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다 지로
‘아사다 지로’라는 작가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나는 그의 작품을 꽤 늦게 접했다. 우리나라에서 한참 인기가 있을 때도 시큰둥했는데 눈물샘을 자극하는 그 방식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는 하드보일드 소설에 흠뻑 빠져 있었으니 더욱 그럴 수밖에. 필립 말로가 조각상 같은 무뚝뚝한 얼굴로 뒷골목을 돌아다니는 상황인데 웬 눈물? 사나이에게 필요한 건 오직 강철 같은 의리와 냉철한 머리, 그리고 뜨거운 심장뿐!
하여간 하드보일드를 비롯하여 느와르, 스릴러 소설 등을 통해 사골 육수처럼 진한 사나이의 길을 걷던 내가 영화 <파이란>을 보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아니, 운명이었다. 장백지의 아름다운 얼굴만으로도 눈물이 흐를 정도로 감동적이었는데 거기에다가 최민식의 열연과 가슴 아픈 이야기까지 겹치니……. 결국 나는 사나이 울리는 건 ‘신라면’이 아니라 슬픈 영화라는 걸 깨달으며 눈이 붓도록 울고 말았다. 동행이 없었기에 다행이었다, 정말로. 그 후 이 영화의 원작이 아사다 지로의 「러브레터」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의 소설을 처음 읽게 되었다. 그리고 아사다 지로는 ‘하드’했던 내 감성을 촉촉이 적셔 주었으니…….
‘신파’ 혹은 ‘신파극’이라는 말은 눈물 콧물을 짜내는 영화나 연극, 그리고 소설 등을 낮춰 부를 때 흔히 쓰인다. 신파라는 단어의 배경이 저 옛날 일제강점기 시절 나왔던 연극이라는 사실은 잘 몰라도 그게 어떤 정서를 뜻하는지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으리라. 가깝게는 천만 영화 반열에 오른 <7번방의 선물>이 신파라는 비판 아닌 비판을 받았고, 안방극장의 일일드라마나 미니시리즈 등도 종종 신파라는 지적을 받는다. 맨날 울고불고 지지고 볶는 우리네 영화 속, 그리고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을 받는다.
소설 쪽에도 한 때 신파의 바람이 분 적이 있었다. 현재도 여전히 ‘로맨스’ 장르는 고정 독자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지만 『국화꽃 향기』나 『천년의 사랑』, 『열한 번째 사과나무』 등은 비극적 요소가 강한 본격 멜로에 가까웠고 수많은 독자의 눈물을 뺐다. 참! 『남자의 향기』라는, 남녀 누구나 좋아할 만 한 소설도 있었다.
신파는 힘이 세다.
유치하다고 손가락질하면서도 뒤로 돌아서서는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이 바로 신파의 힘이다. 매체를 막론하고 특정 작품을 접했을 때 가장 마지막까지 여운이 남는 것은 공포도 아니고, 스릴도 아니고, 웃음도 아니고, 다름 아닌 슬픔과 감동의 정서이다. 슬프거나 감동을 받아서 울기라도 했다면, 그 작품 자체에 후한 점수를 주게 된다. 누군가가 내 마음을 건드려 준다. 마음에 파문이 인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그것은 어쩌면 사랑의 정서와 닮아 있다. 즉, 신파는 이 세상이 없어지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며, 인간 모두의 화두이자 고민거리인 ‘사랑’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것이며 그리하여 여전히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사다 지로는 그 신파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작가이며, 그리고 누구보다 신파를 잘 활용할 줄 아는 작가이다. 작가의 그런 힘은 ‘인간은 선하다는’ 굳은 믿음에서 나오는데 그 진심이 작품 곳곳에 잔뜩 묻어나서 그의 소설을 읽고 나면 뒷맛이 깨끗하다.
손수건을 준비해야 하는 소설, 『철도원』
아사다 지로의 대표작이라 부를 수 있는 소설집 『철도원』은 그가 품고 있는 작품 세계가 고스란히 드러난, 수작 중
의 수작이다. 물론 나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한 몸을 바치는 무사의 이야기 「칼에 지다」도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처음 읽었던 「철도원」의 감동을 지우기는 힘들다. 『철도원』 속에는 표제작인 ‘철도원’을 비롯하여 영화 <파이란>의 원작인 「러브레터」 등 총 8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그 중 「악마」라는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족 간의 사랑, 아련한 추억,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선한 사람 등의 이야기를 다룬다.
줄거리만 쭉 훑어봐도 겨울 아침의 포근한 이불 속처럼 따뜻하고 정감 넘치는 이 소설들은 삶의 한 가운데에서 조금은 비켜나간 인물들이 특별한 기적을 맞이하는 것으로 대부분 결말을 맺는다. 그런데 그 과정이 유치하거나 촌스럽지 않고 매우 정갈하다. 워낙 오래 전 소설이라 결말이 예상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직전의 어떤 순간에 이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게 된다.
영화 <철도원> 스틸컷
나는 일본에서 영화로도 흥행했던 「철도원」도 좋았고, 「러브레터」도 좋았지만 죽은 아버지와 만나는 남자의 이야기인 「츠노하즈에서」가 무엇보다 좋았다. 이것은 순전히 내 의견이고, 『철도원』을 읽은 사람이라면 각자의 취향에 따라 좋아하는 작품이 다 갈리리라. 나는 요즘도 가끔 감성이 메말라간다고 느낄 때면 『철도원』을 펼치고 아무 단편이나 다시 읽는다. 예전처럼 눈물을 뚝뚝 흘릴 정도는 아니라도 여전히 감동을 받고 위로를 받는다. 아사다 지로가 쓴 대부분의 작품들을 지탱하는 정서가 신파에서 나오지만 이 『철도원』은 그 집약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어쩌면 뻔한 소재들, 죽은 가족과 사랑하는 이를 돕기 위해 돌아오는 유령들 등으로 이토록 감동적이고 재미있는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 아사다 지로 본인의 진심이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선량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장 소중하며 눈물은 언제나 진실하다. 이 간단한 주제 의식이 여러 이야기로 변주되어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신파는 넘쳐나지만 오히려 눈물과 감동은 줄어드는 요즘이 아닌가 싶다. 감동을 받아서 울어본 게 몇 년 전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대신에 억장 무너지는 뉴스, 가슴 아픈 사연들,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높은 분들의 행태 때문에 눈물이 난다. 억지 눈물을 짜내는 게 신파라면, 요즘 돌아가는 세상이야말로 신파다. 그것도 아주 저급한 신파.
이런 때일수록 감정을 치유하는 일이 필요하다. 자기개발서를 읽으며 마음을 다잡고, 아직도 유행이라는 각종 힐링 코스를 섭력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만 늦은 밤, 홀로 조용히 앉아 『철도원』을 펼쳐드는 것 역시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단, 손수건은 꼭 준비하도록. 아사다 지로의 소설을 읽으며 흘리는 눈물은 왠지 화장지가 아닌 손수건으로 닦아야 할 것만 같다. 그것도 새하얀 무명 손수건으로.
- 철도원 아사다 지로 저/양윤옥 역 | 문학동네
일본 문단에서 가장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손꼽히는 작가중의 하나인 아사다 지로의 소설집. 1997년 출간이후 140만 일본 독자를 슬픔과 감동에 젖게 한 작품 '철도원'을 비롯, '러브레터', '츠토하즈에서', '백중맞이'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제 117회 나오키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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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건우
남편, 아빠, 백수, 소설가, 전업작가로 살아간다. 운동만 시작하면 뱃살이 빠지리라는 헛된 믿음을 품고 있다. 요즘 들어 세상은 살 만하다고 느끼고 있다. 소설을 써서 벼락부자가 되리라는 황당한 꿈을 꾼다.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3』,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4』에 단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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