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단원들까지 매료시킨 천재 작곡가
중앙묘지의 ‘음악가 묘역’을 돌다 보면 슈베르트 뒤편으로 같은 이름의 음악가들이 죽 늘어선 것을 볼 수 있다. 슈트라우스 가문의 음악가들이다.
2011.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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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묘지의 ‘음악가 묘역’을 돌다 보면 슈베르트 뒤편으로 같은 이름의 음악가들이 죽 늘어선 것을 볼 수 있다. 슈트라우스 가문의 음악가들이다. 정리해보면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 장남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차남 요제프 슈트라우스, 그리고 3남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다. 이렇게 4부자가 모두 빈 왈츠의 전성기를 함께하면서 다 같이 왈츠의 작곡가와 지휘자로서 이름을 날렸고, 지금도 사이좋게 함께 누워 있다.
그중에서도 다른 형제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빛나고 뚜렷한 존재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1825~1899다. 그런데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아들들, 특히 자신의 이름을 물려받은 장남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아들을 은행가로 성공시키기 위해 온갖 뒷바라지를 다 했다. 요한 역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해 늘 학교 성적은 최상위를 유지했고 명문 고등상업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역시 피는 어쩔 수 없나 보다. 겉으로는 학교 공부를 잘하던 요한이 사실 뒤로는 몰래 음악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후원자는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였으며, 어머니의 모성은 언제나 아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려고 했다.
결국 그는 19세에 아버지와 상의도 없이 스물네 명으로 구성된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악단’을 설립한다. 물론 자신이 사장 겸 지휘자 겸 전속 작곡가였다. 아버지의 노여움은 컸다. 그는 아들이 음악가로서 활동하는 것을 차단하려고 음악계의 인맥을 총동원해 빈 시내의 모든 공연장과 무도장에 아들의 악단을 쓰지 못하게 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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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카페 돔마이어’에서 첫 연주회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카페에 모인 청중들은 아버지의 동원에 의해 연주회를 방해하려는 무리와 아들의 연주회를 지지하는 무리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긴장감이 넘치는 가운데 음악회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마지막 곡이 끝났을 때,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아버지 악단이 도저히 줄 수 없는 참신함과 날렵함으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결국 아버지의 KO패로 대결은 끝났다.
이후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기세를 꺾을 수 있는 것은 빈에 없었다. 빈의 왈츠 악단은 아버지와 아들의 두 파로 양분되었지만, 시대가 요구하는 아들의 인기는 점점 더 높아만 갔다. 그리고 1849년에 아버지 요한 스트라우스 1세는 사망했다.
아버지가 죽자 요한 슈트라우스 1세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모두 줄지어 아들 2세를 찾아왔다. 그리고 붉은 방석 위에 올려진 아버지의 지휘봉을 아들에게 바쳤다. 그것은 “저희 악단을 당신이 거두어 주십시오”라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빈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두 악단은 통합되고, 더불어 빈 무도회장의 권력 역시 아들이 통일하게 되었다.
이제 슈트라우스 2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가 되었다. 아버지에 비해 아들의 음악은 훨씬 세련되고 감각적이었다. 또한 한 손에 바이올린을 든 채 연주를 하다가 활로 지휘하는 민첩한 모습은 경탄의 대상이었다. 당시 빈에서는 갈수록 무도회가 많아졌고, 왈츠 악단의 수요는 어마어마했다. 그 많은 요청을 다 수용하기도 어려웠다. 슈트라우스는 악단을 두 개로 나누어 양쪽에서 연주를 시키고, 본인은 바이올린을 들고 뛰어다니면서 하룻저녁에 몇 탕을 소화해야만 했다. 또 매일 새로운 곡을 선보여 사람들을 감탄시켜야 했기 때문에, 연주가 끝난 뒤에는 밤을 새워 작곡을 했다. 실로 엄청난 성공이었다.
결국 슈트라우스 2세는 과로로 쓰러졌다. 하지만 악단 일을 중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동생인 요제프에게 대신 악단을 지휘해 달라고 했다. 당시 동생은 건축가로서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난 지휘할 줄도 모른다”는 요제프에게 요한은 “괜찮아. 아무 상관없어. 그냥 지휘봉을 들고 서 있기만 하면 돼. 너도 슈트라우스잖아”라며 설득했다. 그리하여 요제프 역시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음악이라는 가업에 뛰어들어 아버지와 형을 잇게 된다. 같은 방식으로 에두아르트마저 직장을 팽개치고 악단으로 들어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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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음악 기업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모두 슈트라우스이니 세 명의 지휘자에 하룻저녁 세 악단을 동시에 가동하는 게 가능했다. 요한이 전체 CEO가 되어 신곡을 작곡해서 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장남의 악단은 중앙 무대인 무교동에서 연주하고 차남은 영등포에서, 3남은 화양리에서 연주를 하는 식으로, 슈트라우스 형제들은 빈의 무도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수백 곡에 달하는 왈츠와 폴카, 마주르카, 행진곡 등을 남겼다. 그것은 다 들을 수도 없고 다 알 수도 없다. 아마 그의 왈츠 200곡을 다 듣는다면 몸이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확실한 명곡들이 있어서 그의 작품 세계를 대표한다. 완전히 나의 주관적인 취향일지도 모르지만, 객관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요한 슈트라우스 왈츠 표준 10곡’을 엄선해본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 <황제 왈츠>, <빈 숲 속의 이야기>, <봄의 소리>, <남국의 장미>, <예술가의 생애>, <예술가의 콰드릴>, <술, 여자, 노래>, <오스트리아의 마을 제비>, <빈 기질>. 이 열 곡은 한번 들어볼 만하다.
5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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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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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비
2011.09.19
gazahbs
2011.09.06
달빛젤리
2011.09.05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 <박쥐>를 들으며 이 칼럼을 읽고 있으니 빈을 온통 춤바람으로 물들게 했던 그 왈츠의 황금기가 느껴지는 듯 합니다. 슈트라우스 4부자가 그 재능과 열정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축복받은 도시, 빈의 무도회장의 그 달뜬 공기는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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