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년 전, 나는 미야베 미유키를 인터뷰하기 위해 도쿄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를 만나는 것은 오랜 바람이었다. 계기는 독자펀드였다. 독자들이 모아준 5,000만원이 아니었다면 그를 만나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렸으리라. 당시 인터뷰를 정리하며 글의 말미에 나는 이렇게 적었다. “본사가 10주년이 될 때쯤 한 번 더 그를 만나고 싶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다. ‘다시 만난다면 계기가 있어야 할 텐데 10주년은 좋은 구실이 되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10주년 기념작으로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을 내자고 마음먹었을 때, 비로소 나는 ‘다시 만나고 싶다’는 바람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인터뷰처럼 밋밋하게 말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이벤트화할 수는 없을까. 그러다가 문득 ‘독자원정대를 꾸려보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던 것이다. 이번에는,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독자들의 바람을 이루어주자. 비용은 전부 출판사가 대겠지만 공짜는 없다. 질문지도 만들고 인터뷰도 하고 하여간 처음부터 끝까지 싸그리몽땅 독자들이 직접 하게 하자, 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이제와 고백하건대 인터뷰 시간을 온전히 독자들에게 맡기고 출판사는 전혀 관여하지 않기로 한 결정이 불안하기도 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다들 아마추어일 텐데. 하지만, (1) 오랫동안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을 읽어왔으며 (2) 일본어로 대화가 가능한 데다 (3) 독자원정대 이벤트에 지원한 수많은 경쟁자들을 실력으로 물리치고 티켓을 획득한 세 명의 독자들은, 본인들의 오랜 바람을 이룸과 동시에 나의 걱정도 단숨에 기우로 만들어 버렸다. 인터뷰를 시작하고 삼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작가는, 3년 전 내가 찾아갔을 때만 해도, 프라이버시에 관한 질문이나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질문을 받지 않거나 단답형으로 대답하기 일쑤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한국 독자들에게 일본의 정치가가 실례되는 말을 해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며 말문을 연 미야베 미유키가, “일본은 아직 멀었다, 지금 아베 수상은 거짓말만 한다는 느낌”이라거나 “일본 영화는 지고 있다, 내 소설이 영화화된다고 했더니 그렇다면 한국에서 만드는 편이 낫겠다고 말해준 일본의 배우가 있을 정도”라는 얘기를 들려주었을 때, 우리는 약간 놀랐다. ‘일본 출판계의 성차별 문제’에 대해 언급한 뒤에는 “아주 친한 편집자가 아니고서는 이런 얘기를 하지 않는데”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왜 이런 말들을 스스럼없이 털어놨을까. 한국에서, 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준 독자들이, 어렵사리 바다를 건너 나를 찾아왔으니, 나 역시 하나마나 한 얘기 말고 일본 매체들에게도 거의 하지 않았던 대답을 들려주고 싶다, 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장소는 도쿄에 위치한 미야베 미유키의 사무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쾌청. 다음은 2015년 5월 22일, 14시부터 약 두 시간 반에 걸친 만남의 기록이다.
분량 맞추기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
미미: 미용실 갈 시간이 없었어요. 머리가 많이 길죠? 평소에는 지금보다 훨씬 짧거든요. 흰 머리 염색한 것도 색깔이 좀 빠졌고(웃음). 참 잘 와 주셨어요. 만나서 반갑고 와줘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다들 일본어를 잘하시는군요. 일본어 공부를 하시나요? 아, 시원한 음료 드시고 긴장도 푸세요. 보내주신 질문지를 보면서 질문이 너무 많지 않은가 생각했는데, 하나하나 읽으면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제 작품을 읽어 주셨다는 게 전해져서 기뻤어요.
정림: 저희도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단숨에 읽었어요.
미미: 이렇게 두꺼운데요? 이 작품은 신문에 매일 연재했는데, 연재 한 회분이 원고지로는 두 장 반 정도이고 단행본으로는 한 쪽 반 정도예요. 실제 책으로 나왔을 때 분량이 얼마나 될지는 저도 몰랐거든요. 연재를 마친 글을 책으로 만들기 전에 엄청나게 두꺼운 교정지를 받고 어느새 이렇게 많이 썼을까 하고 놀랐을 정도예요. 이걸 단행본으로 엮으면 꽤 두꺼운 책이 되겠다는 출판사의 말에, 어쩜 나는 매번 이렇게 길고도 두꺼운 책만 낼까 하고 자책했지요. 아, 또 길게 쓰고 말았어, 또 책값이 비싸지겠구나 싶어서 독자분들에게 죄송한 마음입니다.
정림: ‘행복한 탐정’ 시리즈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작품도 꽤 두꺼웠지요.
미미: 점점, 점점.
정림: 더 두꺼운 책으로.
미미: 갈수록 두꺼워져버려서(웃음).
정민: 연재하기 전에 분량을 정해 놓진 않으시나봐요?
미미: 신문 연재는 일 년 정도로 대략적인 기간을 정해 놓지만 거의 연장하게 돼요. 제 연재가 끝나면 그 후에 어느 작가가 연재할지도 이미 정해져 있는데 대부분 안면이 있는 작가랍니다. 다들 저보다 바쁜 작가들이라 제가 한 달 혹은 두 달 더 연장해야 한다고 하면, “오오! 연장해! 연장해! 연재 준비를 전혀 못 했거든. 연장해 줘!”라고 해요(웃음). 그 바람에, 그럼 연장하지 뭐, 하는 마음에 점점 길어지는 거지요. 걱정스러운 일이에요.
정민: 독자 입장에서는 기쁜 일인데요.
미미: 한데 지난달에 나온 책은 어쩌다 보니 비교적 짧았어요. 독자분들이 다들 “짧네요, 짧네요” 하면서 크게 실망했다는 듯이 “이번에는 짧아서 금방 읽었네요” 하는 거예요. 짧다고 실망한 분들이 너무 많아서, 차라리 긴 편이 나을까, 하고 굉장히 고민했습니다.
정민: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도 힘드시겠어요.
미미: 역시 600페이지 정도는 되어야 하나 싶기도 하고. 분량 맞추기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랍니다. 마침 여러분이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과 관련해서 오셨으니 알려 드리죠. 다음에 나올 책도 ‘행복한 탐정’ 시리즈예요. 아마 2016년 2~3월쯤 단편집이 나올 거예요. 원고지 100~200장짜리 단편 네 편 정도로 구성할 예정인데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만큼 두껍지는 않을 겁니다.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은 글자가 빽빽이 들어차 있잖아요. 다음 단편집은 글자를 넉넉하게 배치해서 좀 더 읽기 편하게 하려고요. 아, 그러면 또 도시락 상자가 되어 버리겠군요.
정민: 책장에 진열했을 때는 그게 더 근사해요. 스기무라가 등장하는 단편들은 어딘가에 연재하고 계신가요?
미미: 네, 잡지에 연재중이에요. 원래는 잡지사 한 군데와 연재 약속을 했지만, 의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한 군데에서도 연재하고 있어요. 그쪽 이야기가 가장 길지만요. 단편 네 편 가운데 세 편이 완성되어 있으니 나머지 한 편만 더 쓰면, 내년 봄에는 책이 나올 거예요. 스기무라가 어떤 경위로 탐정사무소를 차렸는지를 비롯하여 사립탐정이 된 그의 일상을 자세히 그렸습니다. 탐정으로서 스기무라가 다루게 되는 사건은 그렇게 큰 사건이 아니에요. 비교적 작은, 오늘날 일본 사회에서 어느 정도 규모의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가능성이 있는 사건이지요. 스기무라가 특별히 싸움에 소질이 있다거나 그렇다고 컴퓨터를 잘 다루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 스기무라가 갑자기 어려운 사건을 다루지는 못하기 때문에 무척 일상적인, 이를 테면 이사해서 살게 된 동네 아주머니가 쓰레기장 청소 당번을 대신해 줄 테니 이걸 조사해 달라는 그런 사건부터 시작합니다.
세월호 사건, 늦었지만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미미: 북스피어에서 굉장히 빠른 주기로 제 작품들을 번역 출판해 주셔서 정말 감사할 따름이에요. 그 덕분에 한국 독자 분들이 거의 시차 없이 읽으실 수 있는 것 같아요.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이 오시기 직전에 저희 사무실 직원이 지금까지 북스피어에서 펴낸 제 작품 목록을 보여 줬거든요. 서른여덟 작품이나 되었어요. 이렇게 많이 내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동료 작가들과 모이면, 한국 독자 분들이 일본의 미스터리와 엔터테인먼트 소설을 많이 읽어 주신다는 사실에 함께 기뻐하고 고마워한답니다. 요즘 두 나라 사이가 상당히 어려운 시기인데요, 언제나 저희 책을 읽어 주는 한국 독자 분들에게 일본의 정치가가 실례되는 말을 해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습니다.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저희가 쓴 신간이 나오면 읽어 주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고마웠는지 이번 기회를 통해 꼭 말로 전하고 싶었어요. 한국 독자 분들 덕분에 일본 작가들이 얼마나 위로와 격려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정민: 좋은 소설은 국경을 초월하니까요.
미미: 맞아요. 그것이 저희들에게 무엇보다도 격려와 용기가 됩니다. 작년에 한국에서 대단히 불행하고 슬픈 일이 있었잖아요. 세월호 사건이요.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에 저는 TV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미스터리나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학생이 그 배에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동료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일본이 동일본 대지진으로 무서운 일을 겪었을 때 한국의 독자들이 진심으로 저희를 걱정해 주셨듯이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뉴스만 봤습니다. 정말 슬픈 사건이었으니, 여러분도 무척 괴로우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늦었지만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림: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타국의 소식에도 늘 관심을 갖고 계신가요?
미미: 그럼요. 아침부터 일하는 편인데요, 일어나자마자 대체로 NHK 위성방송 채널의 월드뉴스를 봐요. 물론 화산 분화나 지진, 큰 비 소식도 체크해야 하지만 일본 국내 뉴스는 안타깝고 무서운 사건이 많아서, 자, 이제 일하자, 하고 마음먹으려던 참에 그런 사건을 접하면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슈우- 하고 기운이 빠져 버리거든요. 월드뉴스를 보면 예를 들어 (브라질) 리오 카니발 개막 소식도 알 수 있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접할 수 있잖아요. 요즘에는 이슬람 관련 뉴스가 많아서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꼭 챙겨 봅니다. 한국의 가장 큰 방송국의 뉴스를 메인으로 해 주니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있구나 하고 알 수 있어요.
서영: 뉴스는 사무실 출근하기 전에 보시는 건가요?
미미: 지금은 작업실과 집을 합쳐서 쓰고 있어요.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두 군데로 구분해서 썼는데요, 대지진 후 원전이 멈췄으니 절전해야 하잖아요. 혼자 두 군데나 사용하는 건 사치라는 생각이 들어 형제와 동거하며 한 방에서 다 해결할 수 있도록 바꿨습니다.
정민: 그럼 오늘은 일부러 사무실에 나오신 건가요? 저희 때문에 일부러 오신 건 아닌지…….
미미: 무슨 말씀을! 사무실에는 일 문제로 자주 옵니다. 더군다나 여러분은 멀리서 오셨잖아요. 한 방에서 무엇이든 전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다 해결할 수 있더라고요. 제 작업용 책상은 이 정도 크기(성인 일곱 명이 다닥다닥 붙어 앉을 수 있는 크기의 사각 테이블)의 책상인데요, 동네 가구점에서 원목으로 주문 제작했어요. 평소 묵직한 책을 많이 올려놓으니까 책상 다리를 이 정도(두 손으로 원을 만듦) 두꺼운 나무로 여섯 개 만들어 세운 덕분에 저희 집에서 가장 튼튼한 가구가 되었지요. 동일본 대지진 당시 가장 심하게 흔들렸을 때도 그 밑에 들어갔어요. 3월 11일부터 15일까지는 매일 지진이 이어졌죠. 그때마다 긴급 지진 속보가 삐-삐- 하고 울려서 밤에 잠들 수가 없었어요. 도쿄는 그나마 안전한 편이었지만 센다이는 훨씬 큰일이었어요. 저는 겁이 많아서 줄곧 작업용 책상 밑에 이불을 깔고 잤답니다. 그때 아, 큰 책상이 있어서 다행이야, 하고 생각했지요.
정민: 편한 잠자리는 아니었겠어요.
미미: 제대로 매트리스를 깔고 잤기 때문에 괜찮았어요. 아직 추운 날씨였지만 두꺼운 이불은 불편하니 얇은 이불을 덮고 그 대신 보온물통을 끌어안고 잤어요. 책상 밑에 아담한 스탠드를 두고 책을 읽으며 지냈습니다. 평소에도 그 책상 밑에서 일을 했어요. 이쪽을 보며 일을 하다가 옆으로 몸을 틀면 작은 밥상이 있어 거기서 밥을 먹었지요. 딱 이 위치(미야베 작가의 정면)에는 책장이 있고 또 몸을 틀면 전화와 팩스, 또 몸을 틀면 접이식 침대가 있어서, 좁지만 필요한 건 다 갖추면서도 제대로 된 절전 생활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작업실과 집, 두 군데나 사용했던 생활은 뭐였을까,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콤팩트한 생활을 할 수 있구나 하는 걸 깨달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책이 넘치는 게 문제였어요. 어느 날 책을 정리하려고 바닥에 깨끗한 깔개를 깐 다음, 방향제나 건조제 같은 것과 함께 책을 늘어놓았지요. 그때 이 위에 매트리스를 깔면 잘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 뭐예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책을 꺼낼 수가 없으니 역시 제대로 정리해야겠구나 싶어서 결국 사무실에서 빌린 창고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야기하다 보니 샛길로 샜군요. 아무튼 지금은 대체로 그렇게 생활하며 일하고 있답니다.
무리해서 많이 쓰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서영: 이번 인터뷰의 취지를 말씀드릴게요. 3년 전 북스피어가 에도시대물인 『안주』의 한국어판을 펴낼 때 미야베 선생님을 인터뷰한 적이 있지요. 북스피어는 올해 6월 18일로 창립 10주년을 맞이합니다. 3년 전 인터뷰에서 10주년 때 한 번 더 선생님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말씀드린 기억을 더듬어 이번에 다시 한 번 청한 건데요. 흔쾌히 승낙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한국에는 미야베 선생님을 보고 싶어 하는 독자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 독자들과 만남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그렇다면 이번에는 독자가 직접 미야베 선생님을 인터뷰해 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독자 분이 이곳에 오실 수는 없으니까요, 저를 포함한 세 명의 독자가 대표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미미: 신간이 나올 때마다 발 빠르게 번역 출판해 준 북스피어에 감사드립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신간이 나오면, 독자분들이 감상을 교환하며 이번 시리즈물은 이렇게 전개되었구나, 하고 이야기를 나눈다고 들었습니다. 작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지요. 이번에 독자 세 분을 눈앞에서 만나게 되어 기쁘고, 오늘 와주신 분들 뒤에 제 책을 읽어 주는 수많은 독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마운 마음입니다.
정림: 선생님께서는 올해만 해도 1월에 『비탄의 문(悲嘆の門)』 상하권과, 4월에 『사라진 왕국의 성』을 출간하셨지요. 연달아 장편 작품을 내시느라 많이 바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근황이 궁금합니다.
미미: 맞아요, 책이 연달아 나왔지요. 전부 신문과 주간지에 연재했던 작품인데요, 생각보다 빨리 썼습니다. 예를 들어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은 다 쓰고 나서 책으로 간행되기까지 1년 10개월의 사이가 벌어졌어요. 저는 이미 작품을 끝냈지만 연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지요. 앞으로 책으로 나올 분량이 저금되어 있는 상태였어요. 최근 연달아 척척 나왔던 작품은 사실 모두 작년 4월에 작업을 마친 거랍니다. 작년 8월과 11월에 나온 책, 그리고 얼마 전 나온 책은 전부 완성된 상태였지요. 그래서 요 1년간은 정말 편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책이 나와서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대략 2007년부터는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을 포함해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썼어요. 꼭 쓰고 싶었던 이야기, 쓰는 동안 제 자신이 즐거워지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일주일에 일요일 하루만 쉬며 꼬박 일했더니 작년 4월에는 모든 작업이 끝나 제 손을 떠나더군요. 책으로 만들어질 일만 남자, 저는 공기 빠진 타이어처럼 되었어요. 책이라는 저금통은 있지만 나라는 저금통은 텅 비어서 거꾸로 들고 흔들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상태였지요. 그때부터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기도 하고 가끔은 도쿄 디즈니랜드에 놀러 갔어요. 저희 집에서 한 30분 정도면 갈 수 있을 만큼 가깝거든요. 또 저희 집 고양이와 놀기도 하고 산책도 하면서 지냈습니다. 서너 달은 그렇게 생활하고 그 후로는 조금씩 단편을 쓰거나 다음 장편을 위한 조사를 하거나 장편을 쓰기 위해 읽어야 할 책을 읽었어요. 한가롭게 지냈답니다.
정민: 책 저금을 위해 하루에 몇 시간 작업하시나요?
미미: 단행본 페이지로 말하면 10페이지 정도일 거예요. 오늘은 여기까지 쓰자, 이 대화 장면은 중요하니까 오늘 안에 다 써야지, 하고 그날의 할당량을 정해서 씁니다. 평소에는 아침 8시부터 일을 시작하는데요, 특히 여름에는 워낙 덥기 때문에 5시에 일어나서 선선할 때 일을 해치우고 오후부터 더운 시간대에는 시원한 곳에서 책을 읽어요. 대신 밤에는 10시쯤 잠자리에 들지요. 그래서 밤놀이를 하지 않게 됩니다. 컨디션이 좋으면 두 시간 만에 할당량을 채우기도 하지만 반대로 대여섯 시간을 끙끙대도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날도 있어요. 그런 날은 일단 대여섯 시간 동안 열심히 한 다음, 오늘은 그만 됐어, 단것이라도 먹으러 가자, 산책하러 가자, 하는 식입니다.
서영: 끝나는 시간은 정하지 않고 쓰고 싶은 분량을 달성하는 방식이군요.
미미: 그렇지요.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뒷부분에 스기무라가 나호코와 차 안에서 이야기하는 장면은 역시 단숨에 쓰고 싶었거든요. 그 앞뒤 부분을 포함해서요. 그때는 이틀 동안 30시간을 일했어요. 일하다 피곤해지면 의자에 기대어 쉬면서 나중에 다시 고쳐 쓰더라도 일단 쓸 분량은 다 채웠습니다. 그날은 아무래도 제 손으로 밥을 지어먹을 수가 없어서 가족이 차려준 밥을 먹고 오늘은 이만 자자, 하고 자버렸어요. 대체로 이런 일은 장편을 쓰는 중에 마지막 장면에서 한 번쯤 있지요.
정림: 그렇군요. 저는 동시에 여러 작품을 쓰시는 줄 알았어요. 동시에 여러 작품을 쓰시는 일은 별로 없나요?
미미: 연재는 동시에 하고 있어요. 일주일 단위로 나눠서 말이지요. 때문에 일요일은 하루 쉬고 있답니다. 예를 들어 일주일은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을 쓰고 일요일 하루 어디 놀러가거나 쉰 다음, 월요일부터 『안주』를 쓰는 식이지요. 그렇게 하면 딱 알맞은 느낌으로 머리를 전환할 수 있어요. 제 주변의 정말 바쁜 작가들은 매일 혹은 이틀에 한 번 꼴로 다른 작품을 마감하는 방식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못 해요. 최소한 일주일 단위가 아니면 뭐가 뭔지 모르게 되니까요. 일단 저부터가 혼란스럽거든요. 최소한 일주일, 이상적인 단위는 열흘, 그건 좀 어렵겠지만 이렇게 하다가 보름 단위로 두 작품을 동시에 쓴다면 가장 즐거울 것 같습니다.
서영: 왠지 로봇처럼 오전과 오후로 일을 나눠서 하신다고 생각했어요.
미미: 전 그게 안 돼요. 오늘 하루 예를 들어 3페이지만큼 쓰자, 이 중요한 정보를 다 쓰면 오늘은 그걸로 끝이야, 하고 분량을 달성하고 나면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해요, 절대로. 특히 그날의 분량 끝 무렵에 가서 저녁밥을 먹으면 흐물흐물 늘어져서 조금 남은 분량조차 쓸 수가 없어요. 그래서 밤에 일하는 작가는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저녁밥 먹고 샤워하고 나면 전 더 이상 못 씁니다. 좋아하는 TV드라마는 일단 녹화해 둔다고 해도 역시 보고 싶잖아요. 너무 무리해서 많이 쓰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공부라기보다는 책을 읽으며 잡학을 쌓았지요
정림: 이제 작품 얘기를 좀 해볼까요.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에서 버스 납치 사건 장면은 정말 긴장감이 느껴지는 한편 따뜻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어요. 개인적으로 버스 납치 사건의 승객뿐만 아니라 독자인 저까지 범인의 능수능란한 화술에 조종당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대목을 쓰실 때 ‘독자들이 이렇게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하고 목표하신 게 있을 것 같은데요.
미미: 방금 그 말씀대로 읽어 주길 바랐어요. 버스 납치 사건의 범인은 노인이지만, 납치 사건을 처음 구상할 때는 스타벅스 같은 커피숍이 점령당하는 것으로 생각했거든요. 그 편이 스기무라와 편집장이 말려들 확률이 높겠다 싶어서요. 커피 한 잔 마실까 해서 갔더니 그런 일이 벌어진 거죠. 어떻게 하면 커피숍을 점령할 수 있을까 하고 실제로 여러 군데의 체인점 커피숍에 가봤는데 벽이 유리로 된 커피숍이 많은 데다 대부분 출입구가 여러 군데여서 혼자서는 점령할 수 없을 것 같더군요.
한편 범인은 권총을 갖고 있어도 별로 무섭지 않은, 즉 굉장히 뛰어난 말솜씨를 지녀서 이 사람이 뭔가 말하면 들어버리고 마는 유형이 어떨까 생각했어요. 뛰어난 화술과 정중한 말투에 설득력까지 갖춘 범인이요. 그 사람이 권총을 들이대고 쏘기도 하지만 ‘죄송하군요, 이런 일에 말려들게 해서’라고 말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내가 범인이라면 ‘오늘 이곳에 온 여러분을 감금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젊은 여성들을 이런 곳에 가두다니 사죄의 뜻으로 나중에 달러화로 10,000달러를 지불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 출발점이었어요. 상대가 정말이지 난폭해 보이고 총을 빵빵 쏘아 대는 사람인 데다 딱 보기에도 제대로 일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에게 나중에 돈을 드리겠습니다. 정부에서 몸값을 받아 그걸 여러분한테 나눠드리지요’라고 말한들 절대로 믿지 않겠지요. 하지만 아주 신사적이고 뛰어난 말솜씨를 지닌 사람이 나중에 여러분한테 돈을 지불한다고 말하면 어느새 세뇌당해서 혹시 진짜로 주는 거 아냐, 하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뛰어난 말솜씨의 친절한 버스 납치범이라니 이상하지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생각해서, 그 장면을 읽을 때는 왠지 나도 구슬려지는 것 같아, 하고 느끼며 읽어 주길 바랐어요.
정림: 그럼 노인의 모델이나 실제 인물은 없는 거군요?
미미: 네, 없어요. 일본에서도 차량 납치 사건이 여러 번 발생해서 인질이 다치고 살해당했는데요, 굉장히 폭력적이고 슬픈 일이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스기무라가 다리를 묶여서 넘어지고 또 어깨를 다치긴 했지만, 누군가 총이나 칼에 맞는 전개를 만들지 않으려고 그런 일이 필요 없을 만큼 화술이 뛰어난 사람을 생각했어요. 이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면 설득당하는구나, 하고 상대의 약점을 잘 간파하는 사람이 가끔 있잖아요. 이야기하면 왠지 나를 꿰뚫어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사람으로 설정하고 싶었기 때문에 모델은 없습니다.
정민: 저도 학창시절에 그렇게 화술이 뛰어난 선생님, 학생들의 성격을 빨리 파악하는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요, 이 노인이 훨씬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미미: 아, 맞아요. 그래서 학생을 지도하는 데 능숙한 학교 선생님처럼 써야 한다고 생각했고, 소설 속에서 범인은 교사가 아닐까 하는 이야기도 잠깐 등장시킨 겁니다. 특별히 학생을 잘 파악하는 선생님이 있잖아요. 이 학생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는 편이 좋다, 이 아이는 이렇게 행동하고 있지만 사실 속마음은 이렇다, 하고 잘 알고 있는 선생님처럼 쓰고 싶었어요.
정민: 원서 뒷부분에 참고문헌으로 『마음을 조종하는 남자들(心をあやつる男たち)』이라는 책 제목이 적혀 있던데요, 따로 심리학 공부도 하셨나요?
미미: 전문적인 수준의 공부는 하지 않았어요. 그저 이런저런 책을 읽으며 공부라기보다는 잡학을 쌓았지요. 다행히 심리학에 관한 책이 꾸준히 나왔거든요. 심리학은 일본에서 일반인의 관심이 높아요. 진지한 책을 비롯해서 『내 취향인 그녀를 뒤돌아보게 하는 방법』, 『인기 있는 여자가 되기 위한 방법』 등 폭넓은 심리학 서적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사랑받는 여자가 되기 위한 비결』을 읽으며 이걸 읽고 어디다 써먹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웃음) 그래도 참고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읽었어요.
일상생활의 사소한 소망을 노리는 인간들이 싫었어요
정림: 이 작품의 테마인 다단계 판매와 투자사기는 한국에서도 한때 심각한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된 적이 있고 지금도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소설을 보니 일본은 한국보다 먼저 이 문제로 큰 진통을 겪은 듯 보입니다. 작품 전반에 걸쳐 나오는 다단계 판매와 가공투자사기라는 설정은 어떻게 하게 되셨는지요.
미미: 일본의 전후 사회는 다단계나 투자사기가 줄곧 문제였어요. 새로운 법률로 그것을 금지하면 이번에는 그 법망을 피해 가는 새로운 수법이 나옵니다. 지금도 골치 아픈 문제예요. 내가 태어난 1960년대에 나왔던 수법이 옛날에 잊힌 줄로만, 법률로 근절된 줄로만 알았는데 오늘날 인터넷을 통해 다시 확산되기도 하지요. 수법의 근본은 쇼와 30년대(1950~1960년대)에 유행한 것과 다름없는데도 인터넷에서 폭넓게, 더구나 옛날을 전혀 모르는 젊은 네티즌을 대상으로 확산되고 있어요. 수십 년 전의 수법인데도 아직도 그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서영: 구체적으로 어떤 게 있나요?
미미: 사람을 모집하죠. 펀드를 조성해서 참가자를 모집하는 방식이에요. 근본적인 구조 자체는 옛날과 다름없지만 광고할 때는 인터넷을 활용합니다. 집에서 스마트폰으로 바로 볼 수 있어서 잘 만들어진 화면을 보면 신뢰하게 돼요. 옛날처럼 호화로운 팸플릿을 만드는 것보다는 일상적이고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오기가 수월해졌어요.
서영: 선생님도 그런 걸 보신 적이 있나요?
미미: 저는 옛날에 매일 졸기만 했지만 법률 사무소에서 일했으니까요(웃음). 덕분에 지금까지 잘 방어할 수 있었지요. 이건 수상해, 하면서요. 원래 저희 집이 그쪽으로 굉장히 엄격해서, 세상에 편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없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거든요. 저희 집 가훈이 ‘무릇 돈이란 편하게 벌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예요(웃음). 저희 집은 노동자 집안이라, 일하지 않는 자는 돈을 벌지 못한다고 알고 있기에 아예 그런 건 상대도 하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신문과 주간지를 보면, 화장품, 건강 보조식품, 다이어트 식품을 취급하는 다단계 사기가 여전히 많잖아요. ‘깨끗한 피부를 갖고 싶다’, ‘건강해지고 싶다’, ‘열심히 일해서 저금했으니 이 돈을 좀 운영해서 이자를 얻고 싶다’ 같은 우리 일상생활의 사소한 소망을 노리는 인간들이 싫었어요. 생활에 밀착된 그 악랄하고 치사한 수법이 정말 싫었기 때문에 이번 작품에서 써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서영: 이미 대답을 해주신 것 같은데요. 만약 교코쿠 나쓰히코 선생님이나 오사와 아리마사 선생님처럼 가까운 사람이 다단계판매나 상품 구입을 종용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웃음)?
미미: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양동이에 물을 담아서 “정신 차리세요!” 하고 물을 끼얹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하고 물어보겠죠(웃음).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지만, 그래도 역시 무섭다고 느끼는 게 저도 자신할 수 없는 경우가 있어요. 이를테면 어떤 병을 앓게 됐을 때가 그런 경우죠. 아직까지는 좋은 비타민 영양제가 있다든지, 기미를 없애는 데 좋은 약이 없을까, 하고 비교적 행복한 이유로 영양제를 복용하고 있어서 괜찮아요. 하지만 저도 그렇고 저희 부모님이나, 형제자매, 친한 친구들이 큰 병을 앓게 됐을 때 의학으로는 못 고친다, 하지만 이걸 먹으면 낫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그때는 저도 자신이 없네요. 어쩌면 제가 적극적으로 그런 약을 사는 데 앞장서서 오히려 “정신 차려!”라는 소리를 듣고 물바가지를 쓸지도 모르죠(웃음). 저는 이유도 모른 채, 오사와 씨나 교코쿠 씨가 양동이에 물을 담아 저에게 끼얹으면서 “대체 뭐에 눈이 뒤집힌 거야!”라고 할지도 몰라요.
최근 들어 사이가 돈독했던 편집자가, 저보다도 젊은 편집자였는데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실감하게 됐는데요. 만약 제가 병에 걸리고 의사로부터 수술해도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그런데 이런 귀한 한약을 먹으면 낫는다, 라고 하면 그 약이 설령 200만 엔이 넘더라도 목숨은 소중하니까 기꺼이 사겠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드는 사기 경제 범죄가 싫은 거예요.
일본에서 이런 사기 범죄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어요. 물론 대규모로 이뤄진 것은 전후부터인데요. 전쟁 전에 나온 옛날 신문을 봐도 관련 기사들이 실려 있어요. 기도로 난치병을 낫게 한다면서 목돈을 받아 챙긴다든지. 이런 것에도 일종의 전통이 있어서, 세월과 함께 관련 지식이 축적되면서 진보해 온 것이죠. 예를 들어 라디오가 생기고 TV가 나오고 수많은 잡지가 만들어지면서 광고도 많아졌죠. 그리고 인터넷이 생겨나면서, 이렇게 새로운 매체가 만들어지면 그에 맞춰 새로운 수법이 만들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아요.
정림: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을 노리는 인간의 ‘악한’ 본성 때문이겠지요.
미미: 그렇죠. 그래서 아무래도 나이 든 분들을 많이 노리죠. 일본은 점점 고령화 사회로 가고 있잖아요. 저희 부모님도, 어머니가 81세, 아버지가 88세신데 아직 건강하시거든요. 몇 번이고 묏자리를 사라는 전화가 걸려 왔어요. 아무래도 우리 묏자리는 사두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이야기를 들어 봤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처음에는 묏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더래요. 개운(開運)을 위해서 이런 걸 사지 않겠냐고 하기도 하고 앞으로 가격이 올라갈 거니까 땅을 사라고 권유하기도 했다더군요. 일본에서는 원야상법(原野商法)이라고 하는데 전혀 개척이 되지 않은 벌판을 판매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앞으로 이곳에 신칸센 역이 들어서니까 미리 사두는 게 좋다는 식이죠. 저희 부모님 집으로 그런 전화가 종종 걸려오는 모양이에요.
정림: 지금 말씀하신 이야기가 바로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에 나오는 닛쇼 프런티어 협회의 수법과 같은 것이지요?
미미: 맞아요. 그런 거예요. 정수기 구입을 권유하는 전화가 걸려온 적이 있었어요. 마침 제가 부모님 댁에 있다가 그 전화를 받았거든요. 처음에는 약간 흥미가 생겼죠.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을 쓰기 전이었는데 정말로 정수기를 파는 전화인 줄 알고 이야기를 들어봤어요. 음이온이 나온다든지 여러 모로 좋은 점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한데 뒤로 갈수록, 암도 낫는다는 둥 고혈압과 당뇨병도 쉽게 고친다는 둥 어처구니없는 말들을 쏟아내는 거예요. 잠자코 듣고 있었다가 “새빨간 거짓말!” 하고 끊어버렸지요. 뭔가 좀 더 그럴싸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해서 계속 듣고 있었던 건데 말이죠. 이번 소설을 쓸 때 많이 참고가 됐어요.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일러스트
반지의 제왕과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
정림: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에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진 <반지의 제왕>이 나와서 반가웠습니다. 작품 속에서 스기무라 부녀가 명장면 베스트를 고르는 대목이 나오잖아요. 미야베 선생님이 꼽는 ‘명장면 베스트’는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미미: 저는 사실 <호빗> 시리즈를 더 좋아해요. <반지의 제왕>은 너무 거대한 이야기라서요. <호빗> 정도의 이야기가 재미있어요. <반지의 제왕>에도 좋아하는 장면이 많이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 음악이 좋았어요. 그래서 O.S.T도 구입했거든요. 스기무라와 모모코에게는 명장면 베스트 10을 꼽도록 했지만, 저는 음악이 더 좋았어요.
정림: <반지의 제왕>을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에 등장시킨 것은 집필 당시 이 작품에 빠져 있었기 때문인가요?
미미: 스기무라가 딸과 함께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고, 스기무라는 매일 밤 모모코가 잠들기 전에 딸에게 책을 읽어주잖아요. 모모코가 그런 판타지 소설을 읽고 싶어 하는 나이가 되지 않았나 생각했어요. 저 역시 영화 <반지의 제왕>을 좋아하기 때문에 작품 속에 넣게 된 거죠. 하지만 지금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을 쓴다면 아무래도 <호빗>을 넣을 것 같아요. <호빗>에서 스마우그가 나오는 장면은 정말 근사하지 않나요?
영화 <반지의 제왕>은 DVD로 여러 번 봤는데요. 원작 소설은 읽지 않았어요. 일본에는 아주 오래된 번역본밖에 없거든요. 최신 번역본이 나오지 않았는데, 옛날 버전은 옛날 말투라 익숙하지가 않아서 못 읽겠더라고요. 하지만 『호빗의 모험』은 어렸을 때 읽은 책이에요. 그래서 지금 읽어도 정겹게 느껴져요.
정림: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에서 스기무라가 『반지의 제왕』 영어 원서에 도전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그런 번역 사정이 있었기 때문인가요?
미미: 네, 저는 영어 원서를 읽을 수 없으니까 하루 빨리 새로운 번역본이 나와 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서 그 장면을 썼어요. 일본에서는 비교적 오래 전에 나온 책일지라도 이 사람의 번역이 훌륭하다고 하면 좀처럼 새로운 번역본을 내지 않아요. 하지만 사용하는 말이 달라지기도 하고 말투가 바뀌기도 하잖아요. 그런 부분을 감안해서 새로운 번역본을 내주면 좋겠어요. 특히 고전 작품은 더욱 그렇죠.
서영: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의 테마가 되는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 그림을 스기무라 부부처럼 우에노 국립 미술관에 가서 보셨는지요? 어떤 계기로 이 그림을 작품의 모티브로 사용하게 됐는지 궁금한데요.
미미: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를 보러 미술관에 가긴 갔어요. 그런데 두 시간은 줄서서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지요. 억울한 기분도 들고. 그때 미술관 기념품점에서 화집과 그림엽서를 팔았거든요. 대신에 그걸 사왔어요. 그때는 이런저런 일 때문에 무척 바쁜 시기였거든요. 두 번 다시 보러 가지 못하는 바람에 화집을 보고 글을 썼어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들어가지 못했지.’ 그때를 떠올리면서 쓴 거예요.
정림: 이 그림을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의 모티브로 삼겠다 생각하고 보러 가셨던 건가요?
미미: 그건 아니고. 단순한 이유에요. 제가 렘브란트를 좋아하거든요. 모처럼 일본에서 전시회가 열리니까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한: 못 보고 돌아온 원통함을 작품 속 스기무라와 나호코의 경험으로 푸신 거군요(웃음).
미미: 그런 셈이죠(웃음).
‘일단 검색을 한다’가 가장 다른 점
서영: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사건 해결을 위해 인터넷으로 다단계판매 피해자의 정보를 수집하는 대목을 보면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인터넷 검색에 걸리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라는 소설 속 문장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미야베 선생님은 인터넷을 자주 이용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요. 그럼에도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을 보면 그 영향력에 대해서는 깊이 실감하고 계신 것 같아요.
미미: 인터넷은 기본적으로 매우 훌륭한 시스템이지요. 수많은 어려운 문제들, 예를 들면 해킹으로 인한 정보 유출 등을 제외하면 말예요. 앞으로 점점 더, 뭐라고 할까요, 더욱더 세련돼진다고 할까요. 세련되고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발전할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은 아직 발달 과정에 있는 중이죠. 다들 시스템의 충돌이나 악성 바이러스 문제로 골머리를 앓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그래서 소설을 쓰는 컴퓨터에는 굳이 인터넷 연결을 하지 않아요. 취재할 때도 인터넷을 이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정보가 너무 많으니까요. 지금까지 쭉 해온 것처럼 서점에 가서 알고 싶은 분야의 책을 찾아보죠. 예를 들어 이번엔 케이크 가게에 대한 소설을 쓴다고 하면 서점에 가서 파티시에가 쓴 책을 찾아보는 식이죠. 이렇게 하는 편이 익숙해서 오히려 저는 더 쉬워요. 불편하지도 않고요.
다만 요즘에는 모두들 일단 검색부터 하니까, 작품에서 그런 부분을 충실히 묘사해두지 않으면 부자연스럽겠죠. 모르는 단어가 나왔다, 이 영화가 보고 싶다, 지금 어디서 하고 있지? ……이런 상황에서는 백이면 백 인터넷을 이용하기 때문에, 저한테는 검색하는 습관이 없지만 쓰지 않으면 안 되죠. 그래서 꽤 의식하면서 쓰는 편이에요. 저는 하지 않지만 젊은 사람이라면, 대학생이라면 이 부분에서 검색할 거라고 생각하며 글을 써요.
속편으로 쓰고 있는 스기무라가 사립탐정이 된 이후의 이야기가 그런 건데요. 옛날에는, 예를 들어 여기에 탐정이 있고 의뢰인이 찾아오죠. ‘자기가 살고 있는 집 근처에서 아주 오래 전에 사건이 일어났다, 자기는 그 사건에 대해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어떻게든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으니 조사해 달라’는 식인 거죠. 예전 같으면 사건을 맡게 된 탐정이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은 의뢰인의 동네잖아요. 그리고 지역 도서관에 가서 옛날 신문을 들춰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검색부터 하죠. 관련 키워드 몇 개를 넣어서요. 그렇게 하면 실제로 알게 돼요. 사건만 정리해서 올려놓는 사이트도 있으니까요.
스기무라 덕분에 사립탐정 소설을 정말 오랜만에 쓰면서 무엇이 달라졌나 생각해 봤더니 ‘일단 검색을 한다’가 가장 다른 점이라는 걸 절감했어요. 그건 그것대로 편리하죠. 예전 같았으면 일단 해당 장소에 가서 이웃들 탐문하고 단서를 얻는 데까지 한 챕터를 썼다면, 지금은 4페이지 정도만 써도 대략 어떤 사건인지 설명이 가능하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글이 길어지는 저로서는 고맙게도 페이지를 절약할 수 있게 됐어요(웃음). 또, 모니터로 무언가를 본다는 게 당연한 시대가 됐잖아요. 제 책은 아직 전자책으로 안 나왔지만 앞으로는 전자책으로 소설을 읽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올 거예요. 그때가 오면 저도 전자책 출판을 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일본에서 전자책 시장의 90 퍼센트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건 코믹(comic)이에요. 왜냐하면 일본인도 소설은 종이책으로 봐야 한다는 감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코믹은 그림을 크게 할 수도 있고, 권수가 많으니까 (책을 소장하려면) 공간이 필요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전자책으로 읽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점점 모니터로 책을 읽게 되면 책방도 점점 압박을 받게 되겠죠. 책방을 너무 좋아하는 저로서는 그렇게 된다는 것도 마음 아파요. 인터넷 사회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게 바로 그런 부분이에요. 그것 외에는 정말 편리하고 굉장한 발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야베 미유키 인터뷰는 [특별 기고] 미야베 미유키 “내가 SNS를 하지 않는 이유” (2)로 이어집니다.
이상은, 당초 ‘야매 장르문학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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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반지의 초상미야베 미유키 저/김소연 역 | 북스피어 | 원제 : ペテロの葬列
인질 전원이 무사한 채로 사건은 종결되는 듯 보이지만 진짜 수수께끼는 이제부터다. 인질이었던 승객들 앞으로 죽은 범인이 보낸 거액의 위자료가 도착한 것이다. 죽은 노인은 어떻게 이토록 큰 금액을 인질들에게 보낼 수 있었을까. 대관절 왜 보냈을까. ‘당국에 신고해야 한다’는 주장과 ‘정당한 대가이니 그냥 가져도 된다’는 주장으로 나뉘어 동요하는 승객들 사이에서 스기무라는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나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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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림, 이정민, 박서영
gleem
2017.04.05
미미여사의 작품들은 일본 고전의 이야기라 자주 흥미를 잃어 안보고 있었는데, 이 책은 현대물이라고 하니 관심이 가네요.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River
2016.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