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리 된 걸까. 노동하는 인간이 아닌 노동하는 기계와 경쟁하면서 생존을 걱정해야 한다니. 서로를 ‘노답’과 ‘불통’으로 설명하는 세상에 살게 되다니.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해답은 『어쩌다 한국은』 안에 담겨있다. 책은 노동, 역사, 정치, 언론, 종교, 교육, 국방, 미래 등 여덟 개의 키워드로 이곳의 현실을 설명한다. 대한민국이 경험한 공동의 사건들을 되짚으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하나하나 파헤친다.
이 방대한 이야기를 너무도 쉽게 풀어나가는 저자 박성호는 스스로를 ‘이승의견가’라 소개한다. “온갖 세상사를 관찰해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의 이런 호기심 덕분에 『어쩌다 한국은』에는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폭넓은 이야기가 담겼다. ‘물뚝심송’이라는 독특한 닉네임으로 유명한 저자는 현재 <딴지일보>에 정치 관련 글을 기고하고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에 출연하고 있다. 그는 올해 초부터 대중들과 만나 ‘대한민국 모든 떡밥’이라는 이름의 강연을 진행했고, 그 내용은 『어쩌다 한국은』의 바탕이 되었다.
대기업이 돈을 쌓아두는 이유
책 제목이 『어쩌다 한국은』입니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어떤 상태에 놓여 있다고 진단하시나요?
저는 하나의 고비를 겪고 있다고 봅니다. 비관적인 것도 아니고 낙관적인 것도 아니에요. 언제든지 겪을 수 있는 고비를 맞은 거죠. 우리는 1980년대에 절정의 성장기를 보내다가 90년대 말에 성장 속도가 꺾이는 경험을 했고, 지금은 성장이 정체되어 있는 상황에 놓여 있어요. 이럴 때 사람들은 관성적으로 ‘우리는 또 성장할 것이다, 잠시 쉬고 있을 뿐이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지 않게 됐어요. ‘이렇게 주저앉나 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죠. 사회 전반적으로 구성원들이 희망을 못 느끼고 있다는 증거는 바로 출산율로 나타난다고 봅니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가 지금보다 나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차마 미안해서 아이를 못 낳게 된 거예요. 저는 이 고비를 제대로 넘기지 못하면 우리 사회가 퇴보하기 시작할 거라고 보는데요. 이제는 양적 팽창이 아닌 질적 성장을 추구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하기 위한 진통을 겪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성장이 필요한 걸까요?
우리한테 적합한 민주주의와 약자를 보호하는 정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 사회가 얼마나 행복한지 알려면 최하층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보면 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약자를 보호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전반적으로 퍼지는 사회가 질적인 성장을 꾀하고 있다고 보는 거죠.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의 주류 세력은 그쪽으로 시야를 돌리지 못했어요. 무조건 수출 잘해야 하고 허리띠 졸라매고 저축 많이 해야 된다고, 1970년대에나 먹힐 법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닐뿐더러 우리는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섰습니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 7, 8위의 무역 규모를 가진 무역 강국입니다. 국가 총생산량 규모는 10위권 초반이죠. 물론 채무도 많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산업기술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경제적으로 양적 팽창을 도모하기보다는 지금 의 자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서 행복지수를 높이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책에도 기업의 ‘이익잉여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최근 ‘사내유보금’을 둘러싼 논의들이 있었습니다. 작가님께서는 ‘이익잉여금’이 “생산성 향상의 효과가 노동자에게 배분되지 않고 누적되어 남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반대편에서는 그 돈은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기업들은 본질적으로 생산성을 올리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산성이 향상된다는 것은 투입 대비 산출이 높아진다는 거잖아요. 투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노동력인데,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투입 중에서 노동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예전만큼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게 된 건데, 공장자동화가 대표적인 이야기죠. 그렇다면 노동력은 조금밖에 안 들었으니 그 노동력의 가격이 비싸진 걸까요? 아니면 노동력 이외의 것을 투자했으니 자본이 투입된 거라고 봐야 할까요? 후자라면 산출된 결과물에서 발생한 이득은 자본의 것이지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는 논리도 가능합니다. 자본이 자본을 벌고 있다는 거죠. 그리고 생산성 향상이 일자리를 줄인다는 건 확실하게 누구나 동의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줄어든 노동이 모든 것을 다 만들었다는 데에는 사회적으로 동의하기 힘들 거예요. 그렇다면 ‘노동이 만들었으면 (이익은) 노동의 것이지 왜 자본의 것이냐’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죠. 일리가 있어요.
그렇다면 기업들은 왜 ‘이익잉여금’을 쌓아두고 있는 걸까요?
기업들이 가장 먼저 알고 있어요. 자본주의 체계가 불안정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가장 강하게 느끼고 있어요. 자신의 생존을 보호하기 위해서 잉여금을 쌓아둘 수밖에 없는 거죠. 환경이 바뀌면 거기에 적응을 해야 되니까요. 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으려면 잉여금을 쌓아놓지 않아도 망하지 않는다는 비전을 보여줘야 되죠. 정부나 사회가 할 일은 그거죠. 우리사회가 그들에게 뭔가 제공할 필요가 있어요. 그들이 ‘이익잉여금’을 투자할 때 정부는 어떻게 보답할 것인지 거래를 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이익잉여금’이 많이 쌓여있는 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거예요. 아무리 애플이나 MS, 구글이 돈이 많다고 해도 그들의 규모에 비하면 그렇게 많이 쌓아 두지는 않거든요. 하지만 그건 확실하죠. 자본주의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그들의 판단은 옳아요. 그렇기 때문에 다 같이 모여서 고민을 해서 위기에 대처할 준비를 해야 하죠.
희망의 총량이 줄어든 사회, 연대는 이루어질까
‘노조는 과연 필요한가’라는 ‘떡밥’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이 있어요. 이 논제의 바탕에는 노조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숨어있는 것 같습니다. ‘귀족노조’라는 표현도 그렇죠. 이런 시각들은 어떻게, 왜 생겨난 건지 궁금합니다.
일단 현재 상황에서 우리사회의 구성원들이 노조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는 없애기 힘들 겁니다. 이건 경험적인 사실에 입각한 판단이에요.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로 우리사회에 노조가 기여한 바가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게 더 많았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노동운동이 시대에 맞춰 발전하지 못했다는 건 노동운동 하시는 분들이 심각하게 반성해야 될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리고 노동자대투쟁의 성과를 대기업 노동자들이 독식한 경향이 있죠. 그건 아무도 부정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 거죠. 과실을 독차지하고 있는 무리에 낄 수 없잖아요. 자신이 그런 상황인 건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단체 행동에 함께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내 아이들도 거기에 끼지 못하는 건 곤란하죠. 게다가 노조의 부정적인 면에 대한 보도가 계속 나옵니다. 주변을 둘러봐도 중소기업에 노조가 생겼다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경우가 없어요.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최규석 작가의 『송곳』을 봐도 결코 긍정적인 결말이 아니거든요. 그런 경험들이 누적되면서 노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긴 거예요.
그렇다고 노조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지 않나요?
앞으로의 사회에서는 노동자의 연대로써 노조의 가치보다, 약자들의 연대로써 노조의 가치가 더 크게 부각될 것 같습니다. 개인 간의 연대죠. 단위 기업 노조보다 사회적 노조가 더 널리 퍼지기 시작할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알바 연대, 청년 유니온, 이런 단체가 호응을 받을 거예요. 자영업자들의 연대도 가능하겠죠. 어떤 회사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적 계급들 간의 연대가 이루어지는 건데, 이건 장기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름이 노조이건 아니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사회적 약자의 연대로써 노동운동은 변화할 것이고, 그래야 사람들의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을 거예요. 이런 약자들의 연대가 힘을 발휘하는 시대가 올 거고요. 알바를 하는 청년 3만 명이 모였다면 사회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죠. 최저임금 정할 때 목소리를 낼 수도 있고요. 그들이 일제히 특정 편의점에서는 일을 안 하겠다고 하면 그쪽(사측)에서 당황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대기업이 없어지면 단위 사업장 노조가 힘을 발휘할 수가 없죠. 직원 숫자가 적으니까요.
연대에 희망을 걸기에는 절망적인 징후들이 보입니다. 노동관련 이슈가 있을 때마다 어김없이 ‘귀족노조’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고, 그러면서 노동자 계층 안에서 대립이 발생하잖아요.
그 부분은 다분히 정서적인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면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죠. 그런데 현재 사회는 희망의 총량이 많이 줄었어요.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생존을 걱정하게 되고, 생존을 걱정하게 되면 아량이 줄어듭니다. 노동자대투쟁이 벌어졌을 때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당시 가장 잘 나간다는 현대자동차 노조 또는 금속 노조의 대투쟁을 보면서도, 저 사람들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고개를 끄덕였던 것은 그들에게 아량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그때 서울 시내 대부분의 사무직들이 현대자동차 정직원보다 처우가 좋지 못했거든요. 그런데도 그들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했던 것은 자기의 상황도 더 좋아질 거라는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연대가 어렵고 노동자들끼리 반목하게 되는 것은 다들 심각한 스트레스 때문에 아량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건 상징적인 희망이라도 보이기 시작하면 금방 좋아집니다. 희망만 보이면 자신의 상처라든가 스트레스를 빠르게 갈무리할 수 있을 것이고, 연대가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도노조 파업 당시에도 그들의 처우를 둘러싼 대립이 있었습니다.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왜 파업을 하냐는 시각이 있었고, 반대편에서는 왜 상향평준화가 아닌 하향평준화를 지향하느냐고 지적했죠. 그때도 아량을 베풀지 못했던 건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그렇죠. 물론 거기에도 간과된 많은 부분들이 있죠. 20년째 정직원으로 근무한 근속자가 일주일에 특근 야근 다 하면서 160시간을 일해야 그 돈을 받는 건데, 한편에서는 우리는 그만큼 일해도 그 금액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했죠. 상향평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많은 노동자들이 우리나라가 가난하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는 부자가 된 지 얼마 안 됐고 국가 채무가 많아서 빚 갚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연봉 7000~8000만원 받는 것은 사치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 거예요. 그런데 말씀 드렸듯이 우리나라가 충분히 그 정도 수준이 되거든요. 우리보다 훨씬 인구와 총생산이 적은 나라도 훨씬 더 높은 임금을 주고 고용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서로 간의 반목은 희망과 자신감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자본주의의 실패를 막는 대안 ‘기본소득’
자본주의의 위기 상황에서 대안으로 ‘기본소득’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를 둘러싸고 찬반 논란이 뜨거울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각각의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요?
제가 항상 ‘기본소득’을 설명할 때 덧붙이는 이야기가 ‘기본소득’은 자유도가 높은 정책이라는 거예요. 조절하기에 따라서 급 좌파 정책이 될 수도 있고 급 우파 정책이 될 수도 있어요. ‘기본소득’이 도입되면서 기존의 복지체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따라서 극좌에서 극우로 오갈 수 있는 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 자체를 놓고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어요. ‘기본소득’과 관련해서 기존의 복지체계 등을 종합적으로 봤을 때 어떤 효과를 얻을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하니까요.
‘기본소득’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굳이 찬반을 이야기한다면 ‘기본소득’이 추구하는 사상에 반대할 이유가 별로 없습니다. 15~16세기부터 국민의 기본권에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국가는 자국의 국민들이 최소한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의 환경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이 한 마디로 다 표현되는 거죠.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나라의 국민이 되는 순간 나는 이 땅에 생존할 권리가 있다, 생존할 수 있게 해 달라, 이게 ‘기본소득’의 기본 개념이죠. 모두에게 아무 조건 없이 매월 똑같은 금액을 지급해야 한다는 게 핵심 사안이고요. ‘기본소득’은 너무 복잡한 주제라서 그 이야기만으로 책 한 권을 써도 부족할 정도예요. 그것보다는 ‘기본소득’이 이야기하는 핵심적인 사안에 대한 동의가 필요하다는 걸 말씀 드리고 싶어요. 나는 이 땅에 태어났으니까 이 땅에 살 권리가 있다는 거죠. 내가 일을 하건 안 하건 상관 없이요. 이게 게으름뱅이의 비겁한 변명이 아니고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내세울 수 있는 정당한 권리라고 보는 겁니다.
어떻게 그런 논리가 가능한가요?
자본주의는 일종의 경제적 싸이클이거든요. 생산부터 소비까지 하나의 싸이클이 돌아야 하죠.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은 생산자이자 동시에 소비자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생산을 해서 그 대가로 소득을 올리고 그 돈으로 소비를 하게 되고, 이 소비가 또다시 시장을 만들어서 생산이 가능해지는 거거든요. 그런데 기술의 발전으로 일자리가 없어지면서 구성원이 생산에 참여할 기회를 봉쇄하고 있는 거예요. 냉정하게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생산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이 사라져 버리면 시장이 같이 사라져요. 그러면 생산은 의미가 없어지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생산에 참여를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소비를 통해서 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기본소득’이 자본주의의 실패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봅니다.
‘기본소득’ 보장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거라고 기대하세요?
제가 ‘기본소득’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약자 간의 연대가 훨씬 쉬워지기 때문이에요. 먹고 살기 바쁜 현실 때문에 약자들의 연대가 어렵기도 하거든요.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는데 어떻게 집회와 모임에 참석할 수 있겠어요. 심지어 투표할 시간도 없잖아요. 그런데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그렇게 장시간 노동을 안 해도 되거든요. 여력이 생기고 생존이 가능해지면 사람은 자신 이외의 것에 눈길을 주기 시작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본소득’이 보장되면 약자들의 연대, 소비자의 연대, 이런 사회 운동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거라고 봅니다. 어쩌면 집권층에서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그거죠. 약자들이 뭉치는 걸 싫어하니까요.
날이 갈수록 우리 사회에서 ‘소통이 안 된다’는 말을 듣는 일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어쩌다 한국은』에서 설명한 내용을 보면, 지금의 현상이 하루 이틀 만에 만들어진 게 아닌 것 같아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희생자가 발생하는 사건들이 있었고, 그걸 청산하지 못한 것이 원인 아닐까요?
그 모순이 누적되어서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불신의 벽이 너무 높아진 거죠. 서로 화해를 할 때 자기가 끼쳤던 피해라든가 상처를 사과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그런 화해를 주선하고 중재할 수 있는 사회적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도 아쉬운 일이죠. 중재할 수 있는 사회적 권력, 즉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거죠.
결국 ‘제대로 된 정치’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신데요. 그와 관련해서는 “이제 게임의 룰을 생각할 때가 왔습니다”라는 말씀이 가장 핵심이 아닌가 싶습니다. 책에도 쓰셨듯이 정치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정치적 현안, 정파적 이야기 안에서만 논의가 맴돌잖아요. 게임의 룰에 대한 고민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게임의 룰을 생각해야 된다는 건) 정치인들이 어떤 정책을 내걸고 국민들의 선택을 받으려면 그 전에 제대로 된 선거법부터 만들어야 하지 않냐는 거예요. 게임의 룰을 만들고 게임에 참여해야죠. 그게 답답한 겁니다. 2014년에 위헌 판정을 받은 선거법을 아직도 못 고치고 있는데, 헌법 재판소는 올 연말까지 고쳐서 내일 총선은 바뀐 선거법으로 실시해야 된다고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이러다가 연말에 어느 날 기습적으로 발표하겠죠.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다수의 유권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거예요. 심지어 이 문제를 정치인들끼리 밥 그릇 싸움하고 있다고 받아들이는 유권자들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선거법이라는 건 게임의 룰이고, 유권자들의 의견이 정치판에 반영되도록 만드는 장치거든요. 선거법에 대해서 구성원 전체가 고민해야 돼요. 그걸 제일 잘 하는 나라가 스웨덴이라서 『어쩌다 한국은』에서 스웨덴 선거 제도를 설명한 거고요.
4대 권력집단, 자본 언론 종교 사학재단
우리 언론이 거쳐 온 역사도 한 마디로 정리해주셨습니다. “권력을 피해 도망갔더니 자본을 만났다”고요. 언론사 역시 기업이기 때문에 광고료의 유혹을 뿌리칠 수만은 없는 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언론이 갖는 특수한 의무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국정교과서를 홍보하는 교육부의 광고를 실었다고 해서 <한겨레>가 비난을 받았던 것도 같은 이유죠. 어떻게 보시나요?
그 일이 있은 이후에 정부에서 민주노총 총궐기 시위에 대해서 성명을 발표했어요. 그때 <한겨레>가 하단 전면 광고를 거절했습니다. 그 사건 때문에 광고국에서 내부 항의 성명을 냈죠. 그 내용이 어떻든 합법적으로 성립한 정부의 성명을 광고로 간주해서 거절할 수가 있는 건가, 그게 언론의 역할에 맞는가, 라는 내용이었는데요. 저는 광고국 분들의 의견에 동의해요. 정부가 발표한 성명이라면 언론은 그 내용에 관계없이 보도를 하는 게 맞습니다. 대신 그에 대해서 사설로 비판하면 되죠. 물론 상업 광고였다면, 책에서 소개한 예처럼,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광고를 실어달라는 단체가 있다면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것까지 받아준다면 자본의 문제가 되는 건데, 정부의 성명을 거절하는 건 언론의 자세가 아니라고 봅니다.
언론이 자본에 예속되는 문제도 심각하지만, 이제는 언론 스스로 자본이 되어가고 있다고 지적하셨어요.
자본의 뒤를 따라다니다가 그것도 싫으니까 자신들이 자본이 되려고 하는 거죠. 그게 종편으로 나타나는 거고요.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정보를 어디에서 얻어야 될까요? 언론은 정보라는 상품을 보급하는 회사입니다. 그러면 소비자들이 선택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소비자들이 언론을 선택하기 시작하면, 메이저 언론들이 담합을 해서 시장을 왜곡시키는 한이 있어도, 제대로 된 언론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사회에 그런 시발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죠. 대안언론을 만들려고 하고 다수의 언론들이 시민들의 후원에 의존하기도 하잖아요. 후원제도 자체에도 문제는 있다고 봅니다. 과연 후원자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기사를 실을 수 있느냐, 그런 문제를 생각해 봐야죠. 앞으로의 언론은 탐사보도가 다시 돌아와야 하고, 또 돌아오고 있다고 보고요. 그래서 클라우드 펀딩도 가능해지고 있고 (포털사이트)‘다음’도 새로운 시도를 하는 있는데, 그런 시도가 다양해지면서 게릴라성 언론들의 시대가 올 가능성이 많다고 봅니다. 그게 대안이 될 수 있죠.
우리나라의 네 개 권력 집단으로 자본가, 언론, 종교, 사학재단을 꼽으셨어요. 종교와 관련해서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권력화 된 과정’을 소개하셨고요. 그들이 거대한 권력을 쥐고 있다는 건 아마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사실일 겁니다. 궁금한 건, 과연 그들이 가진 힘이 사라질 날이 올 거냐는 거예요.
네, 옵니다. 당연합니다. 지금 이미 신도 숫자는 빠른 속도로 줄고 있죠. 교회가 사회의 자산보유 선두 그룹들이 자산 증식의 정보를 교환하는 일종의 사교클럽 역할을 하는 거거든요. 거기에 낄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줄고 있고요. 영업을 이유로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예를 들면 식당 주인 같은 경우가 있겠죠, 그런데 이제는 교회가 아주 소수에게만 상업적 이익을 주고 있어요. 그래서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도 하죠. 전체 종교문화적인 차원에서도 개신교는 위력이 약해지고 있어요. 이미 유럽에서도 대폭 축소된 상황이고 미국도 세력이 줄고 있고요. 그래서 미국이나 우리나라의 선교사들이 자꾸 새로운 나라를 개척하려고 하는데 남은 곳이 중동밖에 없어요. 그런데 거기는 갈 수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빠른 속도로 줄어들게 될 거라고 생각돼요.
대형교회가 많은 인맥과 자본을 가지고 있는 만큼, 쉽게 영향력을 잃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형교회들이 사업 다각화를 시키려고 하죠. 사립학교와 대학을 세우기도 하고요. 일부는 부동산 투자도 해요. 교회에 특권이 있거든요. 개발제한구역도 살 수가 있어요. 그렇다고 해도 지속적인 수입이 줄고 있는데 세력이 강화될 수는 없죠. 사립학교에 투자한 것과 관련해서도 치명적인 상황이 다가오고 있잖아요. 아이들이 줄고 있어서 모든 사립학교의 반쯤은 없어질 거라고 해요. 그러면 그들의 세력도 반 조각이 난다는 거죠. 물론 그 뒤에 다시 늘어날 수도 있지만, 그 시기를 견디지 못하는 거죠. 학생이 없는데 어떡하겠어요?
『어쩌다 한국은』을 보고 새삼 놀랐습니다. 사학재단과 직간접으로 연관된 국회의원의 숫자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거든요.
지역 사립학교 재단의 사람들은 정계에 굉장히 많이 진출하죠. 지역사회에서도 인정을 받거든요. 평생을 후학 양성에 공로하신 분이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서 출마한다고요. 그래서 출마가 쉬운 거예요. 국회의원 비중도 많아진 거고요. 그리고 사학법 같은 그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법안을 완전 통제하는 거죠. 심지어 야당에서도요. 참여정부 때 내놓은 사학법 개정안이라는 게, 사립학교 재단 이사진 중에 한 두 명의 관선 이사를 포함시키겠다는 거였는데, 이것도 용납을 안 하는 거예요. 관선 이사가 들어오면 (회계)장부가 얼마나 엉망인지 알게 될 거 아니에요. 투명하게 공개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거든요. 그걸 관철하기 위해서 촛불시위를 했는데, 참여했던 사람들이 우리나라 최고 권력자들이잖아요. 이명박, 박근혜, 한나라당 중진들이 다 그곳에 있었죠.
『어쩌다 한국은』의 마지막은 ‘제너럴리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제너럴리스트라는 말은 제가 만든 건 아니고요.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에요. 그런 의미를 가진 현대적인 표현으로 제가 만든 게 이승의견가라는 겁니다(웃음). 이승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서 의견을 가지려고 노력하죠. 이렇게 말씀 드리면 왜 그렇게 모든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냐고 물으실 수 있어요. 그런데 제가 사회 각 분야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을 살펴본 결과 굉장히 선한 전문가의 악행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사회는 갈수록 점점 더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한 분야의 전문가가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이 너무 높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이 지성인에게 주어진 큰 의무라고 볼 수도 있어요.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각각의 분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내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한 호기심만 넓게 가지면 쉽게 제너럴리스트가 될 수 있죠.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제너럴리스트의 역할에 많이 투자하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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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한국은박성호(물뚝심송) 저 | 로고폴리스
《어쩌다 한국은》은 ‘물뚝심송’이라는 닉네임으로 〈딴지일보〉와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 등에서 맹활약하며 10여 년 동안 한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대중의 눈높이에서 풀어온 저자가 내놓은 한국 사회 관찰기다. 한때 물리학을 공부했던 과학도답게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냉철하고 분석적이다. 그 어떤 문제라도 역사적 근원부터 파고들고 전개 과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추적해 문제의 전체 상을 확실하게 그려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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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