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유년 시절을 함께 했던 빨강머리 앤이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까? 광고 회사에 다니며 카피라이터로 일하는 최현정 저자는 일이 힘들고 지쳤을 때 인터넷에 빨강머리 앤을 캐릭터로 한 그림을 하나씩 올리기 시작했다. 솔직하고 유쾌한 그림과 아이디어에 사람들은 공감했고 결과는 『빨강머리N』이라는 하나의 책으로 엮어 나오게 되었다.
저자는 원작 속 꿈 많고 사랑스러운 소녀를 현실로 끌어와 달콤하고 살벌한 세상살이를 이야기한다. 직장, 연애, 꿈, 가족, 인간관계 등 삶을 장식하는 다양한 풍경들을 유쾌하게 비틀며, 이 시대 어른아이들의 낭만과 현실을 조명한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머리 앤』에 나오는 앤을 오마주해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왜 하필 빨강머리 앤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 빨강머리 앤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었어요. 그녀가 엉뚱한 생각과 낭만적인 상상을 하며 즐겁게 살던 모습을 동경한 거죠. 지금도 빨강머리 앤을 보면 어릴 때의 풋풋한 마음들이 몽글몽글 살아납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 보면, 주인공의 순수함의 상징으로 상상 속의 친구 ‘빙봉’이란 캐릭터가 나와요. 제게는 빨강머리앤이 ‘빙봉’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시절 빨강머리 앤을 볼 때의 마음이 아직까지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게 너무 다행스러워요.
제가 2년 차 직장인이었을 때의 일이에요. 이상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오기도 하고 혼자 노래 부르고 중얼중얼거리는 모습을 보고 선배 한 분이 저보고 빨강머리앤 같다고 한 적이 있어요. 저는 기억 못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말씀해주시니까 생각나더라고요. 뭔가 예정된 것이 아니었나 뒤늦게 생각해봅니다.
미대를 나와 디자이너에서 카피라이터로 보직을 변경한 독특한 이력입니다. 지금의 회사 생활을 ‘9는 고통인데 1은 짜릿’하기 때문에 그만두지 못한다고 표현하셨는데, 그 ‘1의 감정’은 어떤 때 느끼는지 궁금합니다.
디자이너에서 카피라이터로 보직을 바꾸는 분들은 많진 않지만 종종 있어요. 만약 그런 선배들이 없었다면 제가 카피라이터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했을 것 같아요. 제가 고민할 때 도와주신 선배님들이 꽤 있어요. 너무 고마운 분들이죠. 이 이유는 ‘1의 짜릿함’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연차가 낮았을 때, 아주 간혹 제가 들고 간 카피를 보고 “이 카피 괜찮다!” 말씀해주신 선배님들이 있으셨어요. 그런 말을 들으면 너무 기분이 좋아서 카피 욕심이 나기 시작했어요.
일반적으로 ‘9의 고통’은 과도한 야근, 지나친 주말 근무, 부족한 잠, 끼니를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 회의의 압박, 갑의 횡포 등이 있어요. 그런데 그 와중에, 내가 내 아이디어를 보고 스스로 기특하고 뿌듯해 한다든가(이런저런 이유로 팔지 못하더라도, 좋은 아이디어를 냈으니 괜찮다는 과정주의적인 만족이 있습니다), 너무 팔고 싶은 시안이 팔린다든가, 온에어된 CF의 반응이 좋다든가 하는 ‘1의 짜릿함’이 있죠. 정말 일이 힘든 순간은 사실 야근과 주말근무보다 이 ‘1’조차 없이 일이 진행될 때인 것 같아요. 의욕이 바닥을 치거든요.
그럼 회사생활이 아닌 빨강머리N의 작가로서의 짜릿함과 즐거움, 혹은 고통은 뭘까요? 마찬가지로 전체가 10이라면 즐거운 게 어느 정도나 될지도 궁금합니다.
회사생활에선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아요. 수많은 회의와 확인 과정이 기다리고 있고, 사람들도 다 생각이 달라요. 아이디어가 좋은 방향으로 흐를 때도 있지만, 정말 산으로 가는 경우도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빨강머리N은 다른 사람의 컨펌을 받을 일이 없잖아요. 제가 그리고 제가 쓰고 제가 결정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의 카타르시스가 있어요. 회사생활에서 충족이 안 되는 ‘내 마음이다!’ 욕구를 빨강머리N을 통해 충족할 수 있어서 좋아요.
전체 10중에 8이 즐거움이고 2는 약간의 걱정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오해를 부르면 어떡하지.’ 같은 것. 저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 어쩔 수 없어요.
책에 나오는 부장의 캐릭터와 힘들 때 맛있는 요리를 해 준 친한 친구 등은 모두 실존 인물인지 궁금합니다. 회사 사람들도 작가님의 책에 주로 나올 텐데, 주변 반응은 어떤가요?
원래 좋은 이야기는 드러낼 수 있지만, 나쁜 이야기들은 조심스러운 법이죠. 요리해준 친구는 실존인물이지만, 부장의 캐릭터는 조금 달라요. 회사 생활에서 제가 느껴온 것, 거기에 주변에서 들리는 말들과 직장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을 추가해 김 부장 에피소드를 만들어요. 딱히 김 부장을 염두에 둔 인물이 있는 건 아닙니다. 누구나 ‘직장상사’에 대한 스트레스가 존재할 거예요.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그냥 ‘직장상사라서’ 발생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어떤 상사냐에 따라 고통의 종류도 다르죠. 공감대를 얻기 위해 온갖 나쁜 특징들을 다 가진 김 부장을 탄생시켰지만, 김 부장도 불쌍한 사람입니다.
출판사 분들에겐 미안하지만 저는 사실 이 책이 주목받지 않기를 바랬어요. 괜히 오해를 살까 봐 걱정했거든요. 그렇다고 수위를 낮추자니 그건 또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재미없잖아요. 그런데, 광고회사의 좋은 점 중 하나가 있다면, 비교적 오픈 마인드고 남의 일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회사 지인들도 “책 낸 거 축하해.” 라고 많이 말씀해 주십니다. 나쁜 말은 당사자인 제 귀에 들어오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무릎을 치는 아이디어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작품을 그리는 아이디어는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메모를 많이 해요. 평소에 느끼는 것들을 다 메모해 놓고 문서로 정리합니다. 그중 “아, 이런 이야기는 꼭 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골라서 거기에 어울리는 그림과 카피를 생각합니다. 가장 반응이 뜨거웠던 것 중의 하나가 “괜찮아. 너만 병신이 아니란다.” 편인데, 누구나 가끔 ‘나 왜 이러지. 병신인가.’ 라는 생각을 하지 않나요? 그럴 때 무너진 나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괜찮아. 잘 될거야.’ 라는 생각으로 억지로 기운을 내기보다 ‘괜찮아. 남들도 다 그래.’ 라고 생각하는 쪽이 저에겐 오히려 위로가 되더라고요.
밸런타인데이에 올린 ‘가나 초코렛 패러디’편은, 가나 초콜릿 광고를 보다가 화가 나서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깊고 진한 그리움’이라니! 그리울 것이 없는데!!! 그래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깊고 진한 외로움’으로 패러디했습니다.
책 내용의 절반이 야근과 철야와 주말근무인 것 같습니다. 건강은 괜찮은가요?
괜찮지만 괜찮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진 저도 잘 모르겠는데, 제가 건강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이젠 자신이 없습니다. 정신적 고통이 극한에 달하면 몸에서 반응이 와요. 한 번은 정말 극한의 스트레스가 연이어 있었는데, 그게 두피로 올라온 적이 있어요. 머리를 아무리 감아도 찐득찐득하게 기름 범벅이 되는 지루성 피부염이었어요. 충격적이었어요. 대머리 아저씨들과 함께 병원에 앉아있는데 ‘나 뭐 하고 있는 거지.’라고 생각했어요.
몽고메리의 『빨강머리 앤』은 소녀시절뿐만 아니라 후속 시리즈에서 앤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중년이 되기까지의 삶이 펼쳐집니다. 앞으로 빨간머리N도 계속될까요? 작가님의 계획과 빨간머리N의 미래를 마지막으로 알려주세요.
지금까지는 1일 1 포스팅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그게 안 될 때도 있을 겁니다. 저에게 생업은 무엇보다 1순위거든요. 어쩔 수 없이 일이 너무 바빠지면 안 그릴 겁니다. 직장생활은 저에게 월급을 주지만, 포스팅이 밥을 먹여주진 않거든요. 그래도 꾸준히 뭔가를 할 생각이에요. 직장생활과 병행하려다 보니 가장 쉽고 빠르게 그리기 위한 방법으로 1컷 툰을 그리고 있는데, 어떤 분들은 4컷 만화로 그려달라고 하시기도 합니다. 저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가끔 그런 포스팅도 만들어 볼까 해요. 최근에 네이버 미리 보기 연재 포스트에 누가 이런 댓글을 달아주셨어요. 빨리 결혼해서 직장맘의 애환을 담아달라고.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근데 일단 결혼부터…. 눈물 좀 닦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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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N최현정 저 | 마음의숲
이 책은 인생의 모든 희로애락을 담고 있다. 강하고 성숙한 어른이 되고 싶지만 아직은 나약한 아이로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혹은 꿈 많고 순수한 아이로 남고 싶지만 이미 현실과 타협한 어른이 되어버린 모두의 이야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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