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4일, 어제는 화이트데이였다. 이화여자대학교 앞에 가면을 쓴 남자 세 명이 나타났다. “여시 vs 판 vs 메갈. 언냐들 사탕 못 받을 거 알고 우리가 준비했어.”라고 쓰인 피켓과 함께 사탕을 나눠주는 알 수 없는 행동은, 황당하게도 마케팅으로 추정된다. 피켓 아래쪽에 앱 이름과 “D-5”라는 카운트다운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사탕 못 받을 거 알고”라는 말이다. ‘여시, 판, 메갈’은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의 ‘표상’이다.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나 혐오적 속성을 이 세 커뮤니티 중 하나의 사용자로 상상하고 압축한다. 여성들은 마치 사상 검증처럼, “너 여시야? 판녀야? 메갈이야?”라는 질문과 맞닥뜨린다. “사탕 못 받을 거 알고”라는 말은 이 세 커뮤니티를 하는 여성은 ‘사탕을 못 받는’다는 뜻이다. 정리하자면 “여시 or 판 or 메갈 유저” = “인기 없는 여자”가 완성된다. 그리고 이는 매우 익숙하고 진부한 도식이다.
출처_원더걸스
나는 오랫동안 ‘이성에게 인기가 없다’는 말이 모욕이 되는 메커니즘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페미니스트를 ‘남자들한테 인기가 없어서’, ‘줘도 안 먹는 X’이라고 비하하는 것은 거의 만국 공통 수준이고, <계간홀로>를 만들다 보면 “그러니까 인기가 없지”, “인기가 없으니까 이런 거나 만들고 있지.” 같은 말을 종종 듣는다. 인기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이때는 반드시 ‘이성에게’로 한정된다. 아이들에게, 어른들에게, 직장 동료에게 인기가 없다는 말은 이만큼 파괴력이 크지 않거니와 사용 빈도도 낮다.
쌍욕이나 음담패설 같은 일차적인 욕설이 아니라 어떤 사실의 적시가 모욕이 되려면 몇 가지 단계가 필요하다. 우선 ‘사실’을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합의. 더 중요한 것은 발신하는 사람이 ‘이 공격으로 상대방에게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점이다. 이 핀트가 어긋나면 백날 발신해봐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별 타격이 없다. 예를 들면, 자신이 ‘대머리’인 것을 개미 똥구멍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에게 “너 머리가 휑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무례한 일일지언정 모욕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인기가 없다’는 말은 어떻게 모욕이 될까?
두 가지 이유를 추정해볼 수 있다. 첫 번째, 이성을 연애의 대상으로만 볼 때. <계간홀로>가 지속적으로 ‘연애 만능주의’, ‘연애밖에 모르는 사랑꾼 세상’하고 말하는 것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이는 오로지 상대방의 가치를 연애 가능/불가능 여부로 판단하기 때문에 일상적인 성적 대상화가 전제된다. 이는 이성애자 중심의, 불특정 다수가 섞인 집단에 가면 좀 더 명료하게 체험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일차적인 스캔을 통해 나이와 외모를 기준으로 잠재적 연애대상과 아닌 사람을 구별하고 그에 따라 상대방을 어떻게 대할지 결정한다. 이런 관점은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느냐’며 모든 관계를 썸이나 연애의 틀에 욱여넣기 때문에, 연애 가능성이 없는 대상은 사형 선고를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자신도, 타인도, 연애 시장에서의 가치와 매력이 가장 중요해진다.
이렇게 기승전연애, 기승전인기의 고속열차를 타면 정치적 퍼포먼스를 하는 여성에게 ‘얼굴이 예쁜데 개념도 있다, 사귀고 싶다.’ 같은 망언을 하는 훌륭한 프로 헛소리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것이 세상의 보편적 감수성이고, 당연히 연애 대상으로서 탈락하는 것은 강도 높은 욕이 된다. ‘남심을 저격’하고자 무릎 화장법까지 등장하는 세상에서, 여성들에게 이 욕은 유효할 수밖에 없다. 성적 대상화되지 않는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비-여성이며, ‘사귈 가능성’이 사라진 여성은 금방 존중과 ‘배려’의 울타리 밖으로 튕겨 나간다.
두 번째는 첫 번째와 관련 있으면서도 조금 층위가 다르다. 이것은 잠재적 연애 대상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원인이 빈약한 연애 경험에 있는 것으로 추정될 때 조롱의 의도로 쓰인다. 가령 남자친구에게서 명품백을 뜯어내려는 ‘여자친구’를 욕하면서 명품의 가격을 터무니없이 책정한다거나, 섹스 ‘썰’을 풀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할 때 “너 안 해봤지?”, “너 인기 없지?” 같은 말들이 등장한다. 앞서 짚어본 것과의 연장 선상에서, 연애는 이제 능력과 가치의 절대적 척도가 되었다. ‘(이성에게) 인기 없음’은 그 자체로 단번에 개인의 외모, 경제적 능력, 대인 관계 기술 등을 후려치는 무능력의 상징이다. 이 과정에서 ‘부재’는 ‘결핍’이 된다. 연애가 너무 중요한 가치이다 보니 인기가 없는 것은 대재앙인데, 그 사실을 인정하기란 너무나 고통스럽다. 이 원인을 바깥에서, 타인에게서 찾으려고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나를 안 만나주는 너희가 나빠! 이러한 맥락에서 가상의 적을 만들고 욕할 때, ‘인기 없음’은 ‘적대감’으로 변질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만연한 여성 혐오의 원인 중 하나로 이 연애지상주의를 꼽는다. 인기 없는 것이, 연애를 못 하는 것이 그렇게 큰 사건이 아니라면, 이 사실에 고통받거나 모욕을 느끼는 이들도 줄어들 것이고, 억지로 구애하거나 전전긍긍하거나 만나주지 않는 대상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기보다 각자도생하며 눈누난나 살기 쉬워질 텐데 말이다.
인기 있다는 말은 연애 대상으로서 여러 사람에게 어필한다는 뜻이다. 자신을 연애 대상으로 바라보고 구애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나는, <계간홀로>는, 이성에게 끄는 인기를 당연히 좋은 것, 누구나 원해야 하는 것, 없으면 웃픈 것으로 제시하는 데 반대한다. 부재를 결핍으로 환원하는 사고방식을 거부한다. <계간홀로> 7호에서 철벽 꿀팁을 다루면서 “연애를 하고 싶은 욕망보다 ‘굳이’ 연애의 대상으로 분류되기 싫은 마음이 더 큰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기가 많으면 호감을 느낀 이들이 잘해줘서 살기 편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마음에 일일이 보답해줄 수 없다면 오히려 그것은 일상적 재앙으로 작동한다. 얼마 전 뜬 연합뉴스 기사를 보니 20-30대 여성이 혜택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참 많던데, 그 혜택 중 하나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구애하는 남성에게서 받는 호의나 공짜 밥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조금만 실체에 다가가면, 이러한 ‘인기’와 ‘내가 원치 않는 잠재적 연애 대상화’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알 수 있다. 일반적인 통념보다 주변을 둘러보는 편이 더 빠를 듯? 아니 왜, 안 예쁘고 인기 없으면 몰카도 스토킹도 성폭력도 안 당한다면서요. 평범한 여자도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데, 그럼 예쁜 여자의 삶은 진짜 극한직업 아님?
많은 혐오와 차별적 이미지는 넘치는 ‘카더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고 의심해보는 것만으로도 대다수를 해소할 수 있다. <계간홀로> 8호에서는 이러한 주제로 <만나봤습니다, 예쁜 여자> 인터뷰를 진행했으니 관심 있으신 분은 찾아보시길. (자꾸 잡지 홍보하는 것 같아서 조금 수줍지만 원래 독립출판물은 마케팅도 본인이 직접 해야 한다)
인기 있으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할 확률이나,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될 가능성이 커지니 소위 말하는 ‘솔로 탈출’이 용이하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관관계 정도이다. 인기가 많으면 연애한다는 사고방식은 무수한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골라잡는 형식으로 연애를 이해하거나(이 경우 ‘인기 많은’ 주체의 욕망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구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 할 리가 없다는 고정관념을 기반으로 한다. 인기가 많은 사람만이 연애하는 것은 아니며, 연애는 그 사람의 ‘인기 많음’을 입증할 수 없다. 또한 이성에게 인기가 없다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열등함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내가 ‘자발적 솔로’라는 표현을 지양하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자신이 비연애를 ‘자발적으로’ 선택한다는 주장은 ‘인기가 없는’ 비자발적인 솔로와의 구별 짓기, 나아가 계급을 형성하려는 욕망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끄는 매력은 멋진 재능이다. 그러나 인기가 없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니며 좌절하거나 낙담할 필요도 없다. 사람마다 어필하는 대상이나 매력의 장르는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남자에게 인기가 없다. 이렇게 말하면 더 없어 보인다고 질색하거나 ‘웃프다’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딱히 포장하거나 돌려 말하고 싶지도 않다. 내게는 전혀 창피하거나 웃픈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똑같이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갖춰 대하지만, 소위 말하는 ‘끼를 부리’고 ‘케미’를 일으키는 재능은 내 것이 아니다. 내가 약간 케미 박멸자다. 연애계의 세스코 정도? 케미 분야에 뛰어난 사람은 아마 내가 가진 재능이 없을 것이다. 나는 아이와 어르신 킬러다 후훗. 이성에게 인기 없다는 말은 여전히 효과적인 모욕으로 작동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무슨 왕한테 승은을 입는 것도 아니고, 누가 좋아해 주거나 욕망하는 게 뭐 그리 큰 벼슬이라고?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까지 사양하지 말란 말. 그냥 각자 갈 길 가자.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연애 대상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갖추지 않거나 험담만 하면서 “XX녀들이 보는 눈이 없어서 그렇지, 나는 보면 볼수록 진국이야!”라고 억울해하는 것은, 기억하자, 인지 부조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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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송
비연애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 발행인. 문충이(文蟲)가 되고 싶은 그냥 식충이. 뭐든지 재미 있어야 하지만 재미의 기준은 내 마음. 읽고 쓰고 덕질합니다.
봄봄봄
2016.08.09
tosu
2016.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