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대법관 김영란, 열린 법을 말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다스림을 당하고, 또한 다스리는 주체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골고루 의견을 표현할 수 있게 하려고 노력하고, 특히 소수자들의 의견을 보호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가 더욱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글ㆍ사진 김보경(예스24 대학생 리포터)
201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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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3일, 가톨릭 청년회관 5층에서 청소년들에게 전하는 법 교양서 『김영란의 열린 법 이야기』 출간 기념 북토크가 열렸다. 우리나라 사법사상 최초의 여성 대법관으로 알려진 김영란은 대법관 시절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판결들을 많이 내려 ‘소수자를 위한 대법관’이라 불리기도 했다. 현재는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 와 같은 저서를 쓴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북토크 1부는 ‘정의로운 법’, 2부는 ‘참여하는 법’을 주제로 진행되었다. 사회자이자 대담자로 김만권 정치철학자가 함께 자리했다.

 

 

1부 정의로운 법

 

김만권: 『김영란의 열린 법 이야기』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법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쓴 책입니다. 청소년을 위한 책이니, 김영란 선생님의 청소년 시절이 궁금해집니다. 선생님께서 그 시절 읽으신 책들은 무엇이었나요?

 

김영란: 고등학생 때는 책을 열심히 읽던 학생이었습니다. 주로 소설을 많이 읽었는데요. 그때 읽었던 소설들을 이 책을 쓰면서도 많이 인용했습니다. 『돈키호테』『동물농장』과 같이 그 시절 읽었던 책들이 이 책을 쓸 때 큰 힘이 된 것 같습니다.

 

김만권: 청소년을 위해 책을 집필하시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김영란: 사람들은 법이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많은 법이 정해져 있고, 헌법도 고치기 어렵게 되어있긴 하지만, 법에 담겨 있는 정신이나 법의 방향성은 민주주의하에서 우리 모두의 참여와 선택으로 발전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소년들이 이 사회를 어떻게 좋은 사회로 만들어가야 할 것인가, 어떤 법이 더 필요하고 어떤 것들이 더 수정되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토론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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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법의 의미

 

김만권: 방금 해주신 말씀이 책 제목에도 쓰인 ‘열린 법’의 의미와도 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이를 설명해주세요.

 

김영란: 법은 입법하는 과정, 집행하는 과정, 판결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도 모두 열려있습니다. 입법하고 집행하고 판결 내리는 사람들은 특히 사람들의 생각을 읽고, 관념적 법 공동체를 계속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법이 열려 있지 않으면 사람들의 생각과 동떨어져 있는 입법, 집행, 판결이 이루어지며 법의 효력이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김만권: 이 책에서도 강조하는 것이 법과 상식(common sense)이 맞아야 한다는 것인데, 상식이 언제나 좋은 상식(good sense)은 아닐 것입니다. 어떻게 상식과 호응하는 법이 정의로운 법이 되나요?

 

김영란: 저도 상식이 무조건 좋은 상식, 나아가 열린 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어보면, 말썽만 피우고 돌아다니던 허클베리라는 아이는 어느 날 짐이라는 흑인 노예와 함께 살게 됩니다. 그 당시 노예는 재산의 하나였으므로, 허클베리는 남의 재산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상식에 따르면 허클베리는 재산권을 침해하고 있으니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좋은 상식이라고 할 수 없겠죠. 이렇게 상식에 따라 법을 만들어 간다고 할 때, 그것이 좋은 상식이 아닌 경우가 생깁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소수자의 의견을 자유롭게 발현하게 하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상식을 좋은 상식으로 접근하게 나가게 하는 것도 역시 열린 법이라고 해야겠습니다.

 

 

법이 추구하는 가치와 헌법

 

김만권: 선생님께서는 놀랍게도 이 책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을 30페이지에 걸쳐 요약을 해주셨습니다. 샌델은 정의를 얘기할 때 세 가지 입장이 대립한다고 봅니다. 각각 고통을 피하고 행복을 택한다는 효용,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에게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권리, 마지막으로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세 가지 요소 중 무엇을 가장 중시하시나요?

 

김영란: 각각을 공리주의, 권리주의, 공동체주의적 입장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제 생각에는 세 가지 요소의 중요성이 각각의 사례마다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어느 하나만이 우선적일 수는 없습니다. 일전에 호주제가 폐지된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황에서 어머니와 대학생인 딸과 남자인 갓난아이 셋 중 누가 제사 주재자가 되어야 하냐가 문제가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다수 의견은 가족 간에 협의해서 정하되, 협의가 안 되면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반대를 했습니다. 이를 남녀차별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다수 의견은 공동체의 미덕을 중시하는 것에 기반을 뒀는데, 저는 이를 남녀차별로 보고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려고 했던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김만권: 선생님께서 내린 판결들을 보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권리주의적 입장에서 내린 판결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김영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한 마을에서 어느 건물의 지하에 어린아이가 갇혀서 살고 있습니다. 소설에서는 그 아이를 거기에 가둬놔야 마을 사람들이 행복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설정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그 아이를 불쌍해하긴 하지만, 행복을 누리고 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내용인데요. 효용의 입장에 선다면 다수의 행복을 택하겠지만, 그 상황을 참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었죠. 다수자가 얻는 행복이 아니라 소수자가 잃어버린 권리를 생각할 때, 특히 그것이 그 사람의 본질에 관련한 것이라면 단지 총량만을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만권: 선생님께서는 법이 추구하는 최상의 가치는 정의이고, 그 원칙을 담고 있는 그릇이 헌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헌법이 정의를 실현하는 데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영란: 헌법도 개념이 바뀌어왔습니다. 근본 규범이란 내용은 없는 최상위 규범을 뜻합니다. 그런데 2차 대전 당시 불법이 자행되는 상황을 목격하며, 추상적인 근본 규범으로는 안 되겠다 하여 근본 규범에 실재성을 담게 된 것이 헌법입니다. 그래서 헌법을 기준으로 헌법 정신에 맞는 하위 법을 만듭니다. 그런데 헌법의 정신에 무엇을 담을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국민입니다. 우리가 헌법 정신을 선택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비록 어려운 절차이긴 하지만 우리가 개정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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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참여하는 법

 

김만권: 2부에서는 ‘참여하는 법’이라는 다소 낯설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정의로운 법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왜 참여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지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김영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스리는 사람과 다스려지는 사람이 같습니다. 다스려지는 사람, 즉 다스리는 사람 모두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게 됩니다. 특히 소수자들의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보호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도 중요합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사람들이 모두 참여해서 조금씩 더 정의로운 사회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스림을 당하기도 하지만 다스리는 주체로서 사회에 참여하고, 모든 사람이 골고루 의견을 표현할 수 있게 하려고 노력하고, 특히 소수자들의 의견을 보호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더욱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에 참여하는 방법과 공론장의 중요성

 

김만권: 그렇다면 일반 사람들이 법에 참여하는 구체적인 방법에는 무엇이 있나요?

 

김영란: 사회는 점차 고학력 사회, 인터넷 사회가 되어가는데 대의민주주의는 과연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는 질문은 우리 사회가 당면한 중요한 문제입니다. 투표를 한다거나 직접적인 절차를 통해 입법하고 개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터넷에서 공론장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 눈여겨볼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공론장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 깊이 토론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알고 자기 생각을 피력하는 시민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공론장의 활성화, 그 안에서의 참여가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발전된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이를 어떻게 활용하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는 젊은 세대가 고민하고 이끌어가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만권: 마지막으로 청소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김영란: 이 책을 쓰면서 중간중간 강조했던 것은 플라톤이 그 시대에 왜 그러한 정의를 주장했는지, 로크는 그 시대에 왜 사회계약설을 주장했는지 등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 시대에 부닥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그런 사상들을 끌어낸 것이죠. 우리는 지금 그들의 사상을 끌어와 우리 사회를 설명하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기도 합니다. 이 책이 현대의 법사상에 대해서 다루고 있지 않은 이유는 청소년 여러분들이 스스로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지금 여기를 고민하는 이 시대의 플라톤과 로크가 나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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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의 열린 법 이야기김영란 저/어진선 그림 | 풀빛
2004년 우리나라 사법사상 최초로 여성 대법관에 임명되어 닮고 싶은 여성 전문가로 떠오르고,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한 김영란이 청소년을 위해 2년 동안 준비해 엮은 법 교양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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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예스24 대학생 리포터)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좋은 글을 읽고, 좋은 책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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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1956년 부산 출생. 서울대 법대 재학 중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81년부터 판사로 일했다. 2004년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 대법관이 되었고, 6년간 대법관으로 재직하면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배려하고 국민의 기본권 보호를 위해 노력하여 ‘소수자의 대법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011년부터 2012년까지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우리 사회의 정의 확립에 큰 영향을 미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입법에 힘썼다. 2013년부터 2019년까지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로 학생들과 만났고, 2019년 4월부터 대법원 양형위원회 위원장으로, 9월부터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로 일하고 있다. 청조근정훈장, 한국여성지도자상 등을 수상했다. 평생 유일하게 계속해온 것이 책읽기뿐이라고 말할 정도로 성실한 독서가로 살아왔다. 읽기의 결과들이 자신을 형성해왔다고 믿으며 남은 미래도 책읽기를 기반으로 하게 될 것이라고 예감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김영란의 헌법 이야기』『판결과 정의』『김영란의 책 읽기의 쓸모』『판결을 다시 생각한다』『김영란의 열린 법 이야기』『문학과 법』(공저)『김영란법, 김영란에게 묻다』(공저)『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