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 저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2013년, 돌베개)라는 책을 펴낸 적이 있습니다. 읽은 분들은 기억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책에는 옛소련의 음악가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필자의 사적인 경험담이 등장합니다. 제가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던 1981년의 어느 날, 서울 광화문의 한 작은 서점에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d단조>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만 해도 적성국가(敵性國家)였던 소련의 음악가, 게다가 서점의 판매대에 쌓여 있던 카세트테이프에는 ‘혁명’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생소한 음악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집어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도 저와 비슷한 또래들은 아마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기억할 겁니다. 수많은 책들이 ‘불온’이라는 낙인이 찍혀 금서 목록에 올라갔던 시절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부 영화와 음악도 한국에서 접할 수 없었던 ‘검열의 시대’였습니다.
어쨌든 저는 ‘혁명’이라는 두 글자에 홀린 듯 집어든 그 카세트테이프를 듣고 또 들었습니다. 적어도 200번쯤은 듣지 않았나 싶습니다. 결국 카세트테이프가 끊어져서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때까지 애지중지 아껴가며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이 교향곡의 1악장 서주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네 개의 음을 들을 때마다 옛날 기억이 아스라하게 떠오르곤 합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라는 이름은 저한테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지금도 강연장에서 약간은 회상조에 젖어 그 이야기를 꺼내곤 합니다. 물론 20대 초반의 경험담을 굳이 거론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당시에 제가 겪었던 궁핍, 그로 인한 간절함에 대해 말하기 위해섭니다. 그때만 해도 음반을 사고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약간 사치스러운 취향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점심을 굶어가면서 1000원이 조금 넘는 가격의 LP음반을 샀고, 그것을 신주단지처럼 모셔놓고 음악을 들었습니다. 게다가 광화문의 서점에서 제가 집어들었던 것은 소련의 음악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이 만든 탈정치적인 영화 <해바라기>(1970년), 2차대전의 와중에 헤어진 연인들의 애절한 사랑을 담은 이 영화가 단지 소련에서 촬영됐다는 이유로 한국에서는 한때 금지되기도 했으니,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청년에게 ‘소련의 음악가’는 그 자체로 호기심과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니 떨리는 가슴으로 그 음악을 듣고 또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말하자면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금기가 음악을 향한 간절함을 한층 키웠던 셈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궁핍해야 간절하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에서 유통되는 허다한 음악들은 한 곡의 음악을 향한 ‘나의 간절함’이 없는 한 ‘가짜 풍요’일 뿐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렇게 다가왔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d단조>에 대해 좀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였습니다. 허장성세의 나팔소리와 외줄을 타듯이 위태롭게 비틀거리는 피에로의 춤, 그리하여 쇼스타코비치라는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을 느끼면서 음악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첫 대면 이후 거의 10년쯤 세월이 흘러서였습니다. 제가 사회주의 혁명의 음악으로 받아들였던 <교향곡 5번 d단조>는 당의 비판에 직면해 작곡가로서 위기에 몰린 그의 절충수였습니다. 아울러 문학에서 막심 고리키가 그랬듯이 ‘충실한 당의 음악가’라고 여겼던 쇼스타코비치는 알고 보니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모더니스트였습니다.
오늘날 그의 음악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과 예술가로서의 포기할 수 없는 자의식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이해되곤 합니다. 어떤 음악은 전자에, 또 어떤 음악은 후자에 좀더 가깝습니다. 만일 생전의 쇼스타코비치가 당과 조국을 찬양하기만 했다면 오늘날 그는 어용음악가로 자리매김돼 있겠지요.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또 만약 그가 자신이 추구했던 아방가르드에만 매진했다면 당국에 의해 숙청당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확률은 아마도 100%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이 역시도 아슬아슬하게 피해갔습니다. 그래서 그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음악에서는 갈등과 고뇌의 흔적들이 만져집니다. 순응하거나 저항하거나, 혹은 나아가거나 후퇴하거나의 갈림길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예술가의 내면적 자아를 느끼게 합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어린 시절 애칭은 ‘미챠’(Mitya)였습니다. 1906년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지요. 알려져 있다시피 이 도시는 몇차례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1914년에 페트로그라드(Petrograd)로, 또 1924년에 혁명가 레닌이 세상을 떠나자 ‘레닌그라드’로 불리기 시작합니다. 1991년에 옛이름으로 돌아와 요즘에는 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라고 불립니다. 현재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가 정치와 행정의 중심이라면, 제국 시대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만합니다. 미챠는 이 도시에서 측량 공무원인 아버지와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3남매의 둘째이자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출신인 어머니 소피아로부터 아홉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는데, 어린 시절부터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피아노를 배운지 2년도 안돼 바흐의 평균율 전곡을 연주했고, 초견 연주와 즉흥연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또 이 시기에 피아노 소품들을 작곡하기도 하지요. 특히 11세 때 작곡한 <혁명의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장송행진곡> 같은 곡들은 미챠의 신동적 기질이 범상치 않았음을 짐작케 합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1917년 2월(그레고리력으로는 3월)에 발발했던 혁명의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고, 희생자에 대한 추념의 마음도 갖고 있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린 아이는 부모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법이어서, 특히 측량공이었던 아버지로부터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겠지요.
체제가 바뀌는 혁명은 사회적 혼란을 수반하기 마련입니다. 러시아의 거대한 변혁기였던 쇼스타코비치의 어린 시절도 그랬습니다. 게다가 유럽은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있었습니다. 먹을 것은 부족했고 땔감도 없어 추위에 떨어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험난한 시기에도 음악 신동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한 쇼스타코비치는 13세의 어린 나이에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교실의 풍경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음악가들을 수없이 배출한 명문이었지만, 땔감이 없어서 오들오들 떨면서 수업을 진행했다고 전해집니다. 게다가 전쟁을 치르는 중이어서 교수들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고 하지요. 그런 와중에 몸이 약했던 쇼스타코비치는 영양실조가 겹치면서 빈혈과 폐결핵을 앓습니다. 당시 음악원 원장이었던 알렉산더 글라주노프(1865~1936)가 정부에 청원서까지 보내 어린 신동을 보살피려 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어린 쇼스타코비치의 재능을 얼마나 아꼈는지 충분히 짐작할 만합니다.
쇼스타코비치가 음악가로서 제대로 된 신고식을 치른 곡은 <교향곡 1번>이었습니다. 19세이던 1925년에 작곡해, 이듬해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이 초연했던 이 곡은 그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알린 계기가 됐지요. 그의 첫번째 교향곡이자 출세작입니다. 특히 아르투르 토스카니니, 브루노 발터,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등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널리 알린 지휘자들로 손꼽힙니다. 스무 살의 청년 작곡가는 ‘소련이 낳은 천재’라는 수식어와 함께 미국과 유럽 곳곳에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20대의 쇼스타코비치에게는 별로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지속적으로 유지했을 뿐 아니라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와 알반 베르크 전위적인 오페라 <보체크>에 매료됐습니다. 소련 정부에서 10월 혁명 10주년을 기념해 위촉한 <교향곡 2번 B장조>는 ‘10월 혁명에 바친다’라는 부제를 갖고 있었음에도 전위적 모더니즘에 마음을 빼앗긴 쇼스타코비치의 새로운 음악언어들을 발견하게 합니다. 적어도 레닌의 시대에 소련의 예술가들에게 ‘공포’라는 기제(機制)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상황은 나빠집니다. 1925년에 결성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음악가 동맹이 스탈린의 권력 강화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1928년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소련에서의 창작 원칙으로 천명합니다. 이 무렵에 작곡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3번 E플랫장조>는 ‘메이데이’라는 부제를 단 채 좀더 쉬운 음악적 언어로 작곡됩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쇼스타코비치는 머잖아 다가올 공포의 그림자를 충분히 감지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썼던 오페라 <코>에 대해 프롤레타리아 음악가 동맹이 ‘서구 예술을 추종하는 형식주의자’라고 비난하자 외려 거세게 항의하기도 합니다.
사건은 <므젠스크의 맥베스 부인>이라는 두번째 오페라에서 터졌습니다. 1860년대의 제정 러시아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이 작품은 쇼스타코비치의 전위적 표현주의를 맛볼 수 있는 현대 오페라입니다. 한데 표현 수위가 상당히 셉니다. 극 중의 여주인공 카테리나는 하인 세르게이와 혼외정사에 빠지고 자신의 몸을 탐하는 시아버지를 독살합니다. 내연 관계인 세르게이와 짜고서 남편마저 저세상으로 보내 버리지요. 어떤 이들에게는 일종의 ‘막장 드라마’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관점에 따라 해석과 이해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늙은 호색한으로 그려지는 시아버지는 제정 러시아 시절의 부농이었던 ‘쿨락’의 표상으로 보이는데, 쇼스타코비치가 부농 계층에 대한 사회적 증오를 오페라 속에 담아내고 있다는 해석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지요.
이 오페라는 1934년 페테르부르크(당시에는 레닌그라드)의 말리극장에서 초연됐습니다. 당시 결혼 2년째에 접어들었던 쇼스타코비치는 이 오페라의 작곡료로 집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청중의 반응은 대단히 좋았지요. 레닌그라드(36회)와 모스크바(94회)에서 절찬리에 공연됐을 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에서 호평을 받으며 공연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창 ‘잘 나가던’ 중에 스탈린이 모스크바 공연을 보면서 사단이 벌어지고 맙니다. 1936년, 이른바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본격화하는 시절이었습니다. 바야흐로 숙청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1월에 문화부장관 부브노프와 함께 극장을 찾았던 스탈린은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노골적인 불쾌감을 표시하고 나가 버립니다. 오페라의 내용뿐 아니라 도무지 전통적이지 않은, 자신이 듣기엔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음악적 언어에도 단단히 화가 났던 모양입니다. 이틀 후 당 기관지 <프라우다>에는 최고 권력자의 심기를 거스른 이 오페라에 대해 ‘음악이 아니라 황당무계’라는 논설이 실립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므젠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입이 닳도록 칭송했던 평론가들은 입을 닫아버리거나 오히려 비난의 대열에 앞장서기도 합니다. 쇼스타코비치는 그렇게 정치적 벼랑으로 내몰렸던 것이지요.
할 수 없이 그는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던 교향곡 4번을 서랍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 대신 1937년에 약 4개월 만에 완성한 곡이 <교향곡 5번 d단조>였습니다. 같은 해 11월 므라빈스키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연주로 서둘러 초연하고 쇼스타코비치는 정치적으로 복권됩니다. 4악장 구성의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어법으로의 회귀, 쉽고 간결한 리듬과 선율은 청중의 호응은 물론이거니와 음악가 동맹으로부터도 호평을 받습니다. 그가 남긴 15곡의 교향곡 증에서도 오늘날 가장 빈번히 연주되는 이 곡은 그렇게 세상에 나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가장 인기 있는 교향곡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1악장은 ‘빠밤~ 빠밤~’ 하면서 등장하는 네 개의 음에서부터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을 연상시킵니다. 그렇게 저음을 포함한 현악기들의 거칠고 리드미컬한, 약간 날카로운 느낌의 선율로 문을 열고 이어서 바이올린 파트가 좀더 부드러운 선율을 연주하면서 시작합니다. 2악장은 알레그레토 템포의 스케르초 악장입니다. 신랄한 풍자, 뒤뚱거리는 피에로의 몸짓을 느끼게 합니다. 3악장은 라르고 템포로 느려지지요. 현악기들이 경건하면서도 깨끗한 느낌의 선율을 들려줍니다. 현악기에 이어지는 플루트의 독백, 이어서 현과 목관이 어울려 음악이 점차 고조됩니다. 현악기들을 배경에 깔고 오보에가, 또 플루트가 부르는 노래가 인상적입니다. 현악기들의 연주 속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실로폰, 첼레스타의 음향도 매혹적입니다. 쇼스타코비치의 탐미성이 짙게 느껴지는, 어찌 보자면 추모의 분위기가 감도는 악장입니다. 4악장은 그동안 숨죽였던 금관이 포효하는 악장입니다. 트럼펫과 트롬본이 팀파니와 더불어 강력한 에너지를 뿜어내면서 시작합니다. 현악기들이 연주하는 반복적인 음형은 탄력 있는 리듬을 구사하면서 출렁거립니다. 쇼스타코비치 본인은 “이제까지 모든 악장의 비극성을 해결하고 밝은 인생관과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작곡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베토벤 교향곡 5번이 전해주는 마지막 승리의 메시지와 연관 짓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쇼스타코비치가 교향곡 5번과 관련해 남겼다는 언급들은 어딘지 ‘유체이탈’적인 화법인 경우들이 많습니다. 아마 이 곡을 작곡할 당시 쇼스타코비치의 마음속에서 가장 절박했던 것은 ‘음악이 마지막 방점을 찍는 순간, 나는 어둠의 터널에서 빠져나와야 한다’였을 겁니다.
▶에브게니 므라빈스키,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84년/Warnermusic
본문에서도 언급했듯이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을 초연한 지휘자와 악단이다. 특히 1984년 EMI(현재 Warnermusic)에서 발매한 음반은 필청반으로 꼽혀왔다. 한데 아쉽게도 국내 매장에서 구할 수 없는 실정이다. 현재 국내에서 구입 가능한 음반으로 1961년 노르웨이 베르겐 음악제 실황, 또 1973년 일본에서 가졌던 실황음반 등이 있다. 일본의 신생 레이블 알투스(Altus Music)에서 발매했다.
▶레너드 번스타인,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59년/SonyMusic
번스타인은 평생에 걸쳐 쇼스타코비치를 들겨 연주했던 지휘자다. 1978년 뉴욕 필하모닉을 이끌고 내한했을 때도, 그는 한국 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을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했다. 당시 연주는 세종문화회관 개관을 기념하는 초청연주회였던 동시에 한국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공식적으로 연주된 첫 사례였다. 그는 1979년에도 뉴욕 필하모닉을 이끌고 쇼스타코비치의 5번을 녹음했으나 이 지면에서는 ‘젊은 번스타인’을 만끽할 수 있는 1959년 연주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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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