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의 원작이자 영구미제사건으로 남아버린 화성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하여 센세이션을 일으킨 연극, <날 보러 와요>가 다시 돌아왔다. 1996년 초연된 이래로 관객과 평단의 사랑을 받으며 연극계의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했고 5년 만에 관객들 곁으로 돌아온 이번 공연도 그 명성을 증명하듯 긴장감 넘치고 세련된 연출과 배우들의 호연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고 있다.
<살인의 추억>이라는 좋은 영화로 각색되었고 영화 자체도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만큼 영화 <살인의 추억>을 연극 <날 보러 와요>의 원작으로 착각하거나 굳이 연극 <날 보러 와요>을 찾아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이렇게 좋은 작품을 그렇게 생각하다니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선입견에서 벗어나 일단 무대로 들어가는 순간 <살인의 추억>만큼, 혹은 <살인의 추억>보다 더 재밌고 매력 있는 작품을 접할 수 있다.
공포와 마주한다는 것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수개월째 검거되지 못한 범인을 잡기 위해 서울에서 자원해서 온 김반장, 서울대 출신에 시를 사랑하는 엘리트 김형사, 다혈질의 무술 유단자인 조형사, 그리고 토박이에 능글스러운 박형사, 네 명의 형사가 모이면서 <날 보러 와요>는 시작된다. 이들 뿐만이 아니라 정의감에 불타는 열혈 박기자와 애교 많고 사랑스런 미스김이라는 두 여인이 형사들 곁에서 도와주는 조력자로 등장한다.
네 명의 형사가 연쇄 살인 사건의 수사를 진행하지만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차원이 다른 범행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고 범인의 실체는 점점 멀어져 가기만 한다.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한 범죄 행각에 대해 결국 형사들은 피해자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넘어서 범인에 대한 공포감마저 느끼기 시작하는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날 보러 와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연극이다. 그것도 10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지만 결국 범인을 검거하지 못하고 공소시효가 말소되어버린 대한민국의 3대 미제사건 중에 하나,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했다. 듣기만 해도 섬뜩한 소재를 바탕으로 <날 보러 와요>는 실제 사건에서 쓰인 수사 노트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담배 냄새가 <날 보러 와요> 공연장 전체에서 진하게 묻어나오고 어둡고 불그스름한 조명 아래에서 간간히 흘러나오는 레퀴엠의 현악기 연주 소리는 관객들의 온몸을 무겁게 짓누른다. 또한 공간적 무대가 경찰서로 한정된 만큼 살인사건의 현장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음향효과나 조명을 통해서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하지만 실화 바탕으로 만든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공포의 대상인 범인은 마치 구체적 실체가 없는 유령처럼 느껴지면서 우리들의 목을 옭아오고 차원이 다른 긴장감을 선사한다. 이렇게 그로테스크하고 음산한 분위기는 마치 관객들이 살인사건 용의자와 일대일로 마주 보는 것 같은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잔혹한 실화를 소재로 한 탄탄한 스토리와 음산한 분위기를 실감나게 느끼게 해주는 무대 장치가 <날 보러 와요>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지만 그래도 가장 빛나는 것은 단연 배우들의 연기이다. 작품 전체에서 나오는 등장인물이 10명 안팎으로 많지 않지만 주연에서 짧은 장면만 등장하는 단역까지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인다. 특히 남씨 부인 역으로 이번 작품에 참여하는 이홍련씨의 연기는 단연 압권이다.
영화 <변호인>등에서 각광받고 있는 송영창, 영화와 무대를 넘나들며 믿고 보는 배우로 입지를 굳힌 손종학, 출연하는 작품마다 존재감 있는 연기를 보여주는 차순배가 수사팀의 리더 김반장역을 맡았고 김준원, 이원재, 최유하, 박민정, 전성민 등 연극에서 잔뼈 굵은 배우들이 출연하여 무대를 빛내주고 있다.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영화 <살인의 추억>가 연극 <날 보러 와요>를 각색하여 만든 작품이기에 두 작품이 전체적인 스토리가 맥을 같이 하고 있지만 <살인의 추억>은 사건에 전혀 다른 수사방식을 가지고 있는 두 형사의 갈등을 중심으로 사건을 풀어나가고 <날 보러 와요>는 전무후무한 연쇄살인사건을 정면으로 겪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가장 큰 차이를 가진다.
극악무도한 범인을 쫓으면서 용의자와 대립하는 형사의 이야기에서는 긴장감과 비장미까지 느껴지지만 형사라는 직책을 떠나 평범한 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릴 때에는 구수하고 유머러스함을 느낄 수 있다. 범인을 쫓는 장면 사이사이로 긴장을 이완시키는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삽입하여 긴장과 이완의 숨고르기를 영리하게 해내고 있다. 하지만 연극의 막바지에 두 이야기가 충돌하고 만다. 이 순간 <날 보러 와요>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뿜으며 잡을 수 없는 범인에 대한 감출 수 없는 공포와 그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고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을 보여준다.
연극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서 어두컴컴한 길에 들어서면 왠지 모르게 간담이 서늘해지고 섬뜩함에 주변을 살피게 된다. 연쇄살인사건에서 손을 뗐지만 그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형사들처럼 관객들도 <날 보러 와요>가 보여주었던 폭발적 에너지에 압도되어 작품에서 느꼈던 감정과 여운을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작가 김광림의 완성도 높은 극본에 <필로우맨>과 <쉬어매드니스>에서 감각적인 연출을 보여준 변정주가 이번 작품의 연출을 맡았으며 제 33회 백상예술대상 희곡상, 제 20회 서울 연극제 작품상을 수상한 작품, <날 보러 와요>는 오는 6월 1일까지 대학로 아트센터 K 세모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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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길(예스24 대학생 리포터)
There are many things that i would like to say to you but i don't know how. - Oasis, wonderwall
simjinsim
2014.04.29
웃기기도 하고 혀를 차기도 하고 하면서 재밌게 볼 수 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