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5번
“언젠가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말은, 구스타프 말러의 어록 중에서도 오늘날 가장 많이 회자됩니다.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를 염두에 둔 발언이었습니다. 말러가 네 살 아래의 슈트라우스를 처음 만났던 때는 1888년이었습니다. 스물여덟 살 때였지요. 성악가 요한나 리히테르를 향한 사랑이 실연으로 끝나고 첫번째 연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를 작곡했던 것이 그로부터 4년 전, 이어서 그 연가곡의 선율을 모티브로 삼아 교향곡 1번 ‘거인’을 완성했던 해가 바로 1888년이었습니다. 당시 말러는 ‘바흐의 도시’로 유명한 라이프치히에서 카펠마이스터로 일하고 있었지요.
이 시기에 첫 대면한 두 청년은 독일 후기 낭만음악의 대명사로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크 시대의 바흐와 헨델에 비견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음악사의 라이벌’이라는 후대의 평가인 셈이지요. 하지만 말러와 슈트라우스를 바흐와 헨델에 비유하는 것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바흐와 헨델은 동시대를 살았음에도 서로를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지요. 그저 서로의 존재를 알았을 뿐이었고 실제로 생전에 대면한 적도 없습니다. 반면에 말러와 슈트라우스는 달랐지요. 두 사람은 서로를 강하게 의식했습니다. 기질과 음악적 스타일이 매우 달랐던 두 사람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경쟁했습니다. 특히 상대방에 대한 의식의 정도는 슈트라우스보다 말러 쪽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말러가 성격적으로 더 내향적인데다 내면적으로도 복잡한 사람이었기에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앞에서 인용한 말러의 발언이 등장합니다. 그의 아내였던 알마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정확한 문장을 옮겨보자면 이렇습니다. “그의 시대가 가고 나면,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 이 문장 속에 등장하는 ‘그’가 슈트라우스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물론 그것은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겠지요. 아내에게나 털어놓을 수 있는 내밀한 언어에서나 가능한 표현이었을 겁니다. 아울러 그는 자신이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을지라도, 아내인 알마가 살아남아서 ‘자신의 시대’를 목격할 것이라고 예감합니다. “나의 빛이여, 당신은 바라건대 확실히 그 시대를 보게 될 거야. 당신은 안개 사이로 태양을 알아본 사람이니까.”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말러의 ‘말’은 알마가 말러 사후에 썼던 세 권의 책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이름을 내건 책을 평생에 걸쳐 세 번 썼습니다. 1924년, 1940년, 1960년에 각각 쓰인 그 책들은 때때로 상충되는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오늘날 ‘인간’으로서든 ‘음악가’로서든 말러 연구의 기초 자료로 빈번히 인용됩니다. 앞의 언급들은 첫번째 책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같은 책에는 말러가 쾰른에서 <교향곡 5번>의 초연을 준비하던 1904년 5월, 알마에게 보낸 편지에서 했던 언급도 등장합니다. “아, 내 교향곡들을 내가 죽은 지 50년 후에 초연할 수 있다면.”
말러의 현세적 자기 부정이 개인적 기질에서 비롯함은 널리 알려진 해석이지요. 알려져 있다시피 그의 분열적 자아상은 이미 유년기에 또아리를 틀었습니다. 술집 포주라는 직업을 갖고 있던 마초적인 아버지 베른하르트, 만성두통과 심장병을 앓았던 심약한 어머니 마리, 부모의 불화와 술집에서 노상 들려오던 주정과 매춘의 소음, 열다섯 살에 겪었던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 등등. 훗날 말러가 “나는 3중의 의미에서 고향이 없다”고 술회했던 그 이면에는 ‘유태인’과 ‘가톨릭’, 그리고 ‘보헤미아 태생’이라는 세 가지 사실 이외에 이미 유년의 상흔들이 존재했음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말러는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이었던 1910년 여름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를 만나 평생토록 자신을 지배해온 트라우마들을 털어놓고 시인하지요.
말러의 음악적 본령은 당연히 교향곡입니다. 그는 피아노곡이라든가 실내악, 오페라 등의 작품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가곡을 여러 작품 남기긴 했지만 그 가곡들의 상당수도 종국에는 교향곡 속으로 들어옵니다. 한데 말러의 교향곡들은 이전의 교향곡들이 보여줬던 전통적 형식, 기승전결의 구조에서 멀찌감치 벗어납니다. 오히려 이중적 자아에 시달리는 개인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아울러 삶의 우연성이나 감정의 즉흥성 같은 요소들, 예컨대 계몽주의가 아직 건재하던 시절에만 해도 비이성적인 것으로 손가락질 받던 요소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런 까닭에 그의 교향곡들에는 ‘돌연한 변화’가 빈번히 등장하고, 듣는 이에 따라서는 장황하다고 느껴질 만한 부분들도 있습니다.
그에게 내려져 있는 음악사적 평가는 아마도 ‘낭만파적 교향곡의 마지막 작곡가’일 겁니다. 뒤집어 보자면 근대음악의 입구에서 과도기의 혼란을 겪어야 했던 음악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러는 그 과도기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분열적 자화상을 음악에 투영했습니다. 그렇게 근대로 접근해 갔습니다.
오늘 듣는 교향곡 5번에서 나타나는 악장들 사이의 급격한 변화들도 말러가 지녔던 짙은 고뇌를 보여줍니다. 물론 그 분열의 양상을 오로지 말러 개인의 내면으로만 읽어낼 수는 없겠지요. 당대적 현실 속에서 읽어낼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교향곡 5번이 보여주는 분열의 양상은 ‘세기말’이라는 외적 요인의 개입 없이는 온전하게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미 검증됐다시피 세기말은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맞이한 첫번째 좌절, 혹은 위기였으며 머잖아 다가올 공황의 전조(前兆)였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의 ‘거인’으로 다가와 있는 말러가 오스트리아 빈에 있었다는 사실은 어찌 보자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 곡을 쓰던 20세기 초반, 정확히 말해 작곡에 착수했던 1901년에 말러는 이미 ‘40대’라는 나이에 들어서 있었으며, 그는 세기말의 모든 양상이 집약된 도시 빈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1898년 빈 필하모닉의 지휘자로 취임한 말러는 1907년 빈 궁정오페라극장을 떠나 뉴욕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의 지휘자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약 10년간 빈에 머물렀습니다. 당시의 빈은 베네치아와 더불어 세기말을 대표했던 도시였지요. 제국주의가 꿈꿨던 이상향은 적어도 겉으로는 실현된 것처럼 보였지만, 도시와 사람들의 외양을 수놓은 화려한 탐미주의는 황폐한 속살을 간신히 감춘 외피였습니다. 당시의 40대가 오늘의 동년배에 비해 얼마나 더 성숙했는가를 거론할 필요도 없이, 말러는 유년기의 불안의식에 더해진 시대의 균열을 이미 특유의 촉수로 감지한 상태였습니다.
스스로 ‘4부작’이라고 칭했던 앞의 교향곡들(1번부터 4번까지)과 확연히 다른 다섯번째 교향곡은 바로 그 시점에서 탄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음악평론가 알렉스 로스가 <나머지는 소음이다>라는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언급은 적확합니다. 그는 교향곡 5번을 작곡하던 무렵에 말러가 처해 있던 심적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이 도시의 표면 뒤에 숨어 있는 균열이 곧 터져버릴 것임을 알고 있었다.”
말러는 “교향곡은 하나의 세계와 같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예민했으나 양심적인 음악가였던 그는 청년 시절에 자신이 동경했던, 적어도 세계의 일부라고 믿었던 이상주의적 서정과 평화로운 목가풍을 마침내 손에서 내려놓습니다. 그리하여 5번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으로 막을 올립니다.
1악장은 특이하게도 장송행진곡(Trauermarsch)이 10분 넘게 펼쳐지는 ‘해괴한’ 악장입니다. 게다가 군대의 행진 나팔처럼 들려오는 도입부의 트럼펫 팡파레. 그것은 오늘날 매우 감각적인 록음악처럼 들려오기도 하지만, 적어도 당대의 빈 사람들이 듣기엔 진부하다고 느낄 만큼 ‘보편적인 나팔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말러는 별다른 음악적 가공 없이 ‘날것’ 그대로의 나팔소리를 교향곡의 입구에 깃발처럼 내걸었습니다. 게다가 이어서 바이올린과 첼로가 연주하는 가요풍의 선율은 또 어떤가요? 마치 ‘저잣거리의 엘레지’와도 같은 그 선율은 군대의 행진나팔과 어울리면서 혼돈과 광란, 때로는 절규의 장면들을 펼쳐놓습니다. 말러는 그렇게 통속을 끌어들이면서 당대 사람들에게 여전히 익숙했던 ‘음악다움’과의 결별을 시도했거니와, 아울러 화해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치달려가는 세상의 단면들을 복잡하게 뒤엉킨 리듬과 선율로 묘사했습니다. 그리하여 훗날 철학자 아도르노는 이 첫번째 악장에서 어떤 파탄을 예감하는 “불길한 꿈”을 읽어내지요.
수많은 음악 연구자들이 입을 모아 얘기하듯이 2악장은 추락의 악장입니다. 치솟아 오르거나 가득 차올랐다가 힘없이 주저앉아 소멸하는 장면들이 여러 차례 반복됩니다. 주제를 재현하다가도 중간에 고개를 푹 떨군 채 그대로 침잠하고 맙니다. 아도르노는 이 뻥 뚫린 듯한 공허함을 중세의 신비주의에서 빌려온 개념으로 설명했거니와, 이른바 ‘파현’(破顯, Durchbruch)이 바로 그것이지요. “거대한 세상에 대한, 인간이 기계 부속처럼 맞물려 들어가 있는 사회의 맹목적 세계 운행에 대한 대응”이라는 해석입니다.
호른이 분위기 반전을 시도하는 3악장은 스케르초 악장입니다. 스케르초로서는 보기 드물게 연주시간이 약 20분에 달하는 이 악장에는, 말러의 교향곡에서 빈번히 얼굴을 내비치는 왈츠풍 무곡이 역시 등장하지요. 그러나 그 춤은 빈의 은성한 무도회를 연상케 하기보다는 오히려 해골들의 괴기한 춤처럼 들려옵니다. 이어서 4악장 아다지에토(adagietto)는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베니스에서의 죽음>(1971) 덕분에 유명세를 얻은 악장이지요. 하지만 말러가 “사랑의 고백”이라고 아내 알마에게 설명했던 것과 달리, 오늘날 이 악장은 유명 인사들의 장례식장에서 빈번히 연주되면서 ‘엇갈린 수용’의 한 사례를 보여줍니다.
마지막 5악장은 아이러니하게도 ‘문제적 악장’입니다. 19세기와 20세기의 경계인이었던 말러는 마지막 악장에서 결국 한계를 보이고 맙니다. 앞의 3개 악장에서 ‘세계와의 갈등’이라는 측면을 극한까지 묘사했던 말러는 마침내 마지막 악장에서 힘이 빠진 모습을 드러내지요. 음악사적으로는 베토벤 이후부터 낭만까지를 관통해온 ‘어둠에서 광명으로’의 이데올로기에서 그는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것일까요? 아도르노는 이 절충주의적인 마지막 악장에 대해 “강요된 화해”라는 평을 내놓고 있습니다. 말러의 교향곡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가장 널리 알려진 4악장부터 먼저 들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p.s. 레너드 번스타인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녹음(DG)은 말러 교향곡 5번을 얘기하면서 빼놓기 어려운 음반입니다. 실황연주입니다. 아마도 5번의 명연으로 가장 빈번히 거론되는 음반일 겁니다. 최근 LP로도 재발매돼 나왔는데 국내 매장에서 CD로는 구하기가 용이하지 않은 듯합니다. 추천음반 목록에는 올리지 않았습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93년/DG
번스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아바도 역시 말러 음악의 메신저였다. 생전의 그는 세차례에 걸쳐 말러 사이클을 진행했다. 1970~80년대에 빈 필하모닉과 시카고 심포니를 이끌고 말러를 연주했고, 베를린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로 재임하던 시절(1989~2002)에도 역시 말러 교향곡 녹음을 남겼다. 말년에는 암과 싸우면서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함께 다시 한번 말러 사이클에 나섰다. 추천하는 음반은 두번째 사이클의 일환이다. 번스타인의 낭만성 강한 연주와는 맛이 다르다. 과장없는 해석으로 객관성과 현대성을 구현하고 있다.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말년의 5번도 감동적인데 인터넷 동영상으로 쉽게 검색된다.
▶리카르도 샤이,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1997년/Decca
풍성하고 세련된 사운드로 말러 5번을 만날 수 있는 음반이다. 샤이는 확신과 자신감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콘세르트헤보우는 역시 명불허전의 연주력을 선보인다. 1악장 서주에서 터져 나오는 금관의 팡파레부터 듣는 이의 귀를 사로잡는다. 하지만 역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그 점이 좀 불편할 수도 있겠다. 예컨대 번스타인의 해석으로 4악장의 비극성에 익숙해진 이들은 샤이와 콘세르트헤보우의 연주가 너무 매끄럽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아바도와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반이 음질에서 다소의 아쉬움을 남기는 것과 달리, 이 음반은 해상도 높은 소리를 충실하게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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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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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8
비오는 금요일 점심, 문학수님의 칼럼을 읽으며 말러 교향곡 5번에 심취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