타자기는 터치 감이 좋았고 다루기에 수월했고 믿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키보드를 두드리지 않을 때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중략) 오래되어 낡고 시대에 뒤처진 고물, 기억으로부터 빠르게 사라져 가는 시대의 유물인 이 타자기는 내게서 떠난 적이 없었다. 우리가 함께 지낸 9천4백 일을 돌이켜보는 동안에도, 이 놈은 지금 내 앞에 앉아서 오래되고 귀에 익은 음악을 토닥토닥 내보낸다. 주말 동안 우리는 코네티컷에 와 있다. 여름이다. 그리고 창문 밖의 아침은 따갑고 푸르고 아름답다. 지금 타자기는 주방 식탁 위에 있고 내 손은 그 타자기에 놓여 있다. 한 글자 한 글자씩, 나는 그 타자기가 이런 단어들을 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폴 오스터는 마치 타자기가 살아 있는 생명체인 것처럼 묘사한다. 자신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타자기가 쓰는 것을 지켜보는 것처럼 묘사한다. 타자기의 구조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하다. 가지런히 정열된 키보드는 동물의 이빨 같고, 문자를 품고 있는 세그먼트들은 출격을 기다리고 있는 박쥐 군단 같다. 키보드에 손을 얹고 있으면 강렬한 긴장감이 온몸으로 전해온다.
요즘은 거의 타자기를 쓰지 않는다. 연필이나 펜으로 쓰는 작가, 컴퓨터를 사용하는 작가는 많지만 타자기를 사용한다는 작가는, 적어도 내 주변에는 없다. 타자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컴퓨터의 발전 때문이었을까? 내 생각엔 타자기가 ‘지나치게 존재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타자기는 인쇄소 앞에서 글을 쓰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신의 글이 책으로 출판될 수 있음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다. 타자기를 쓰기 위해서는 그 압박감을 견뎌야 한다. 소설가 이언 매큐언은 타자기에서 컴퓨터로 옮겨 가며 이런 말을 했다.
1980년대 중반에 저는 다행스럽게도 컴퓨터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워드프로세싱은 내면적이어서 생각하는 것 그 자체에 더 가까웠어요. 돌이켜보면 타자기는 엄청난 기계적 방해물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컴퓨터 메모리에 저장된 인쇄되지 않은 자료의 잠정적인 상태를 좋아합니다. 마치 아직 말하지 않은 생각처럼 말이에요. 저는 문장이나 문단이 끊임없이 수정되는 방식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믿을 만한 기계가 당신이 적어놓은 사소한 것들까지 모두 기억해서 알려주는 그런 방식을 좋아합니다. 물론 이 기계는 부루퉁해져서 작동을 멈추기도 하지요. (「파리 리뷰」 이언 매큐언의 인터뷰 중에서)
두 소설가의 상반된 견해다. 폴 오스터의 작품 세계와 이언 매큐언의 작품 세계를 비교해보면 타자기와 컴퓨터 차이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
타자기나 컴퓨터만큼 소설에 깊은 영향을 끼친 것이 휴대 전화다. J. M. 쿳시와 폴 오스터는 휴대 전화 때문에 소설 쓰기가 얼마나 힘들어졌는지 편지에 적고 있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보았을 고뇌다. 지금은 플롯을 짜기가 힘든 시대다. 어디에나 CCTV가 있기 때문에 목격자가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힘들다. 어디에나 휴대전화가 있기 때문에 소식을 뒤늦게 전할 방법이 없다. 휴대전화가 꺼져 있거나 갑자기 망가지거나 통화가 불가능한 지역으로 주인공을 보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읽거나 영화를 보다가 조금이라도 말이 안 되는 장면이 등장하면 “저게 뭐야, 그냥 전화하면 되잖아.”라고 외칠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타임머신을 타고 2016년에 떨어진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창작의 고통 때문에 머리카락을 쥐어뜯다 죽지 않을까? 로미오와 줄리엣은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햄릿은 휴대전화로 구글에서 죽어야 할지 살아야 할지를 검색하다 결국 칼을 쥐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셰익스피어의 모든 이야기가 엉망진창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휴대전화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시도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휴대 전화에 장착된 GPS를 통해 적들의 위치를 쉽게 알아낼 수 있으므로 이야기의 부피를 단축시킬 수 있고, 중요한 정보를 재빨리 전달하여 손쉬운 반전의 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42.195킬로미터를 달려가야 할 일은 없어졌으며, 단순한 착각이나 오해 때문에 두 사람의 운명이 영원히 엇갈릴 확률도 거의 없어졌다. 문명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폴 오스터가 타자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나 역시 휴대전화가 등장하지 않는 소설을 좋아한다. 주인공이 모든 연락을 끊고 잠적하는 이야기, 망망대해에 남겨져 아무런 연락도 하지 못하는 이야기, 고립되어 수년 동안의 일을 알지 못한 채 살아남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휴대전화가 없는 세상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대화는 즉각적이지 않다. 한 사람이 긴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 그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다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눠본 적이 얼마나 오래됐던가. 우리는 빨리 반응하고, 짤막하게 대화하고, 쉽게 결론짓는다. 편지로는 그러기가 힘들다. 『디어 존, 디어 폴』을 읽고 있으면 어느 순간 휴대전화가 없는 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휴대 전화를 잠시 꺼둔 채 나머지 부분을 읽어야겠다.
이제 정답을 풀어보자. 문제가 워낙 길어서 읽기도 쉽지 않겠지만 답은 4번이다. 폴 오스터의 이런 유머를 좋아한다. 하긴, 텔레비전 드라마만 보더라도 모든 배우들이 휴대전화를 들고 연기한다. 제품을 홍보하려는 이유인 줄 알았더니, 담배를 필 수 없어서 그랬던 거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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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소설가)
소설 쓰고 산문도 쓰고 칼럼도 쓴다. 『스마일』, 『좀비들』, 『미스터 모노레일』,『뭐라도 되겠지』, 『메이드 인 공장』 등을 썼다.
iuiu22
2016.04.07
tsy81
2016.04.04
저는 소설이 말이 안되는 비논리적인 부분이 있더라고 좋은 문장으로
좋은 묘사로 좋은 흐름으로 썼다면 ... 재미있게 읽고 좋아할 거에요.
휴대 전화가 가타부타 하는 소설은 휴대 전화 때문에 흐름이 끊기는
이유가 있겠죠. 그렇지 않은 소설들이 얼마나 많은대요. ㅇ^^ㅇ
그래서 제가 소설을 좋아하죠.
susunhoy
2016.04.01
저는 남자 주인공이 너무 선이 고와서 몰입이 잘 되는 편은 아니지만
대사가 하나하나 심쿵하게 만들어서요..ㅋㅋ
언젠가 대사를 쓰는 게 어렵다고 하셨는데..
이 드라마 작가님이 여성의 심리를 잘 아는 거 같더라고요..
연애소설을 쓰시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듯..하핫^^;
..
진짜 사랑을 하게 되면 매 순간 그 사람이 그립고 보고 싶고..
다른 사람의 시선에는 상관없이 안고 싶고 그런 가 보더라고요..^^
사랑하는 영혼은 행복하데요..늘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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