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11. 이전까지 미국 본토에 공격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미국인에게, 본토에 대한 테러 공격은 대단히 위협적인 공포다. 과거 진주만 공격이 있은 후, 미국에서는 일본 잠수함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것이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그 공포를 유머러스하게 그려낸 영화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코미디 영화 <1941>이었다. 일본이나 소련을 비롯한 외부의 공격은 항상 루머에 그쳤을 뿐이고, 미국 본토의 테러는 언제나 극우주의자들에 의해 저질러지곤 했다. 적어도 미국 본토는, 외부의 적에게는 ‘안전지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9.11.이 터지면서 미국인은 ‘안전’에 대한 확신을 버렸고, 외부의 적에 대한 사전 공격 그리고 초월적인 감시와 정보활동까지 인정하게 되었다. 책과 영화 등에서 미국 본토에 대한 테러를 다양하게 묘사하게 되었다. 2002년에 만들어진 <썸 오브 올 피어스>에서도 미국 도시에 대한 핵공격을 그리고 있다. 미국에서 2004년 출간된 『전몰자의 날』 역시 알 카에다의 핵무기 테러에 대한 미국의 대응을 그린다. 9.11. 이후 애국주의가 한창이던 때에 나온 『전몰자의 날』이기에, 빈스 플린의 입장은 꽤나 강경하다.
조국 미국의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꾸려가는 동안 이들 특수부대 요원들은 지구의 반대편에서 그들의 원한을 갚고 있었다. 그들을 그저 범죄에 대한 보복을 가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그들의 소양과 훈련수준에 대한 모욕이었다. 하지만 그들 자신도 보복이라는 임무를 행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
같은 CIA요원이지만, 전력분석관이었던 잭 라이언과 미치 랩은 다른 유형이다. 잭 라이언은 ‘분석’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붉은 10월>에서 소련 잠수함이 미국 영해로 다가올 때, 라이언에게 주어진 임무는 ‘분석’이었다. 소련 해군의 현재 상황이 어떻고, 잠수함 함장은 어떤 인물이고, 소련의 대응 상태나 통신의 정황이 어떤지 등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직접적인 작전에 뛰어들어 총을 쏘는 경우도 당연히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잭 라이언은 문관에 가까운 캐릭터였다. 하지만 미치 랩은 다르다. 그가 CIA에 들어간 이유는, 대학시절 비행기에 탔던 여자친구가 테러에 희생됐기 때문이다. 그는 적에게 자비를 베풀기보다, 우리 편에 속한 사람들의 안전을 위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현대판 암살자였다. 그것도 암살자라는 투박한 단어가 공개적으로 쓰이기에는 극도로 문명화된 나라에서 살고 있는 암살자였다. 그의 조국은 스스로를 세련미가 덜한 여타 나라들과 다른 존재로 차별화시키는 것을 몹시 좋아했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찬양하는 민주주의 국가, 다른 나라 국민의 은밀한 살해라는 구체적인 목적을 위해 공개적으로 자국의 국민 중 하나를 찾아서 훈련시키고 이용하는 일을 절대 용인하지 못하는 국가로 말이다. 하지만 랩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워싱턴 권력의 심장을 차지하고 있는 양식 있는 사람들의 감수성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편의대로 ‘요원’이라 불리는 현대판 암살자였다. |
『전몰자의 날』에서 미치 랩은 알 카에다의 음모를 알게 된다. 특수부대와 함께 파키스탄 국경의 마을을 급습한 미치 랩은 정보를 캐내기 위하여 전혀 망설이지 않는다. 핵폭탄이 미국으로 이미 향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어떻게든 막아내기 위하여 사력을 다한다. 하지만 적은 내부에도 있다. 데뷔작인 『임기종료』에서 빈스 플린은 ‘추악한 정치인’들을 암살하는 도발적인 이야기를 전개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빈스 플린은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정치인들을 증오한다.
랩은 모든 결정에서 정치가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개의치 않았다. 워싱턴과 같은 도시나 백악관과 같은 곳에서 정치가 그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랩에게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대단히 짜증스럽고 해로운 방식을 택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워싱턴에서는 거의 모든 회의에 난해하고, 그릇되고, 극단적인 정치적 정의가 만연하고, 정말로 중요한 사안은 무시되고 다른 사람에게 미뤄져 나중에 적당히 처리되면서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 논의, 분석되는 환경을 만나게 된다. 행동파인 사람이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유형의 장소가 아니라는 말이다. |
미국 내에 들어온 테러리스트를 찾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일부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미치 랩의 임무를 방해한다. 합법적으로, 대통령의 명령을 통해서. 『전몰자의 날』은 결코 미치 랩의 일방적인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가 전장에 있을 때, 혹은 용의자를 심문할 때는 모든 것이 랩의 의도대로 움직이지만 오히려 미국 내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모든 것은 정치의 영역이고, 대부분의 정치인은 썩었다. 그래서 랩은 자신의 방식을 고수한다.
랩은 정부라는 거대한 관료제도의 한계 안에서는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관료 사회는 너무나 천천히 움직였고 또 너무나 많은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경우에는 능력과 은밀함과 또 필요하다면 잔인함까지 조합해서 자신의 기술을 자율적으로 적용하도록 놓아두는 것이 최선이었다. |
사실 미치 랩은 대단히 폭력적이고, 위험한 인물이다. 그 계보를 영화에서 찾는다면 더티 해리와 람보에 가깝다. 대단히 우파적인, 오로지 힘과 복수의 논리를 고수하는. 미국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전몰자의 날』이 한편으로 불편하기도 한 이유는 그것이다. 하지만 미치 랩의 입장도 이해는 간다. 테러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어쨌건 다시 수많은 사람들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니까. 그 단순한 복수의 논리에 빠져 있기는 하지만, 미치 랩은 대단히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주인공이다. 행동으로 모든 것을 입증하고, 위선자들과 싸워나가는 인물은 늘 매혹적이다.
빈스 플린의 작품에는 존 르 카레와 프레데릭 포사이드의 첩보소설에서 보이는 사려 깊은 통찰은 없다. 대신 빈스 플린의 소설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몰아치는 액션과 서스펜스 그리고 한없이 매력적인 미치 랩을 포함한 개성적인 캐릭터들이 줄줄이 포진해 있다. 그러니까 미치 랩 시리즈는, 너무나 스릴 넘치는 오락소설인 것이다. 그 사실만 인지한다면, 『전몰자의 날』을 비롯한 ‘미치 랩’ 시리즈를 거부할 스릴러 독자는 없을 것이다.
- 전몰자의 날 빈스 플린 저/이영래 역 | 알에이치코리아(RHK)
9?11 이후 벌어진 워싱턴 정가 안팎의 불편한 정치적 논쟁들과 테러리즘에 관한 어마어마한 진실들을 CIA 대테러센터 비밀요원 미치 랩의 눈으로 풀어낸 빈스 플린의 액션 서스펜스 스릴러 ‘미치 랩 시리즈’는 출간될 때마다 뉴욕 타임스, 퍼블리셔스 위클리, 아마존닷컴 소설 부문 1위를 점령하며 1천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는 전미 최고의 인기 시리즈이다. 2012년 11월, 현지에서 13편이 출간 예정인 ‘미치 랩 시리즈’는…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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