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싫어하는데, 어쩌다가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을 보게 됐다. 이유인 즉슨 영화에 관해서라면 신뢰하는 한 지인이 “아! 나도 블록버스터를 끔찍이 싫어한다니까. 그치만 혹성 탈출은 달라. 마치 몸에 좋은 패스트푸드 같다니까”라며 알 수 없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디 그럼, 나도 한 번…’ 하며 확인하는 심정으로 보았다.
여기서 하나 더 고백하자면, 나는 좀 고약하다 싶을 정도로 편견을 바꾸지 않는 유형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까짓것, 블록버스터가 다 거기서 거기지’ 하며 팔짱을 굳건히 낀 채 극장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점차 ‘어. 어. 왜 이러지’ 하다 그만 잔뜩 몰입하여 봐버렸다. 마치 만화 영화에 영혼을 뺏긴 아이처럼 나도 모르게 집중해 봐버렸다. 전투 신에 자본을 진탕 쏟아 부어 특수효과로만 치장했을 줄 알았는데, 영화가 시작되고 한참 지날 때까지 전쟁은커녕, 유인원과 인간 간의 심리적 교감만을 다루며 서사가 진행됐다. 나는 결국 ‘으음. 블록버스터에서도 이런 걸 하는군’하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물론, 대사의 수준은 조악했지만, 블록버스터에도 스토리가 생겼다는 게 꽤나 감격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바로 영화 속에 담긴 메시지였는데, 실로 충격적이었다. 어느 정도로 충격적이었느냐면, 15년 전에 영화 <캐스트 어웨이>를 봤을 때만큼 충격적이었다. <캐스트 어웨이>에서 톰 행크스는 4년간의 고독하고 혹독한 표류 생활을 마친 뒤, 마침내 극적으로 고향으로 돌아간다. 공기와도 같았던 문명과 가족마저 낯설어진 톰 행크스는 고향에 도착한 뒤, 묵묵히 하나의 일을 수행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표류로 인해 미처 완수하지 못했던 택배배달. 그러고 보면, 무인도에서 그가 외로운 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생존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고객이 탁송한 배구공(즉, ‘윌슨’)과 통조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주문이 있었기에 생존이 가능했던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든 생각은 심플했다. 톰 행크스를 살린 것도 ‘페덱스’였고, 톰 행크스가 살아나서 행한 임무도 ‘페덱스’의 배달이었다. 이 영화는 143분에 걸쳐, ‘무인도에서도 페덱스와 함께라면 살아날 수 있으며, 페덱스는 무인도에서도 살아남는 정신으로 임무를 완수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나는 실로 깊은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돈을 내고 143분 짜리 광고를 봤다니!’
영화 <혹성탈출> 스틸컷 (영어 잘하는 주인공 유인원 시저)
다시 <혹성 탈출>로 돌아오자. 전편의 부제가 ‘진화의 시작’인 탓인지, 이제 영화 속 광고는 ‘진화’하여 두 편을 담고 있다. 우선, 첫째는 ‘전력 공사’의 PR.
영화 속 인간들은 유인원들의 생활을 존중하고, 그들의 삶을 침범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간 지켜왔던 존중의 경계를 넘어야만 하는 일이 발생하니, 그것은 바로 ‘전력 난’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인간들은 전기를 아예 쓸 수 없게 됐다. 그리고 유인원들의 본거지에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수력 발전소’가 있다. 유인원들의 생존 공간에 침입한다는 것은 전쟁을 예고하는 위험한 일이지만, 인간들은 전기가 없으니 스마트 폰을 쓰지 못한다. 인터넷도 못 쓴다. 아이팟으로 음악도 못 듣는다. 게다가, 냉장고에 시원한 콜라가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얼음도 없다. 예고된 전쟁을 불사하면서까지, 가동이 중단된 수력발전소를 향해 전진하는 인간의 모습은 이제 전기는 우리에게 산소와 같다고 설득하는 것 같다. <캐스트 어웨이>는 2시간 이상의 ‘페덱스 광고’였고, <혹성탈출>은 전력공사의 홍보영화였다. 거, 참.
하나 이것도 약과일 뿐. 실로 놀라운 주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그것은 바로 ‘원숭이도 몇 년만 투자하면 영어를 한다!’는 것. ‘아니, 어째서 유인원이 영어를 한 단 말이야?!’라는 나의 의문에 영화는 답이라도 하듯, 주인공 유인원인 ‘시저’가 한 학자로부터 영어를 배우는 장면을 보여줬다. 학자는 침팬지에게 사과를 보여주며 앵글로 색슨 족 특유의 매끈한 발음으로 ‘애~쁠’이라고 하고, 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원숭이 시저는 ‘우우우~’ 옹알이를 하다가, 급기야 나보다 매끄럽고 유창하게 ‘애플’을 발음한다. 그때의 무력감과 충격이란. 게다가 더 깊은 좌절에 빠졌던 것은 종종 나도 못 알아듣는 ‘제이슨 클락(인간 주인공. 아, 이 무슨 이질적인 표현이란 말인가)’의 발음을 시저는 다 알아 들었다는 것이다. 더 충격인 것은, ‘시저’ 뿐만 아니라, 다른 유인원들도 시저와 영어로 대화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한 시간이 지날 때까지 ‘에이. 그래도 시저만 영어를 하겠지’ 싶었는데, 굉장히 다혈질인 데다가 무식하기까지 한 유인원마저도 태연하게 영어로 대화하는 장면에서 나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영어를 배워온 지, 어언 25년. 나는 시저보다 못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너무나 간명하다. ‘영어를 배우세요! 유인원도 애플부터 시작한답니다. 애쁠~!’
이 보다 더 도발적인 영어 학습 홍보 영화가 있을까 싶다.
그나저나, 절망에 빠진 내가 제작진에게 간곡히 바라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영화에서 시저는 과연 몇 년간 영어를 공부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부디 시저가 나보다는 영어 공부를 오래 했길 바란다.
*
애쁠~ 애쁠~ 애~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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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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