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저 | 창비
스무 살에 상경해 서울에 잡은 첫 터전은 궁 인근의 옥탑이었다. 다니게 된 학교가 흙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창경궁과 북쪽 담장을 마주한 곳에 있었던 탓인데, 덕분에 공강 시간이면 짬을 내 궁 산책을 하거나 수업 중 창문 바깥으로 비원의 풍경을 내다보는 호사를 누렸다.
그때 나는 전입신고란의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여전히 이방인에 가까운 이주민이었는데, 하릴없이 창경궁 담장 근처를 헤매고 있다 보면 왠지 이 도시에 아주 오래 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보면 문득 한때 이곳에 살았을 사람(혹은 동물 혹은 식물)은 모두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졌고 상상하다 보면 지극한 슬픔이 밀려들었다.
김금희 작가의 장편소설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읽으며 그때 내가 느낀 슬픔의 정체를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된 장소는 필연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고 그 중엔 존재한 적도 없었던 것처럼 묻힌 것들이 포함돼 있을 것이라서. 장소를 복원하는 일은 그렇기에 이야기를 복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고 그건 무엇보다 소설이 가장 잘해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었던 창경궁 대온실을 복구한다는 이야기의 뼈대 아래 저마다의 사정으로 묻혀야 했던 과거도 함께 복원하는, 이를테면 형식과 내용이 조응하는 소설이다.
창경궁 대온실은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이태 전 즉위한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동물원과 식물원을 함께 건설하며 지어졌다. 1983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동물원과 식물원이 철거될 때도 최초의 서양식 유리온실이라는 의의를 인정받아 드물게 살아남은 건축물이기도 하다. 소설의 제목이 ‘대온실 수리 보고서’가 된 것은 30대 중반의 주인공 영두가 이 창경궁 대온실의 보수공사를 맡은 건축사무소에서 문화재 수리 보고서를 작성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영두에게 그곳은 “일년 남짓의 임시 일자리”와 “600년 전에 건축된 고궁”이 있는 곳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잊지 않으면 살 수 없겠구나 싶어 망각을 결심한 낙원하숙”(17쪽)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03년 고향인 인천 강화군 석모도를 떠나 서울로 유학 온 영두는 주인 할머니 ‘문자’와 그의 손녀 ‘리사’, 그리고 다른 하숙생들과 함께 창경궁 근처 원서동의 낙원하숙에 살았던 적이 있다. 그곳에서 영두는 인생이 크게 꺾이는 사건을 겪게 되는데, 그 ‘얼음같은 수난’은 십대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고통이어서, 영두로 하여금 “좋은 부분을 오려내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을”(156쪽) 품게 만든다. 그렇게 망각의 영역으로 넘겨버린 시절과 다시 마주하면서 영두의 시간이, 이야기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이후 소설은 크게 네 개의 시간 축을 기둥 삼아 전개된다. 첫째, 영두가 건축사무소 사람들과 함께 대온실 수리보고서를 작성해 나가는 2023년. 둘째, 리사와 같은 학교에 다니던 영두가 그 학교에서 속수무책으로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2003년. 셋째, 그에 앞서 일제강점기와 해방기 낙원하숙에 살았던 문자 할머니의 어린 시절. 넷째, 1909년 조선에 대온실을 만든 원예학자 후쿠다 노보루(실제인물인 후쿠바 하야토가 모티브가 됐다)의 이야기.
저마다의 시간축을 쌓아가던 이야기는 보수공사 실측 과정에서 온실 아래 묻혀있던 지하공간이 드러나고 그곳에서 뼈가 발견되면서 마침내 하나의 지붕 아래 놓이게 된다. 그 흔적은 해방 이후 조선에 남겨진 잔류 일본인이었던 문자 할머니(마리코)의 봉인된 비밀이기도 하고, 동시에 우리가 굳이 꺼내어 말하지 않는 근대사의 수치이기도 하다.
봉인해둔 상처를 복원하는 작업은 왜 필요한가? 아무리 고통스러운 시절이라도 찰나의 빛나고 소중한 순간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 영두는 고통받았지만 동시에 애틋한 첫사랑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느라 그 사랑에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건네지 못했고, 그리워도 마음껏 그리워하지조차 못했다. 어쩔 수 없이 함께 묻혀버린 그 기억들에 제대로 된 그리움의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상처를 마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2023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와 조선과 인천 석모도를 분주히 오가며, 작가는 “소중한 시절을 불행에게 다 내주고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리움과 싸워야”만 했던 인물들이 폐기했던 기억을 다시 마주하고 그 시절과 화해를, 동시에 회복을 꾀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회복의 이야기가 개인의 역사와 민족의 역사 안에서 함께 쓰일 수 있다는 것을, 그건 분명 김금희라서 가능했다는 것을 나는 새삼 감탄하며 깨닫는다. “한때는 근대의 가장 화려한 건축물로,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대중적 야앵의 배경지로, 역사 청산의 대상으로 여러 번 의의를 달리한 끝에 잔존한 대온실”을 “‘생존자’에 비유”하고 “이 건축물과 함께 그 시절 존재들이 모두 정당히 기억되기를”(411쪽) 바라는 작가의 소망을 나는 독자로서 겸허하게 수행한다.
그리고 다시 나의 이야기. 혜화동을 거쳐 서촌으로 한번 터전을 옮겨가며, 종로구에서는 그로부터 8년 남짓을 살았다. 얼마 전 한때 살았던 서촌의 연립주택을 지나치는데 그곳은 철거를 앞둔 폐건물이 되어 있었다. 이제 서울살이도 제법 오래되어서 어떤 때는 내가 아주 이곳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그런 풍경 앞에서 서울은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하는 도시고 어떤 삶들은 기록될 찰나조차 갖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더라도, 실은 우리도 다 여기에 있었다. 살았었다. 그 모든 고통과 사랑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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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온실 수리 보고서
출판사 | 창비
한소범(한국일보 기자)
1991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국문학과 영상학을 전공했다. 발표된 적 없는 소설과 상영되지 않은 영화를 쓰고 만들었다. 2016년부터 한국일보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