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새로운 공간으로 떠나는 일,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입니다. 여행 작가들은 어디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왔을까요? '여행'과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을 주제로 듣는 이야기.
오래도록 한 도시를 사랑했다. 사람도 아니고 도시를. 나 따위에 관심도 없는 도시를 향한 짝사랑이라니. 파리를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에 사람들은 늘 물음표를 달았다. 왜 파리야?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20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파리로 떠났다. 돌아와 1년의 시간 동안 책을 쓰며 왜 파리여야만 했는지 설명하려 애썼다. 300페이지가 넘는 『무정형의 삶』 책 한 권을 써내고 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또렷하게 이 사랑을 말하기 어렵다.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이, 설명하기 힘들어 책 한 권을 쓴 이후에도 여전히 파리를 향한 열띤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그 도시에 대한 나의 사랑을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한다.
마침내 인천공항에서 파리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추천사 의뢰 메일 하나가 도착했다. ‘퇴사를 하고 파리에 가는 꿈’을 실현하기 일보 직전 끼어든 업무 메일이라니. 나는 단숨에 거절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메일엔 운명과도 같은 말들이 잔뜩 써 있었다. ‘파리에 사는 곽미성 작가님’이 ‘이태리를 사랑’하여 이태리어를 배우고 또 이태리로 떠난다는 이야기에 내 마음은 거세게 흔들렸다. 바로 원고를 다운 받아서 비행기 안에서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어떤 사랑은 책 한 권도 비좁아서 책 밖으로 대책 없이 튀어나온다. 『외국어를 배워요, 영어는 아니고요』라는 책의 추천사를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다. 작가님의 이태리 사랑을 가장 잘 이해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였으니까.
어느 저녁, 작가님은 자신의 집에 초대를 했다. 저 멀리 에펠탑이 보이는 아파트에서 작가님의 남편이 음식을 하나하나 내왔다. 프랑스 사람인 남편 분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우리는 계속해서 한국어로 수다를 떨었다. 매일 10분 씩 공부한 프랑스어를 써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나의 프랑스어는 작가님의 이태리어와 달리 봉주르와 메르시에 머무르는 수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욕망은 내 속 깊은 어딘가에 봉인을 시켰다. 낯가림도 애초에 봉인시켰다. 아니, 낯가림이 튀어나올 틈이 없었다. 나는 작가님이 너무 궁금했으니까.
확률을 계산해 보자. 파리로 떠나기 직전 파리에 사는 작가님 책의 추천사를 의뢰받을 확률을. 그 책의 내용이 내 마음을 고스란히 대변해 주고 있을 확률을. 거기에 심지어 작가님이 나와 동갑일 확률을. 아니, 이 정도로 호들갑을 떨 마음은 없다. 왜냐하면 가장 기상천외한 이야기는 그 다음이니까.
20대 초반, 처음으로 여행을 떠나왔을 때 나는 파리 퐁피두 센터에 반했다. 그리하여 나의 파리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퐁피두 센터로 시작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을 하자면, 퐁피두 센터에 반해서 일주일 동안 4번이나 퐁피두 센터에 왔던 나는 어느새 퐁피두 센터의 도서관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곳에서 책에 열중한 얼굴들을 보며 그 중 하나가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슴 속에 품었고, 그 소망이 20년이 지나 나를 파리로 이끈 터였다.
“퐁피두 센터 도서관이라고요?”
“어이없죠?”
“아니요. 저 지금 너무 놀랐어요.저도 퐁피두 센터 도서관에 반해서 3개월 후에 유학 준비 해서 파리로 와버렸거든요. 진짜예요. 근데 살면서 퐁피두 센터 도서관을 이야기 하는 사람을 또 만나게 될 줄이야.”
파리에서, 동갑내기 파리지앵을 만났을 때, 서로 파리에 반한 부분이 똑같을 확률은 얼마일까? 내가 아무리 문과여도 그 확률이 0에 무한히 수렴하는 값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놀라워서 작가님 남편분의 어마어마한 요리들에 제대로 집중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작가님이 나를 위해 준비한 그날의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바로 치즈.
『치즈: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라는 책 한 권을 쓸 정도로 치즈에 진심인 사람이 바로 나다. 지금까지의 치즈 경험을 총 망라한 책을 쓰며 나는 ‘언젠가는’이라는 단서를 하나 붙여두었다. 언젠가는 프랑스에 가서 다양한 종류의 치즈들이 한꺼번에 나오는 치즈 카트를 내 눈으로 보고 싶다고. 그 꿈이 그 밤에 실현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려 11종의 치즈들이 덩어리째로 식탁 위에 올라왔다. 일부러 오래 된 시장의 유명한 치즈 가게까지 가서 사 왔다는 11종의 치즈. 작가님이 말했다.
“치즈 책 쓰신 걸 읽고, 언젠가는 꼭 작가님에게 이렇게 대접해 드리고 싶었어요.”
행복의 색깔이 노란색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나는, 그날 저녁 11가지 다른 노란색의 행복 사이를 마음껏 산책했다. 아니, 폭식했다. 프랑스인 남편 분이 치즈 지도를 꺼내와서 각각의 치즈가 어디서 온 건지, 소젖으로 만들어진 건지 염소젖으로 만들어진 건지 설명을 해주었다. 그 설명 끝에 작가님은 남편 분에게서 그 지도를 빼앗아서 내 품에 안겨주었다. 참 주인을 이제서야 찾은 거 같다며. 지도를 품에 품고, 이름도 처음 듣는 치즈를 뭉텅 잘라서 먹고, 그 맛을 기억하고 싶어서 또 커다랗게 잘라 먹었다. 작가님도 작가님의 남편분도 좋아하지 않는 카망베르 치즈를 나를 위해 사 오셨다고 말해서 그건 또 얼마나 양껏 먹었나 모르겠다. 그 밤 내가 그들의 마음에 보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과식밖에 없었으니까.
2달 간의 파리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 나는 곽미성 작가님을 다시 만나서 치즈탕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퐁뒤를 먹었다. 한여름에 펄펄 끓는 치즈탕, 퐁뒤를 먹으며 이 만남의 확률을 따져보았다. 한여름에 파리의 스위스 식당에서 퐁뒤를 끓여 먹어야겠다는 발상을 하는 나 같은 인간의 확률과 그 인간의 미친 발상에 응해주는 작가님 같은 친구의 확률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 확률 역시 0에 수렴하며, 그 치즈가 맛없을 확률은 0이다.
흔히들 말한다. 여행은 예상치도 못한 새로운 만남이 끝없이 일어나는 장이라고. 그 ‘예상가능하지 않음’ 목록의 맨 윗자리에 나는 곽미성 작가님과의 이 만남을 올려 둔다. 이것이야말로 나에겐 금메달감인 만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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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카피라이터)
일상을 여행하며 글을 쓰는 사람. 글을 쓰며 다시 기억을 여행하는 사람. 광고 회사에서 카피라이터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오래 일했다. 『내 일로 건너가는 법』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띵 시리즈 : 치즈』 『모든 요일의 기록』 『모든 요일의 여행』 『하루의 취향』 등을 썼으며 현재 ‘오독 오독 북클럽’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