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해적, 동아시아 바다를 점령하다
우리 교과서에서는 이런 것이 전혀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왜구와 관련한 비판의 화살을 일본에만 돌리고 있다.
글ㆍ사진 김종성
2015.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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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에 대해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여러 이미지 중 하나는, 그들이 과거 오랫동안 해적질을 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중국인들의 역사인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중국인들 역시 역사 속의 일본을 해적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인들이 해적이 되어 동아시아 바다를 교란한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이 과연 얼마나 오랜 기간 해적질을 했는가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역사 속 일본을 해적 국가로 간주하든 안 하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해적이 동아시아 바다를 주름잡은 기간은 14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였다. 14세기 중반 이전에도 일본 해적의 활동이 있었지만, 이때만큼 대규모적이고 본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우리 머릿속에 ‘왜구’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활동이 시작된 것은 14세기 중반부터였다.

 

몽골(원나라) 역사서인 『원사元史』의 순제 본기, 지정至正 23년 8월 1일(양력 1363년 9월 8일) 기사에 “왜인들이 봉주蓬州를 약탈하자, 수비대장 유섬이 격퇴했다”라며 “(지정) 18년 이래로 왜인들이 계속해서 연해 지방을 약탈했다”라는 내용이 있다. 봉주는 지금의 사천성에 있다. 티베트고원 오른쪽의 내륙 지방인 사천성까지 왜구가 어떻게 들어갔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봉주 인근까지 양자강이 흐르는 것을 생각하면 의문이 해소된다. 이 강을 따라 왜구가 이곳까지 침투했을 것이다.

 

『원사』의 기록에 따르면, 왜구가 본격 활동을 시작한 때는 지정 18년 즉 1358년이다. 한편, 1525년에 명나라 학자 진건陳建이 편찬한 『황명자치통기皇明資治通紀』에서는 “왜구가 일어난 것은 원나라 지정 10년”이라고 했다. 지정 10년은 1350년이다. 두 기록이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1350년대에 왜구 활동이 본격화된 것만큼은 사실이다. 이때 본격화된 왜구의 활동은 1569년 7월에 중국인 왜구 증일본曾一本이 체포되면서 크게 약화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왜구가 동아시아바다를 교란한 기간은 14세기 중반에서 16세기 중후반의 200여 년간이었다.

 

왜구의 약탈(16세기)_위키피디아.jpg

왜구의 약탈

 

왜구가 득세한 기간은 일본의 분열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이 기간에 일본열도는 남북조 시대와 센고쿠 시대의 분열에 휩싸여 있었다. 남북조 시대와 센고쿠 시대는 일본에 통일적 권력이 없었던 시대다. 강력한 정권의 부재는 해외 무역의 곤란을 초래했다. 정부 대 정부의 공무역이 국제교역을 주도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중앙 정권의 부재는 당연히 국제교역의 곤란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곤란을 타개하고자 지방 세력들이 해적이 되어 무역이나 약탈 활동에 나섰다. 상황에 따라 그리고 상대에 따라 무역을 하기도 하고 해적질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일본 해적이 사라진 때는 센고쿠 시대의 혼란이 진정되던 16세기 중후반 무렵이다. 16세기 후반 임진왜란 때 16만 명의 일본군이 일본이라는 하나의 깃발 아래에 전함을 타고 조선을 침공했다. 만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지 않았다면, 그 전함들은 제각각의 깃발을 달고 해적 활동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에서 나타나듯이, 일본인들이 동아시아 바다를 주름잡은 것은 14세기 중반부터 약 200년간이다. 그럼, 14세기 중반 이전에 동아시아 해양을 지배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그것은 바로 한민족이었다. 가야ㆍ백제 멸망 이후 신라 제도권에 빨려들지 않은 해상 세력들은 동아시아 바다를 출구로 삼았다. 9세기에 장보고가 한ㆍ중ㆍ일 삼각 네트워크를 운영한 사실, 14세기 중반에 명나라가 한민족 출신으로 보이는 동지나해의 해적들을 축출한 사실, 14세기 중반 이전에 다른 민족이 한민족을 제치고 동아시아 해역을 지배했다는 뚜렷한 정황이 발견되지 않은 사실 등을 볼 때, 적어도 14세기 중반 이전까지는 한민족이 동아시아 바다의 주역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원사』 순제 본기에서도 그런 점을 이끌어낼 수 있다. 순제 본기의 지정 12년 8월 7일자(양력 1352년 9월 15일자) 기사에는 “고려인 해적들이 바다를 건너와 노략질을 한다”며 일본 측이 몽골 정부에 보고하는 대목이 나온다. 몽골에게 고려 해적의 소탕에 협조해달라고 요청을 한 것이다. 이에 따라 몽골 조정의 요청을 받은 고려 공민왕이 고려 해적을 소탕하는 장면이 순제 본기에 묘사되어 있다. 몽골과 공식 외교관계를 체결하지 않은 일본 측이 고려 해적을 소탕해달라며 몽골 정부에 요청한 것은 일본인들이 고려 해적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350년대 이전에 고려 해적 문제가 상당히 심각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15세기까지는 세계 교역의 중심이 바닷길이 아닌 비단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14세기 중반까지 한민족 해적들이 동아시아 바다에서 주도권을 행사한 것이 세계사적으로 굉장히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점은 왜구가 동아시아 바다를 교란한 기간보다 한민족이 그렇게 한 기간이 훨씬 더 길다는 점이다.

 

한민족이 바다를 장악한 것과 관련하여 주의할 점이 있다. 국가 권력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해상에서는 무역선과 해적선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해상에서는 무역선이었던 선박이 해적선으로 돌변하고 해적선이었던 배가 무역선으로 탈바꿈하는 일이 흔했다. 그래서 특정 해역에서 특정 세력이 상업 활동의 주도권을 잡았다면, 그 세력이 거기서 해적 역할도 겸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14세기 중반 이전에 동아시아 해역을 장악한 한민족 출신들이 항상 해적질만 한 게 아니라 해적질을 겸한 무역 활동을 했다고 보는 게 훨씬 더 타당하다.

 

한민족 해적들이 동아시아를 지배한 시기가 14세기 중반까지라고 하여, 14세기 중반부터는 한민족이 해적 활동의 무대에서 퇴출됐다고 볼 수는 없다. 명나라 역사서인 『명사明史』의 일본 열전에서는 가정 33년 5월(양력 1554년 5월 31일~6월 29일)에 왜구가 양자강 주변의 강남 지방을 약탈한 사건을 기술하면서 “대체로 볼 때, 진짜 왜인은 열의 셋이고 왜인을 따르는 자들이 열의 일곱이었다”고 말했다.

 

‘진짜 왜인’의 원문 표현은 진왜眞倭다. 이 기록에 따르면, 왜구 중에서 진짜 일본인은 적고 비非일본인이 훨씬 더 많았다. 이 시기에는 일본인들이 해적 활동을 주도했지만, 일본인이 아닌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해적에 가담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구의 탈을 쓰고 해적질을 하는 비非일본인들이 많았던 것이다.

 

비일본인 왜구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힌트가 될 만한 것이 명나라 주원장朱元璋 시대의 기록인 『태조실록』에 실려 있다. 홍무 26년 10월 14일자(양력 1393년 11월 18일자) 『태조실록』에 따르면, 지금의 요동반도 대련시(다롄시)에 있었던 금주金州라는 곳에 왜구 100명이 출현했다. 명나라 정부군이 출동해서 이들을 체포해보니 그중에 장갈매라는 조선인이 있었다. 황해도 해주 사람인 그는 일본인 복장으로 무리에 섞여 있었다. 그중에서 장갈매 하나만 조선인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일본인으로 위장한 조선인들 중에서 장갈매 하나만 국적을 들켰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조선인들이 일본인 흉내를 내면서 해적 활동을 하는 사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있었던 게 아니라 많았다고 이해해야 한다. ‘진짜 왜인은 열의 셋이고 왜인을 따르는 자들이 열의 일곱’이라는 『명사』의 기록을 보면, 조선인들이 왜구 집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으리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명사』 일본 열전에서는 ‘열의 셋’ 즉 10분의 3이 진짜 일본인이라고 했지만, 실제 일본인은 그 숫자에도 훨씬 미치지 못했다. 왜냐하면, 명나라 사람들이 일본인이라 지칭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사실 대마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1869년에 일본에 편입되기 이전만 해도 대마도는 독립국이었다. 대마도는 혈통상으로는 일본과 가까웠지만, 정치적으로는 별개였다. 명나라 사람들은 혈통상으로 일본과 가깝고 일본의 책봉을 받았다는 이유로 대마도 해적을 일본 해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위와 같이 한국 해적이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한 기간이 훨씬 더 길고, 왜구가 동아시아를 장악한 기간에도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왜구를 가장해서 해적 활동을 했고, 또 왜구의 대부분은 실제로는 대마도 해적이었다. 하지만 우리 교과서에서는 이런 것이 전혀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왜구와 관련한 비판의 화살을 일본에만 돌리고 있다. 또한 해적 활동을 한 것이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왜구로 가장한 한민족 해적의 숫자가 상당했으며 왜구가 득세하기 전에는 한민족 해적이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했다는 사실이 우리 교과서에서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동아시아 해적 활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부끄러움을 느낄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 민족이 저 넓은 동아시아 해역을 지배했다는 것은 우리의 또 다른 역량을 보여주는 징표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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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김종성 저 | 역사의아침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역사 교과서를 분석하는 이 책은, 한국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한국 역사 9가지, 중국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중국 역사 7가지, 일본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일본 역사 8가지를 소개하고, 세 나라 국민들의 역사인식에 담긴 오류와 편견을 제기한다. 이를 통해 지나친 국수주의를 경고하고 과도한 자기비하를 경계하며 더불어 바른 역사관의 정립과 역사적 진실의 규명,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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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월간 《말》 동북아 전문기자와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방문학자로 활동했다. 또 문화재청 산하 한국문화재재단이 운영하는 《문화유산채널》(구 《헤리티지채널》)의 자문위원과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오마이뉴스》에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 읽기〉를 연재하고 있으며 웅진씽크빅의 《생각쟁이》에 글을 싣고 있다. 《문화유산채널》에 명사 칼럼을, 《민족 21》 등에 역사 기고문을 연재했다. 삼성경제연구소 Seri CEO에서 기업인들에게 한국사를, 삼성인력개발원에서 외부 강사로 삼성 신입사원들에게 역사를 강의했다. 기독교방송(CBS)의 〈김미화의 여러분〉에서 역사 코너에 출연했고, 교통방송(TBS)의 〈송정애의 좋은 사람들〉에서 역사 코너에 출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