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9] 차이코프스키를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이유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비창>
예술가들의 마음속에는 세상과 단절된 자기만의 방이 하나씩 있는 모양이다. 선배님 설명을 들어보니, 그런 성격으로, 그런 현실 속에서 매몰되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해나갔다는 것이, 아무리 직업적으로 작곡해나갔다고 해도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스스로 안에서 길어 올릴 수 있었다는 게 나 같은 범인으로선 이해하기 어렵다. <비창>은 정말로 아름다운 음악이다. 어둡게 시작하는 서두를 지나고 나면, 단호한 트럼펫 소리를 넘어 가만히 풀밭을 지나가는 미풍도 느껴지고, 하늘을 붉게 물든 노을 진 풍경도 눈에 선해지는 순간이 있다.
201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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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한번 쳐보고 싶었던 나의 로망 <백조의 호수>
겨울이면 우리나라에서도 매년 공연되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피아노를 배우고 나서 내가 처음으로 샀던, 500원짜리 클래식 악보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였다. 물론 ‘언젠가 쳐봐야지’라든가 ‘이걸 칠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피아노를 연습해야지’ 같은 마음으로 산 악보였는데, 마치 ‘이 옷을 일단 사두고, 얼른 살을 빼서 입어야지’하고 산 옷을 결코 입게 되지 못하는 일처럼, 그 곡을 연주하는 날은 두고두고 오지 않았다.
대신 종종 악보의 첫 소절을 눈으로, 입으로 따라 읽곤 했다. 그래서일까, <백조의 호수> 첫 소절은 아직도 입에 맴돈다. 첫 음이 시작되면, 눈앞에 한 점이 생기고, 음악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 한 점이 둥근 호수처럼 커져 나간다. 이 곡을 작곡한 차이코프스키가 러시아 작곡가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서, 상상 속의 ‘백조의 호수’는 꽁꽁 얼어있는 아주 차가운 호수다. 그 위에서 백조들은 피겨 스케이팅을 하듯 우아하게 호수를 거닌다.
이 음악은 어찌나 비극미가 물씬한지, 이 곡을 들을 때면 나는 언제나 이별을 앞둔 여자가 떠올랐다. 발레 음악으로 많이 쓰이는 음악이므로, 상상 속의 그 여자는 발레복을 입고서 이 음악에 맞춰 격정적으로 춤을 추는데. 이 상상은 이내 2008년 이 곡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던 김연아의 경기로 오버랩되며 마무리된다.
예측불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카라얀이 지휘하는 차이코프스키 4번 교향곡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을 들으면서, 그의 음악들이 피겨 스케이트의 동작들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피겨 스케이트는 빙판 위에서 한 순간도 정지해있지 않고 미끄러지듯 춤을 춘다. 도대체 저 프로그램을 어떻게 외우는 걸까 싶을 정도로 부드럽게 때론 휘몰아치게 연기를 하는데,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꼭 그렇다.
잠잠했다가 갑자기 울컥 감정이 치솟아 오르듯, 음들이 솟구치고 쏟아지고, 전혀 예상치 않은 음들이 이어지는가 하면, 때론 이게 박자가 맞는 건가 싶을 정도로 성급하게 치고 나오는 음도 있다. 그야말로 예측 불가. 그저 출렁인다.
모차르트의 음악들이 정돈된 느낌을 주는 데 비해,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음표를 흩트려 놓은 것만 같다. (특히 <4번 교향곡>이 그렇다!) 훨씬 더 감정적으로 들린다. 어쩐지 조마조마한 채로 듣게 된다. 그의 몇몇 교향곡을 쭉 들어보니, 갑자기 음악이 어두워지거나, 갑자기 씩씩해지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분도 그렇지 않던가.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음악들은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처럼 느껴진다. 격정적이다. 그가 오랜 시간 조울증을 앓았다고 하는데, 그런 그의 심리상태를 고스란히 악보에 적어 내려간 것 같다. 같은 나라의 음악가인 라흐마니노프가 특유의 우울과는 또 다르다.
이를테면, 차이코프스키 <5번 교향곡> 같은 경우, 아주 깊은 바닥에서부터 음을 끌어내면서, 깊은 슬픔으로 곡이 시작하지만, 왈츠가 삽입된 3악장은 화사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다. 내가 좋아하는 4악장은 기상곡처럼 씩씩하고 웅장한 에너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울적할 땐 옆에서 말도 못 붙일 정도로 바닥까지 내려갔다가도 금세 기분이 좋아져 연신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사람같다고 할까. 7색 무지개같이 다양한 감정이 제 색깔을 잃지 않고 조화롭게 어울려 있는 게, 차이코프스키의 매력이자, 내가 그를 특별히 좋아하는 까닭이다.
한국인들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러시아 음악
우리의 대중문화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러시아 음악.
위는 모래시계 테마음악이다.
선배 말에 의하면, 한국 사람들의 러시아 음악가 사랑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단다. “일단 제목에 러시아라는 말이 붙으면 판매량이 올라간다고나 할까. 이왕이면 러시아 민요, 러시아 가곡, 러시아 작곡가에 대한 선호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야.”
러시아 음악을 들어본 적 없다고? 선배가 읊는 이 곡들의 제목만 들어도 이내 입에 감기는 멜로디가 있을 테다. “20년 전에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드라마 <모래시계>의 테마음악이 러시아 태생이지. (회색빛 도는 백발에 남성적인 목소리로 사랑받는 러시아 바리톤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야!) 심수봉이 불렀던 ‘백만 송이 장미’도 러시아 곡을 번안한 가요지. 하다못해 테트리스 음악이나 신화가 부른 ‘T.O.P’에서도 러시아 음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어.
러시아 음악이라고 하면, 웅장하면서도 역동적이고, 서정적이면서도 섬세한 성격을 갖고 있어. 서유럽 쪽 음악이 완벽하게 세팅된 아름다운 코스 요리와는 스케일이 다른 느낌이지. 거기에 기본으로 비장미와 우울함을 깔고 들어가. 한국인의 피를 잡아끄는 한의 정서가 담겨 있지. 그래서인지 한국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살살 건드리는 데가 있어.”
그중에서도 차이코프스키의 위상은 특별하다. 러시아 음악의 특징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면서도, 러시아 음악의 위상을 널리 알린 작곡가이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라흐마니노프나, 쇼스타코비치, 무소르그스키 등의 러시아 작곡가들 역시 명곡들을 남겼지만, 차이코프스키는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 등 다방면으로 몇 곡 남기지 않았는데도 장르별로 손가락으로 꼽힐 만한 걸작들을 남겼거든.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러시아인의 정서를 그저 한쪽으로만 담아내지 않고, 누구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서로 세련되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아. 특히 발레 음악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러시아가 발레의 종주국으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차이코프스키의 3대 발레 음악으로 꼽히는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굳이 차이코프스키라는 작곡가를 떠나서도 걸작으로 꼽을 수 있는 3대 발레곡이야.”
차이코프스키, 웅장함과 섬세함을 다룰 줄 아는 작곡가
므라빈스키가 지휘하는 차이코프스키 6번 교향곡 <비창>
차이코프스키는 실제로도 우울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를 말할 때 꼭 빠지지 않는 게 그의 예민하고 소심했던 성격, 독특한 성적 취향, 그 탓에 우울하고 비극적이었던 말년의 이야기다. “지금도 동성애자라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데, 100년 전이야 말해서 무엇할까? 그런 자신을 평생 비관하며 우울한 삶을 살았고, 그걸 감추기 위해 아무 여자와 억지로 결혼했지만, 불행한 결혼생활이었어. 이혼하겠다고 자살소동까지 벌였으니 말 다했지. 끝내 주변 사람들의 등쌀에 못 이겨 자살했다는 게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이러한 그의 성격과 인생 역경 탓인지 그의 음악은 특히나 섬세하고 비애감이 깊지. 하지만 좀 달라. 나 우울해, 슬퍼, 하고 숨어서 속삭이는 소심함이 아니라, 그의 음악을 들어보면 때론 러시아의 방대한 대륙을 녹아낸 듯한 웅장한 스케일이 느껴져. 웅장함과 섬세함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니, 밀당이 대단한 거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그는 이 곡을 초연하고 열흘 후에 죽었다고 한다. “스스로 최고의 걸작으로 꼽았던 작품이야. ‘나의 진혼곡 같다’고도 했다는데, 이 곡 속에는 인생의 절망과 고뇌, 슬픔이 느껴져. 죽음을 예감한 것 같은 비장함마저 담겨 있는 곡이지.
너무 과장된 감상일지 모르겠지만, 더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대목은 그런 비극적인 개인사 속에서 작곡한 곡 속에 인간에 대한 애정, 조국에 대한 사랑이 절절히 담겨있다는 거야. ‘비창’이라는 곡 제목은 그의 동생이 붙였다는데, 이 교향곡의 느낌을 무척이나 적절하게 담고 있는 제목이야.“
이 곡은 초연 당시 반응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고 한다. “교향곡이나 협주곡은 음악이 끝날 때, 마치 액션 영화의 클라이맥스처럼 거창하게 펼쳐지는 대목이 있는데, 이 곡은 그렇지 않거든. 관객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암울한 이 곡을 별로 맘에 들어 하지 않았어. 하지만 현대의 청중들에게는 굉장히 사랑받는 곡이야. 어떤 사람들은 베토벤을 제치고 차이코프스키를 최고로 꼽기도 하니까 말야.” 걸작으로 남은 작품들이 당시에 좋지 못한 반응을 얻었던 건 이 곡만의 일은 아니었다. 예술 작품이라는 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때가 있는 모양이다.
차이코프스키라면, 므라빈스키
선배가 명연으로 꼽아준 앨범은 러시아 출신 지휘자 므라빈스키가 녹음한 연주다. “한 민족의 독특한 정서를 살리는 데, 실제 그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자국민보다 더 적격자는 없겠지. 베토벤의 <9번 교향곡> 중에서 푸르트뱅글러가 절대 명연으로 대접받고 있듯이, 차이코프스키 <비창>은 므라빈스키의 연주가 절대적인 호평을 받고 있어.
므라빈스키의 지휘는 슬픔 속에 묻혀 마냥 흐느끼지 않고, 풍성한 음들을 살리면서도, 절도 있는 러시아 음악이 가진 중후한 매력을 잘 살리고 있지. 이런 므라빈스키조차도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는, 너무 우울하고 감상적이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해. 나중에서야 들으면 들을수록 좋아진다고 말했어.” 오래 곁에 두고 자주 사귀어야 그때 속내를 보이는 음악도 있는가보다.
예술가들의 마음속에는 세상과 단절된 자기만의 방이 하나씩 있는 모양이다. 선배님 설명을 들어보니, 그런 성격으로, 그런 현실 속에서 매몰되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해나갔다는 것이, 아무리 직업적으로 작곡해나갔다고 해도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스스로 안에서 길어 올릴 수 있었다는 게 나 같은 범인으로선 이해하기 어렵다. <비창>은 정말로 아름다운 음악이다. 어둡게 시작하는 서두를 지나고 나면, 단호한 트럼펫 소리를 넘어 가만히 풀밭을 지나가는 미풍도 느껴지고, 하늘을 붉게 물든 노을 진 풍경도 눈에 선해지는 순간이 있다.
사람들의 눈에 차이코프스키가 소심하고 우울하게만 비춰졌을지 모르겠지만, <비창>을 들으면 이 사람 가슴 속에 분명 어떤 열정이 있다는 게 느껴진다. 가슴 속에 엄청나게 푸르고 넓은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게 짐작된다. 현실에서 표출하지 못했던, 높거나 뜨겁거나 차가웠던 감정들이 그의 음악에 고스란히 표출된 모양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던, ‘뭐라고 딱히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을 그의 음악들이 분명히 건드리고 있다.
선배의 설명을 듣고 나니까 차이코프스키한테 마냥 연민이 생겨서 말이다. 그가 마지막 <비창>을 작곡할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상상하며 다시 음악을 듣는다. 원래도 호감 있는 작곡가였지만, 이번 주 내내 그의 음악을 듣고 있자니, 점점 더 빠져든다. 역시 한국인이기 때문일까? 이 음악의 작곡가가 차이코프스키가 아니라고 해도, <비창>은 마음에 들어 했을 거다. 분명하다.
겨울이면 우리나라에서도 매년 공연되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피아노를 배우고 나서 내가 처음으로 샀던, 500원짜리 클래식 악보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였다. 물론 ‘언젠가 쳐봐야지’라든가 ‘이걸 칠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피아노를 연습해야지’ 같은 마음으로 산 악보였는데, 마치 ‘이 옷을 일단 사두고, 얼른 살을 빼서 입어야지’하고 산 옷을 결코 입게 되지 못하는 일처럼, 그 곡을 연주하는 날은 두고두고 오지 않았다.
대신 종종 악보의 첫 소절을 눈으로, 입으로 따라 읽곤 했다. 그래서일까, <백조의 호수> 첫 소절은 아직도 입에 맴돈다. 첫 음이 시작되면, 눈앞에 한 점이 생기고, 음악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 한 점이 둥근 호수처럼 커져 나간다. 이 곡을 작곡한 차이코프스키가 러시아 작곡가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서, 상상 속의 ‘백조의 호수’는 꽁꽁 얼어있는 아주 차가운 호수다. 그 위에서 백조들은 피겨 스케이팅을 하듯 우아하게 호수를 거닌다.
이 음악은 어찌나 비극미가 물씬한지, 이 곡을 들을 때면 나는 언제나 이별을 앞둔 여자가 떠올랐다. 발레 음악으로 많이 쓰이는 음악이므로, 상상 속의 그 여자는 발레복을 입고서 이 음악에 맞춰 격정적으로 춤을 추는데. 이 상상은 이내 2008년 이 곡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던 김연아의 경기로 오버랩되며 마무리된다.
예측불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카라얀이 지휘하는 차이코프스키 4번 교향곡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을 들으면서, 그의 음악들이 피겨 스케이트의 동작들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피겨 스케이트는 빙판 위에서 한 순간도 정지해있지 않고 미끄러지듯 춤을 춘다. 도대체 저 프로그램을 어떻게 외우는 걸까 싶을 정도로 부드럽게 때론 휘몰아치게 연기를 하는데,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꼭 그렇다.
잠잠했다가 갑자기 울컥 감정이 치솟아 오르듯, 음들이 솟구치고 쏟아지고, 전혀 예상치 않은 음들이 이어지는가 하면, 때론 이게 박자가 맞는 건가 싶을 정도로 성급하게 치고 나오는 음도 있다. 그야말로 예측 불가. 그저 출렁인다.
모차르트의 음악들이 정돈된 느낌을 주는 데 비해,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음표를 흩트려 놓은 것만 같다. (특히 <4번 교향곡>이 그렇다!) 훨씬 더 감정적으로 들린다. 어쩐지 조마조마한 채로 듣게 된다. 그의 몇몇 교향곡을 쭉 들어보니, 갑자기 음악이 어두워지거나, 갑자기 씩씩해지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분도 그렇지 않던가.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음악들은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처럼 느껴진다. 격정적이다. 그가 오랜 시간 조울증을 앓았다고 하는데, 그런 그의 심리상태를 고스란히 악보에 적어 내려간 것 같다. 같은 나라의 음악가인 라흐마니노프가 특유의 우울과는 또 다르다.
이를테면, 차이코프스키 <5번 교향곡> 같은 경우, 아주 깊은 바닥에서부터 음을 끌어내면서, 깊은 슬픔으로 곡이 시작하지만, 왈츠가 삽입된 3악장은 화사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다. 내가 좋아하는 4악장은 기상곡처럼 씩씩하고 웅장한 에너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울적할 땐 옆에서 말도 못 붙일 정도로 바닥까지 내려갔다가도 금세 기분이 좋아져 연신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사람같다고 할까. 7색 무지개같이 다양한 감정이 제 색깔을 잃지 않고 조화롭게 어울려 있는 게, 차이코프스키의 매력이자, 내가 그를 특별히 좋아하는 까닭이다.
한국인들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러시아 음악
우리의 대중문화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러시아 음악.
위는 모래시계 테마음악이다.
선배 말에 의하면, 한국 사람들의 러시아 음악가 사랑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단다. “일단 제목에 러시아라는 말이 붙으면 판매량이 올라간다고나 할까. 이왕이면 러시아 민요, 러시아 가곡, 러시아 작곡가에 대한 선호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야.”
러시아 음악을 들어본 적 없다고? 선배가 읊는 이 곡들의 제목만 들어도 이내 입에 감기는 멜로디가 있을 테다. “20년 전에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드라마 <모래시계>의 테마음악이 러시아 태생이지. (회색빛 도는 백발에 남성적인 목소리로 사랑받는 러시아 바리톤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야!) 심수봉이 불렀던 ‘백만 송이 장미’도 러시아 곡을 번안한 가요지. 하다못해 테트리스 음악이나 신화가 부른 ‘T.O.P’에서도 러시아 음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어.
러시아 음악이라고 하면, 웅장하면서도 역동적이고, 서정적이면서도 섬세한 성격을 갖고 있어. 서유럽 쪽 음악이 완벽하게 세팅된 아름다운 코스 요리와는 스케일이 다른 느낌이지. 거기에 기본으로 비장미와 우울함을 깔고 들어가. 한국인의 피를 잡아끄는 한의 정서가 담겨 있지. 그래서인지 한국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살살 건드리는 데가 있어.”
그중에서도 차이코프스키의 위상은 특별하다. 러시아 음악의 특징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면서도, 러시아 음악의 위상을 널리 알린 작곡가이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라흐마니노프나, 쇼스타코비치, 무소르그스키 등의 러시아 작곡가들 역시 명곡들을 남겼지만, 차이코프스키는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 등 다방면으로 몇 곡 남기지 않았는데도 장르별로 손가락으로 꼽힐 만한 걸작들을 남겼거든.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러시아인의 정서를 그저 한쪽으로만 담아내지 않고, 누구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서로 세련되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아. 특히 발레 음악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러시아가 발레의 종주국으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차이코프스키의 3대 발레 음악으로 꼽히는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굳이 차이코프스키라는 작곡가를 떠나서도 걸작으로 꼽을 수 있는 3대 발레곡이야.”
차이코프스키, 웅장함과 섬세함을 다룰 줄 아는 작곡가
므라빈스키가 지휘하는 차이코프스키 6번 교향곡 <비창>
차이코프스키는 실제로도 우울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를 말할 때 꼭 빠지지 않는 게 그의 예민하고 소심했던 성격, 독특한 성적 취향, 그 탓에 우울하고 비극적이었던 말년의 이야기다. “지금도 동성애자라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데, 100년 전이야 말해서 무엇할까? 그런 자신을 평생 비관하며 우울한 삶을 살았고, 그걸 감추기 위해 아무 여자와 억지로 결혼했지만, 불행한 결혼생활이었어. 이혼하겠다고 자살소동까지 벌였으니 말 다했지. 끝내 주변 사람들의 등쌀에 못 이겨 자살했다는 게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이러한 그의 성격과 인생 역경 탓인지 그의 음악은 특히나 섬세하고 비애감이 깊지. 하지만 좀 달라. 나 우울해, 슬퍼, 하고 숨어서 속삭이는 소심함이 아니라, 그의 음악을 들어보면 때론 러시아의 방대한 대륙을 녹아낸 듯한 웅장한 스케일이 느껴져. 웅장함과 섬세함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니, 밀당이 대단한 거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그는 이 곡을 초연하고 열흘 후에 죽었다고 한다. “스스로 최고의 걸작으로 꼽았던 작품이야. ‘나의 진혼곡 같다’고도 했다는데, 이 곡 속에는 인생의 절망과 고뇌, 슬픔이 느껴져. 죽음을 예감한 것 같은 비장함마저 담겨 있는 곡이지.
너무 과장된 감상일지 모르겠지만, 더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대목은 그런 비극적인 개인사 속에서 작곡한 곡 속에 인간에 대한 애정, 조국에 대한 사랑이 절절히 담겨있다는 거야. ‘비창’이라는 곡 제목은 그의 동생이 붙였다는데, 이 교향곡의 느낌을 무척이나 적절하게 담고 있는 제목이야.“
이 곡은 초연 당시 반응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고 한다. “교향곡이나 협주곡은 음악이 끝날 때, 마치 액션 영화의 클라이맥스처럼 거창하게 펼쳐지는 대목이 있는데, 이 곡은 그렇지 않거든. 관객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암울한 이 곡을 별로 맘에 들어 하지 않았어. 하지만 현대의 청중들에게는 굉장히 사랑받는 곡이야. 어떤 사람들은 베토벤을 제치고 차이코프스키를 최고로 꼽기도 하니까 말야.” 걸작으로 남은 작품들이 당시에 좋지 못한 반응을 얻었던 건 이 곡만의 일은 아니었다. 예술 작품이라는 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때가 있는 모양이다.
차이코프스키라면, 므라빈스키
선배가 명연으로 꼽아준 앨범은 러시아 출신 지휘자 므라빈스키가 녹음한 연주다. “한 민족의 독특한 정서를 살리는 데, 실제 그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자국민보다 더 적격자는 없겠지. 베토벤의 <9번 교향곡> 중에서 푸르트뱅글러가 절대 명연으로 대접받고 있듯이, 차이코프스키 <비창>은 므라빈스키의 연주가 절대적인 호평을 받고 있어.
므라빈스키의 지휘는 슬픔 속에 묻혀 마냥 흐느끼지 않고, 풍성한 음들을 살리면서도, 절도 있는 러시아 음악이 가진 중후한 매력을 잘 살리고 있지. 이런 므라빈스키조차도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는, 너무 우울하고 감상적이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해. 나중에서야 들으면 들을수록 좋아진다고 말했어.” 오래 곁에 두고 자주 사귀어야 그때 속내를 보이는 음악도 있는가보다.
예술가들의 마음속에는 세상과 단절된 자기만의 방이 하나씩 있는 모양이다. 선배님 설명을 들어보니, 그런 성격으로, 그런 현실 속에서 매몰되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해나갔다는 것이, 아무리 직업적으로 작곡해나갔다고 해도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스스로 안에서 길어 올릴 수 있었다는 게 나 같은 범인으로선 이해하기 어렵다. <비창>은 정말로 아름다운 음악이다. 어둡게 시작하는 서두를 지나고 나면, 단호한 트럼펫 소리를 넘어 가만히 풀밭을 지나가는 미풍도 느껴지고, 하늘을 붉게 물든 노을 진 풍경도 눈에 선해지는 순간이 있다.
사람들의 눈에 차이코프스키가 소심하고 우울하게만 비춰졌을지 모르겠지만, <비창>을 들으면 이 사람 가슴 속에 분명 어떤 열정이 있다는 게 느껴진다. 가슴 속에 엄청나게 푸르고 넓은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게 짐작된다. 현실에서 표출하지 못했던, 높거나 뜨겁거나 차가웠던 감정들이 그의 음악에 고스란히 표출된 모양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던, ‘뭐라고 딱히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을 그의 음악들이 분명히 건드리고 있다.
선배의 설명을 듣고 나니까 차이코프스키한테 마냥 연민이 생겨서 말이다. 그가 마지막 <비창>을 작곡할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상상하며 다시 음악을 듣는다. 원래도 호감 있는 작곡가였지만, 이번 주 내내 그의 음악을 듣고 있자니, 점점 더 빠져든다. 역시 한국인이기 때문일까? 이 음악의 작곡가가 차이코프스키가 아니라고 해도, <비창>은 마음에 들어 했을 거다. 분명하다.
두 번째로 선택된 음반 카라얀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5,6번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지만, 연주마다 일정 수준 이상은 해주는 카라얀의 음반을 안듣고 넘어갈수는 없다. 카라얀의 지휘는 가끔 평탄하고 곱다 싶을때도 있지만, 일사분란한 금관과 현의 움직임이 교향곡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한다. 4,5번도 모두 빼어나다. 므라빈스키의 음반과 비교해서 들어보면 좋을 듯 하다.
요즘 가장 HOT한 러시아 출신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에프. 국내에도 와서 직접 차이코프스키 6번을 연주한적도 있다. 음반이 아니라, 그의 지휘모습을 생생하게 감상할수 있는 블루레이를 추천해본다. 게르기에프의 지휘는 섬세하지 않고 거칠다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서정적이면서도 때로는 투박한 것이 또한 러시아 음악의 매력 아니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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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댓글
추천 상품
필자
김수영
summer2277@naver.com
인생이라는 무대의 주연답게 잘, 헤쳐나가고자 합니다.
새라새
2013.05.31
즌이
2013.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