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전문용어인데 일상에서 장난스럽게 또는 상대방을 비난하기 위해 쓰는 단어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psycho’다. Psycho는 1925년 무렵까지 psychologist, 그러니까 심리학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 용어가 오늘날 사용하는 psychopath라는 개념으로 쓰이게 된 것은 1940년대부터였다. Psychopath라는 말이 요즘 유행인데 연원을 따져보면 이 말은 1885년부터 사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꽤 오래된 내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를 지칭해서 psycho라고 부르는 것은 결코 좋은 의미라고 말하기 어렵다. 물론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반어법으로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모르는 사람 사이에서 편하게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그랬다가는 대판 싸움이 날 것이다. 한국처럼 비정상적인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순수혈통주의’ 성향이 강한 국가에서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는 건 비정상 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결점이다. 물론 서양에서도 psycho라는 말이 욕설로 빈번하게 쓰이긴 하지만 이런 맥락과 달리 여전히 한국에서는 psycho와 관련된 마음의 병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통념이 강한 것이 문제이리라.
소위 월드스타가 된 가수 싸이의 영문명이 ‘Psy’인 것도 이런 통념에 대한 반어법이 아닐까. 오늘날 우리에게 비치는 것처럼 psycho라는 말에 부정적 이미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알고 보면 psycho는 어원상으로 그렇게 나쁜 말이 아니었다. 1925년까지 마음을 연구하는 psychologist를 지칭하는 용어였다는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Psycho의 어원은 무엇일까. 그리스 신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다면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신 에로스가 해코지를 하러 갔다가 오히려 사랑에 빠져버린 아름다운 여인 프시케(Psykhe)가 psycho의 어원이다. 라틴어로 건너오면서 철자가 Psyche로 바뀌어 영어로 전해졌다. 프시케는 고대 그리스어로 ‘마음’ ‘영혼’ ‘정신’이라는 뜻이었다. 여기에서 더 발전하여 ‘숨’ ‘생명’ ‘이해’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성서에서 야훼가 아담을 흙으로 빚어 ‘숨’을 불어넣었을 때 그 흙으로 빚은 육신은 비로소 영혼을 가진 최초의 인간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이런 프시케의 형상은 나비로 표현되곤 한다. 『장자』에서도 나비의 꿈이 하나의 주제로 등장하는데 이런 부분은 상당히 흥미롭다. 나비는 영혼이나 정신의 상징이었고, 따라서 육신과 분리된 영혼은 종종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런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psycho는 애초에 나비를 의미했던 것이다. <빠삐용>이라는 유명한 영화에서 주인공은 고립무원의 수용소를 탈출해 원주민 마을에 도착하는데, 거기에서 가슴에 나비 문신을 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왜 하필 나비 문신일까. 아마 주인공의 자유를 상징하기 위한 장치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빠삐용’은 프랑스어로 나비를 의미하는 papillon이다. 이 papillon이 영어로 넘어와서 pavilion이 되었다. 한국어로 ‘가설건물’이라고 멋없이 번역된 pavilion은 말 그대로 공원에 내려앉은 커다란 나비다. Pavilion이 펼쳐진 모습이 흡사 나비 같아서 이렇게 불리게 된 것이다.
이렇듯 Psycho는 pavilion에까지 연결되는 말이다. 여기에 analsys가 결합되면 더 그럴 듯해진다. Analysis는 ‘해방시키다’ ‘풀어놓다’라는 뜻이다. 접두어 ana- 는 ‘~을 향하여’라는 뜻이고 -sys는 ‘헐겁게 풀다’라는 뜻이다. 빡빡하게 죄어져 있는 마음을 헐겁게 푸는 것, 좀 더 시적으로 말하면 마음에 갇혀 있던 나비를 풀어놓는 것이 psychoanalysis, 바로 정신분석이다. 정신분석은 심리학의 일종이지만 정신의학은 아니다. 물론 의료적 행위라고 볼 수는 있겠지만, 마음의 병을 ‘치료’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학적인 치료방법은 아니다. 그래서 대체로 정신분석을 일종의 상담기술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많고 치료의 보조 수단처럼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이야 어떻든 정신분석의 원래 취지는 의학적인 치료로 해결할 수 없는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이 해결의 방법은 약물을 투여한다거나 외과적 수술을 실시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렇다고 정신분석이 의학적인 치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음의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이 의학적 치료와는 다른 독자적인 분야라고 보는 것이 낫겠다.
정신분석을 이론적으로 정립해서 하나의 학문으로 창시한 사람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다. 프로이트는 비엔나에서 활동한 유태인 정신과 의사였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정신의학의 방식에 회의를 느낀 프로이트는 과감하게 자신만의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고, 그 생각이 정신분석에 대한 이론으로 발전했다. 정신분석학이 다른 심리학 치료방법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마음의 문제를 ‘말하기’에서 진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정신분석학은 ‘상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에 대해 호소하는 상대방의 말하기를 분석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의사나 상담사가 상대방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내용을 통해 마음의 상태를 이해하려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자크 라캉(Jacques Laca)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분석가가 분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를 가진 당사자가 분석을 한다고 여기며 ‘분석주체’라는 개념을 썼다. 분석가가 할 일은 ‘분석주체’에게 분석을 계속하게 만드는 것과 이제 그만하면 분석이 다 되었다고 ‘끝’을 선언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이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함에 따라 다양한 이론과 학파들이 나와서 서로 비판적인 의견을 교환하기도 하는데, 이 과정에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정신분석의 흐름을 다 설명하기는 벅차고 다시 psycho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부정적인 뉘앙스와 달리 psycho는 나비처럼 붙잡기 힘든 인간의 마음을 지칭하는 말로 제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인간의 마음은 신비롭다는 소리가 아닐까. Psycho하면 떠오르는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실질적으로 우리가 누리는 일상의 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도 부정하기 어렵다. 대체로 정상적인 것이라고 불리는 문제에서 벗어난 것들을 우리는 psycho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주로 성욕과 관련해서 이런 경우가 많다.
우리는 바바리맨을 쉽사리 변태라고 부르는데, 이는 성도착증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영어로 도착증자는 pervert인데, 원래 이 말은 무언가를 왜곡하거나 뒤틀리게 만드는 것을 뜻했다. 말하자면 성욕이 뒤틀려서 표현된다는 것인데 이 말도 상당히 흥미롭다. 성욕이 뒤틀려서 표현되지 않고 바로 표현되어도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런 상황을 가리켜 성인은 모두 도착증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뒤틀린 성욕과 관련해서 가장 자주 쓰이는 말이 Sadism과 Masochism이다. Sadism이라는 말은 희대의 괴작 『규방철학』을 쓴 도나티엥 알퐁소 프랑소아 마르키 드 사드(Donatien Alphonse Fran?ois, marquis de Sade)라는 긴 이름을 가진 귀족출신 작가의 이름에서 유래했고, Masochism 역시 『모피를 입은 비너스』라는 몽환적인 책을 쓴 레오폴드 폰 자흐 마조흐(Leopold Ritter von Sacher-Masoch)의 이름에서 기인했다. 실제로 두 용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관련이 없다. 이 말을 창안한 사람은 리처드 폰 크라프트-에빙(Richard von Krafft-Ebing)이다. 그는 1886년에 『정신병리학적 성욕』이라는 책을 썼는데, 대중으로부터 치도곤을 당할 것이 두려워서 일부를 라틴어로 집필했다. 인류 역사에서 급진성이 환영받은 사례는 없다.
19세기는 명예를 최고로 여기던 시절이었으니 자기 검열이 더 심했을 것이다. 크라프트-에빙이 만든 말들은 Sadism과 Masochism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책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유입된 말로 homosexual, heterosexual, necrophilia, frotteur, anilingus, exhibitionism 등이 있다. 굳이 번역을 하지는 않을 테니 혹시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사전을 찾아보시면 되겠다. 이 단어들은 이제 우리에게도 익숙한 말이 되었다. 크라프트-에빙은 이런 개념을 ‘뒤틀린 성욕’에 대한 표현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 구분하는 기준 자체가 시대별로 달랐다는 것이 중요하다. 크라프트-에빙이 문제로 지적한 homosexual만 하더라도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정상적인’ 사랑의 행위였다. 어쩌면 우리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무엇이 정상이니 아니니 따지기 이전에 자신의 마음이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마음에 갇혀 있는 나비를 풀어주는 것이 정녕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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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미술, 영화, 대중문화 관련 글을 쓰고 있는 작가.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경북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란 그는 어릴 적에 자신을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구환경에 한동안 적응하지 못했으며 우주여행을 떠나는 그림을 그려서 꽤 큰상을 받기도 했다고 추억한다. 그는 자신의 모토를 "그림의 잉여를 드러내는 글쓰기" 라고 밝히며 글쓰기는 그림 그리기의 대리물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림에 대한 글을 계속 쓸 생각이라고 포부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 21>에 글을 발표하며서 본격적인 문화비평을 시작한 이후, 다양한 저서를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하나
2014.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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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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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