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도 가난과 외곽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빛만 있는 양, 어두운 곳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만들어버린다. 보이지 않는 곳은 ‘없는 곳’이 아니다. 자본과 주류미디어는 그곳을 보이지 않게끔 만들고 있다. 세계화의 진행은 가난과 외곽을 더욱 몹쓸 것으로 만들고, 외면해야 할 것으로 돌려버렸다. 1986년부터 2011년까지 25년간 서울 사당동의 한 가족(의 역사)를 통해 가난을 기록한 『사당동 더하기 25』의 저자 사회학자 조은 교수는 “금융 자본주의 시대에 와서 이들의 가난은 더욱 개별화되고 제도화된 가난이 된다”고 분석했다. 세상 어디에나 가난의 모습은 다르지 않다. 인도 안나와디 빈민촌을 추적한 르포르타주 『안나와디의 아이들』의 저자 캐서린 부는 자본의 세계화 시대, 무력한 개인들은 자신들의 결핍을 똑같이 무력한 다른 개인의 탓으로 돌리며, 가난한 사람들은 연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은 교수나 캐서린 부의 책이 빛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맨몸의 가난을, 보이지 않는 곳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961년 나온 멕시코 하층민 가족에 대한 르포르타주 『산체스네 아이들』을 펴낸 오스카 루이스는 “사람들이 이제는 가난이란 것이 무엇인지 완전히 잊어버려 불우한 사람들을 느끼지도 못하고 그들과 이야기도 못하게 돼버린 것이 아닐까?”라며 “도시 빈민가 연구에 선구적 구실을 한 사회학자들은 이제 주로 도시 변두리 주민들에게 관심을 돌리고 있다. 오늘날에는 소설가들조차도 대개 가난의 문제점이나 변화하는 세계의 현실하고는 거리가 먼, 중산층의 정신을 탐구하기에만 바쁘다”라고 우려했다. 그런 우려는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사회는 가난과 외곽을 외면한다. 가난은 수치가 아님에도 사회는 가난한 자를 욕보인다.
과연 우리는 어떤가. 지난 9월25일 가을밤, 서울 종로구 정독도서관, 도시, 가난, 그리고 아이들에 관한 네 가지 시선을 만났다. 『안나와디의 아이들 : 성장과 발전의 인간적 대가에 대하여』 출간기념으로 북콘서트가 열렸다. ‘세이브더칠드런’의 김희경 권리옹호부장의 사회로, 10년 캘거리에서 인력거꾼을 취재한 다큐 <오래된 인력거>의 이성규 감독, 사회학자이자 『사당동 더하기 25』 조은 교수, 시인이자 노숙인 대상 글쓰기 강좌를 진행하는 김응교 교수 등 가난에 관한 기록과 관련한 패널들이 이야기를 나눴다.
책을 어떻게 봤나?
이성규 : 깜짝 놀랐다. 르포를 전지적 시점으로 써도 되는가 하는 당혹스러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현장 체험 그대로를 르포로 썼다는 걸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같은 책은 인도의 진짜 빈곤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인지 허점이 보인다. 이 책은 미국 기자가 썼음에도 현장이 살아 있다. 한 호흡에 책을 읽었다. 추천하고 싶다.
조은 : 굉장히 문학적이다. 읽으면서 가난이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당동 사람들을 25년 이상 추적했는데, 한편으로는 어쩜 이렇게 똑같은가 질문하게 되더라. 우리의 가난이 이 정도로 폭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10~20년 전 우리의 가난과 너무나 닮아 있다. 우리와 다른 가난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엄청난 상상력을 부여한다. 사회학자로서 이야기한다면, 굉장히 흥미로운 가설을 끄집어낸다. 저자의 기자 감각과 인물에 대한 관심 덕분에 가난이 어떤 수단이 없어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향후에 될 수 없음’에 대한 기회의 불평등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가져왔다.
김응교 : 20대에 기자를 한 적이 있었다. 80년대 말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노동자와 함께 있으면서 글을 쓰기도 했는데, 이 책을 읽고 부끄러워졌다. 오랜 시간 나는 무엇을 했는가. 내 것을 챙기고 흉내만 냈구나. 왜냐. 이렇게 쓰기 정말 힘들다. 이 책처럼 수사와 예화를 밀착해서 썼다는 건 인물에 빙의가 됐다는 얘기다. 단순하게 르포르타주 정도가 아니다. 인물에 빙의해서 자기 이야기를 쓰듯이 썼다. 문학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꼭 읽어야 할 것 같다.
읽다보면 소설 같다. 묘사도 개념화도 아름답고 문학적 성취가 대단하다. 반면 논픽션인데, 작가가 전혀 보이질 않아서 권위적이지 않은가 하는 시선으로 볼 수도 있다. 전지적 글쓰기에 대해 어떻게 보는지, 르포와 문학의 경계 등에 대해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다.
조은 : 불편함도 있었다. 미국의 잘 나가는 기자가 자기 글에 취해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사실이 아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한 고민이 드러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것이 없다. 시적인 표현이 많다. 무릎을 칠 수도 있는 부분인데, 그런 점에 대해 약간은 유보하고 싶다. 극적인 사건을 쓰게 되면 픽션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르포를 보면 우리 삶이 얼마나 극적인 사건으로 가득 차 있는지 알 수 있다. 전형적인 전지적 시점의 상투적 소설쓰기가 아닐까 하는 느낌도 받았다. 논쟁도 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김응교 : 논쟁이 될 것 같다. 이 책의 특징을 보면, 전지적 작가로서 개입을 한다. 삶과 밀착된 수사를 쓰는데, 그런 노력을 좋게 본다. 내면까지 완전히 밀착하지 못하지만 이정도로도 충분히 뛰어나다. 두 번째로 인물이 젠더 중심이다. 여자의 수난 입장에서 그 묘사가 뛰어나다. 실제로 인도 사회에서 남자보다 여자가 겪는 고통이 어떤지 잘 나와 있다. 세 번째 명랑성이다. 끊임없이 명랑성이 개입한다. 『완득이』나 『두근두근 내 인생』을 보면 슬픈데 재밌잖나. 죽지 않고 살 수밖에 없게 만드는 끊임없는 농담이 중간중간 많이 나온다. 이것이 비장미보다 더 큰 힘이 아닌가 싶다. 비극적 명랑성이다.
이성규 : 여기의 묘사는 정확하다. 가족관계, 종교관계, 빈곤 등. 길거리에선 주인공들의 직업인 쓰레기 재활용하는 사람들과도 일주일 정도 살았는데, 이 책을 보면서 자존심도 상했다. <오래된 인력거>는 총 2만분인데 극장 상영분은 85분이다. 그러면 이 작가는 이것을 구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를 버렸을까.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다큐는 찍은 것만 갖고 이야기하나 텍스트는 현장에 없어도 증언이나 인터뷰만으로 재구성이 가능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큐를 만드는 것보다 내가 겪은 것을 전지적 르포로 쓰는 게 어떨까도 생각해봤다. 최근 다큐는 많이 바뀌고 있다. 사람들은 다큐를 사실과 진실의 기록이라고 인식한다. 맞다. 하지만 사실과 진실의 기록인 다큐는 소비되지 않는다. 대부분 <인간극장>류의 다큐를 본다. 실제로 소비되는 다큐는 <워낭소리>나 <울지 마 톤즈>다. 그걸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자신도 소비하지 않을 다큐나 르포를 이렇게 안 만들었다고 불평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인도에서는 뭄바이를 ‘꿈의 도시’라고 얘기한다. 우선, 발리우드(영화)가 있다. 인도에 발리우드 영화와 같은 현실은 없다. 뭄바이는 신흥도시라서 일거리가 많이 생겨서 사람들이 모인다. 뭄바이는 인구가 2000만이 넘는다. 10만 명의 매춘여성이 있는 지역도 있다.
가난과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뭄바이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라고 하는데, 외곽 슬럼가가 ‘안나와디’다. 각자 연구한 지역의 빈곤과 관련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면?
조은 : 이 책을 보면 ‘우리는 이보다 나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정도로 폭력적이고 무지막지 하지 않아, 이렇게 생각하다가 10~20년 전 이상으로 거슬러 가면 우리도 억울하게 옥살이하고, 지금도 형태만 다르지, 부정과 부패, 기회의 불평등이 존재한다. 저자는 정말 그 안에 들어가서 부정하고 부패한 속에서 그 기회를 얼마나 누릴 수 있는가를 놓고 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 사당동과 유사하다. 정도는 다를지 몰라도. 이런 억울함은 1970년대 광주대단지(성남) 사건도 여기 못지않다. 용산참사도 이 책의 압둘이 당한 억울함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책은 비유적인 묘사가 굉장히 뛰어나다. 그런 것을 통해 빈곤의 숨겨진 실체, 진실성을 내비친다. 가난의 모습은 부정부패, 그리고 기회의 불평등이다. 공간과 시간을 다르게 생각하지만 공간과 시간은 어떻게 보면 같은 것이다. 한국의 1960년대는 베트남의 1980년대이듯, 그런 것에 대한 상상력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성규 : 인도는 신비주의가 강력한 콘텐츠다. 현실을 이야기하면 절대 소비가 안 된다. 인도에 갔다 온 사람들은 딱 두 부류다. 신비주의와 다시는 안 가겠다는 사람들. 신비주의가 더 많다. 목가적 전원주의나 빈곤에 대한 판타지를 가진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아포리즘을 구사한다. 나는 인도에서 빈곤한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행복하냐고 물으면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인도는 행복한 나라가 된다. 그러나 2~3일 함께 지내면 속이야기를 한다. 우리와 다를 바 없다. 아이들 교육문제도 그렇고 가난을 대물림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인도로 여행을 가라고 말한다. 10년 동안 겪을 이상한 것들을 인도에서는 단 한 달 동안 겪는다. 인도는 압축형 인생극장이다. 인도에 가면 삶에 대한 부조리와 불합리함을 수없이 목격한다. 그런데 그걸 현실적으로 못 풀어서 신비주의로 해석한다. 인도에 성자가 많은 이유는 현실에서 풀어주지 못하니 종교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인도는 은행 직원도 사기를 친다. 불신의 벽이 높다. 부조리와 부패의 늪이 깊다. 인도는 상상 이상으로 빈부의 격차가 심하다. 왜 아름다운 농촌에서 도시로 오는지 질문하는 사람이 있다. 인도는 아직 대지주가 농촌 지역을 장악한다. 소작농이 지천이고 이들은 엄청난 불평등에 직면해 있다. 그러니 농촌의 가난한 사람들이 도시로 갈 수밖에 없다.
뭄바이 시에서 안나와디 사람들을 후진성의 상징이라고 밀어내는 것, 어떻게 생각하나?
김응교 : 책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가난이었다. 가난도 종류가 다 다른데, 이 책을 통해 윤회와 태생이 확정된 구조의 세계, 내가 범접하지 못한 가난을 접했다. 항의의 구조조차 없이 포기해버리는 가난, 의지조차 마이너스가 된 사회를 만나보지는 못했다. 완전히 포기된 가난 같은 것이었다. 이 소설에서 만난 부정부패의 카르텔은 전 세계 어디서나 비슷한 것 같다. 가난을 어떻게 예술화 시키는가 봤을 때, 발리우드는 신화에 기초를 뒀는데 우리도 같은 구조다. 한류나 재벌?신데렐라 드라마, 헛것의 시뮬라크르(복제본)의 사회다. 학문, 미디어도 빛의 세계만 이야기한다. 학자, 작가, 미디어, 영화인의 할 일은 어둠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후세를 위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양석일 작가(주. 재일한국인 2세 출신 소설가로 『피와 뼈』 『어둠의 아이들』 등과 같은 작품을 썼다.)는 어둠의 세계를 쓴다고 말한다. 이 책은 어둠의 세계를 드러냈다. 작가는 인간의 삶에 어둠의 세계가 있음을 알려야 한다. 지금 같이 헛것, 거짓에 세뇌된 매체 아래서는 극복하겠다는 마음조차 생기지 않는다. 어둠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두텁게 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세상은 가난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밀어내고 있다. 세이브더칠드런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 빈곤 퇴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물어보니, 1번으로 꼽은 해결과제가 부정부패였다. 무엇을 해도 부정부패 때문에 안 된다. 이 책도 그런 것이 잘 나온다. 특히 아동노동이 얼마나 심각하고 끔찍한지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나?
조은 : 지금의 아동노동은 과거와 성격을 달리 한다고 본다. 대학에 있던 나로서는 회의를 하게 된다. 지식담론을 이끄는 사람의 계급 배경을 생각하면 어둠을 담아낼 수 있을까. 사당동을 연구할 때 다른 사람들은 가족 같겠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우리 사회가 그 문제를 생각하면, 아이들 수준에서라도 불평등을 최소화해야 한다. 급식을 갖고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만 주라고 말한다.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가난하게 태어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여긴다.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을 바꿀까! 아이들에겐 불평등을 최소화해야 한다. 가난을 드러내게 하는 방식도 어렵다. 예술가나 작가들에겐 좀 더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학자에겐 그런 것을 기대하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좀 더 교묘하고 세련되게 이걸 포장하는데, 어떻게 하면 이걸 잘 드러낼 수 있을까, 여전히 고민이다.
책에는 가난 탈출 방법이 3개다. 틈새시장 돈벌이, 부패한 정치적 동아줄 잡기, 그리고 교육.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면 공부하라고 충고하는데, 교육이 아동노동의 탈출구가 될까?
이성규 : 인도에서는 그 가능성이 0.01%다. 공교육 시스템 때문이다. 인도에서 그럴듯한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은 사립 유치원부터 영어교육을 받은 아이들이다. 몇몇 대학생에게 물어보니 주변에 공립학교를 나온 학생들은 없다더라. 가난한 사람들이 보낼 수 있는 학교는 공립학교다. 그러나 공립학교는 썩었다. 선생은 없고, 부정부패가 만연하다. 빈곤은 전쟁과 똑같은 상황이다. 전쟁이 나면 여성과 아이들이 가장 피해를 입는다. 빈곤도 마찬가지다. 법으로 아동노동을 금지하면 될 것 같다고 하지만, 금지해도 안 된다. 우리는 복 받은 경우라, 교육이 많은 것을 바꿨지만 인도는 어렵다. 남의 나라 문제에 왜 관심을 갖느냐고 하지만, 우리나라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빈부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다.
조은 : 대학을 나오거나 좋은 학교를 나온다고 안정된 직장, 사회이동이 보장된다고 애기할 수 없다. 한국에서도 교육이 더 이상 그런 통로가 아니다. 책은 부패가 가난의 원인이 아니라, 부패가 원인이기도 하지만,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제적 기회의 위축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도덕관념의 위축, 즉 도덕계를 위축시킨 것이 문제라고 저자는 말한다. 날카로운 지적이다. 혁명적인 수준으로 바뀌지 않으면 불가능하고, 과연 그런 혁명이 가능하냐는 질문을 던지지 않지만, 저자가 정확하게 인도 사회를 보는 것 같다.
‘빈곤의 문화’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조은 : 단언컨대, 그것은 가난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사당동만 봐도, 할머니 때도 빈곤문화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가난의 요소가 없었음에도, 아들, 손주, 증손주 다 가난하다. 명확하게 빈곤은 빈곤문화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도 명확하게 얘기한다. 가난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고. 도덕적 둔감성에 대해 우리 사회도 그렇게 가는 것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에 이미 뻔뻔함이 오고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김응교 : 이미지 싸움 같다. 우리는 그런 것에 세뇌돼 있다. 잘 살건 못 살건, 게을러서 공부를 안 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런 이미지를 구체화 시켰다. 수배전단에 보면 사진이나 몽타주 밑에 ‘노동자풍’ ‘빈민풍’ 이렇게 쓰여 있다. 그게 말이 되나. 그런 게 대체 어디 있나. 어떻게 하면 이 세뇌에서 벗어날 것인가, 이미지 싸움에서 어떻게 이길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지금 이 시간, 가난에 대해 말했지만 마음이 풍요롭다. 어떻게 오랜 시간 가난과 함께 할 수 있었는지 내면적인 힘과 내공에 대해 듣고 싶다. 가난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조은 : 다큐 <사당동 더하기 22>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은 10년에 걸쳐 사람들과 친해진 덕분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이대도 괜찮아 진 거다. 많은 사람들이 25년 동안 사당동 할머니 가족을 취직이라도 시켜주지, 왜 그냥 놔뒀냐고 묻는다. 이건 논쟁의 영역이기도 한데, 사회학자인 내 입장에선 어떤 한 가족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한국사회에서 가난이 어떻게 재생산되는지를 보겠다는 거였다. 학자적인 것을 떠나서도 이 가족이 어떻게 변해갈지 보고 싶다고 스스로 정리했기 때문에 그랬다. 연구비를 받고 처음 시작할 때 25년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다 보니 사회학자로서의 호기심이 커졌다. 사회학자로서 이 가족으로부터 얻은 것도 많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가난의 배경을 가진 사람이라면 안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왜냐. 너무 지긋지긋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며 그것을 했다. 노하우나 내공이 특별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김응교 : 벗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친구나 관계가 맺어졌을 때, 내 안의 시혜의식이 사라졌을 때, 벗이 되기 위해 애쓸 때 그런 것이 가능하다. 사실 노숙인과 처음 함께 있을 때 냄새가 정말 힘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냄새가 베스킨라빈스 냄새로 바뀌었다(웃음). 그런 체험들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벗으로 다가가는 걸음이 있어야만 ‘기부’가 아닌 ‘쉐어’가 된다. 그 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인간이 되기 위해, 내가 살기 위해 그랬다.
<오래된 인력거>를 보니 주인공이 힘든 삶을 사는데, 아내가 아파서 주인공이 촬영하지 말라고 막았을 때, 찍는 사람도 갈등이 많겠다고 생각했다.
이성규 : 그런 장면, 정말로 고통스럽다. 주인공이 방에서 울 때 나는 방에 없었다. 왜냐. 나는 인도어를 알아들으니까. 촬영감독은 못 알아들으니 갈등의 폭이 좁다. 촬영감독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찍으라고 했다. 주인공이 찍지 말라는데, 왜 찍었느냐고 하면, 그것을 찍었을 때 주인공과 나는 10년 이상 알고 지낸 사이였다. 친하고 서로를 잘 아는 사이에선 하지 말라고 해도 눙치면서 왜 그러느냐고 장난도 치고 그러잖나. 그런 관계가 있어서 계속 카메라를 돌릴 수 있었다. 내가 나간 것은 내가 견딜 수 없어서였다. 다큐 감독은 잔인해야 한다. 타자의 고통을 잔인한 시각으로 찍지 않으면 힘들어진다. 내가 도와주는 것은 영화 외적으로 풀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왜 안 도와주느냐고 묻더라. 아니다. 주인공 아내의 검사비는 내 사비에서 나갔다. 주인공이 도와달라고 해서 도와줬다. 촬영이 끝난 뒤 현금도 보내줬다. 주인공은 그 돈으로 벽돌집을 지었다더라. 그 집도 보러가야 한다. ‘하면 된다’는 것은 환상이다. 하면 되면, 누구나 다 하지(웃음). 리얼리티는 ‘되면 한다’이다. ‘하면 된다’와 ‘되면 한다’의 차이는 굉장히 크다. 근거 없는 낙관주의, 긍정주의가 너무 많이 퍼져 있다. 미국에서 긍정주의가 확대될 때는 구조조정이 벌어질 때다. 그럴 때 긍정주의를 퍼트린다. 그걸 우리는 견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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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
드미트리
2013.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