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말하자면 17세기 인도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가 우리나라 관객의 관심을 끌기는 쉽지 않은 듯하다. 옛날 인도 황제에게서 따왔다는 등장인물의 이름도 낯설고, 머리에 터번을 두르는 남아시아 복식도 낯설다. 한국에서, 특히나 상업 연극으로는 매우 드물게 다루어지는 문화권이다. 나만 해도 <타지마할의 근위병>이라는 제목을 들었을 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2017년에 이 작품을 처음 관람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오로지 공연 제작사 달 컴퍼니의 기획을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키다리 아저씨>, 연극 <비너스 인 퍼> 등 완성도 높은 연극과 뮤지컬들을 봐왔으므로, 달 컴퍼니의 신작이라면 어느 정도 재미는 보장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대명문화공장(현 예스24스테이지) 2관에 들어섰다.
그 후 두 달 동안 나는 틈만 나면 <타지마할의 근위병>을 보러 대학로로 달려갔다. 난생처음 보는 무대 전체를 뒤덮은 피바다, 빨갛게 핏물이 들어 색이 빠지지 않는 배우들의 손끝, 그리고 잔인하지만 아름다운 대본을 모두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648년 힌두스탄이라는 설정이 주는 거리감은 오히려 이 ‘잔혹동화’같은 연극에 매력을 더하는 요소였다. 초연 이후 자그마치 8년 만에 <타지마할의 근위병>은 한국 무대로 돌아왔다. 그런데 2025년에 다시 본 이 연극은 이상하게도, 내가 알던 그 낯설고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다. 극 중 한 인물이 들고 있던 칼을 바닥에 던지고 이렇게 외칠 때, 나는 속절없이 지난 겨울의 광장을 떠올렸다.
“왕은 엿 먹어라, 아름다움이여 영원하라!”
<타지마할의 근위병>은 인도의 왕릉 타지마할에 얽힌 전설을 모티브로 만든 연극이다. 그 전설이라 함은, 무굴 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죽은 아내를 기리기 위해 타지마할을 건설한 후, 그만큼 아름다운 다른 작품이 만들어질 것을 우려해 건설에 참여한 장인들의 손을 잘라버렸다는 이야기다. 작가 라지프 조셉은 이 섬뜩한 설화에서 바로 그 손을 자른 장본인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명령을 내린 황제가 아니라, 명령을 수행한 군인을 말이다.
서로를 형제라고 부를 정도로 절친한 ‘휴마윤’과 ‘바불’은 타지마할 건설 현장 앞에서 새벽 경계근무를 서는 말단 근위병들이다. 16년간 베일에 싸여있던 타지마할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기 전날 밤, 두 사람은 상상도 해본 적 없는 끔찍한 임무를 맡게 되고 이해하기 어려운 왕의 명령을 따르며 자신들이 속한 체제를 뼈저리게 감각한다. 그러나 두 친구가 이러한 불합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규율을 중요시하는 휴마윤은 상명하복의 원칙에 따라 해야만 하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공상하기를 좋아하며 예술을 경외하는 바불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깊은 비참함을 느낀다. 둘은 자신의 입장에 상대방이 동조해 주길 바라지만 생각의 차이가 낳은 균열은 점점 더 서로를 멀리 갈라놓을 뿐이다. 너무나 상이한 각자의 세상을 지키기 위해 두 군인은 각기 다른 결심을 한다.
2024년 12월, 대한민국 전역에도 최고 권력자로부터의 부조리한 명령이 떨어졌다. 잘못된 상황임을 알고 소극적으로 대응한 군인들도 있지만, 총을 들고 국회 유리창을 박살 낸 군인들도 있다. 그들의 변명은 ‘군인에게 항명은 있을 수 없다’라는 것이었다. 작중 휴마윤의 논리도 같다. “그 일을 하지 않았으면 우리가 처벌받았을 것” 이라고 바불을, 또 스스로를 설득한다. 납득할 만한 이유처럼 보인다. 진짜로 잘못한 것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하지만 만약 그게 다라면, 불의에 불복할 수 있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그런 사람이 있기나 할까? 이의를 제기하고, 총부리를 막아서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밤에 길거리에서 응원봉을 들었던 사람들은 단지 군대에 소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미친 황제가 두렵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걸까?
연극 <타지마할의 근위병>은 흔한 표현으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하는 반면에 선명한 경고를 하는 작품이다. 휴마윤은 바불에게 세상의 권력 구조를 거듭 이해시키고자 하지만, 반대로 친구가 그에게 보여준 공감과 저항의 길 앞에서는 기를 쓰고 눈을 감아버린다. 부당하게 피해입은 삶들을 상상하려 하지 않고 오직 명령에 복종하던 군인은 결국 그 자신도 권력에 의해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기고 만다. <타지마할의 근위병>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다름이 아니라 ‘함께 비참할 수 있는가’ 이다. 이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손을 잘리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에서 어린이들이 전쟁범죄의 희생양이 되고 있을 때, 일터를 잃은 사람이 고공에서 농성을 하고 휠체어를 탄 사람이 가던 길을 가로막힐 때 바로 그 세상의 일원인 당신은 최소한 죄책감을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2017년 초연이 미국에서 올라왔던 에이미 모튼 연출의 아틀란틱 씨어터 컴퍼니 버전을 차용했다면, 2025년에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재공연되는 <타지마할의 근위병>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옷을 입었다. 이번 공연을 맡은 신유청 연출은 과감하게 무대를 비우고, 광활한 어둠 속에 배우 두 명을 세워두었다. 언뜻 너무 커 보이는 극장은 연극이 시작하자마자 공간이 주는 힘을 한껏 발휘하는데, 높은 천장 아래서 바불이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이야기할 때 관객은 그 삶의 크기를 같이 가늠해 볼 수 있고, 휴마윤의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울리면 그가 느끼는 공포가 극대화되어 다가온다.
초연 때 화제를 모았던 200리터의 소품 피 대신 이번 프로덕션에선 물과 붉은빛 조명으로 같은 장면을 표현하는 등 시각적 충격을 덜어내었다. 그럼에도 무대 위로 흐르는 물소리, 이미 붉게 물들어있는 천 조각들로 두 명의 배우가 한참이나 바닥을 닦아내는 광경이 주는 강렬한 인상에는 변함이 없다. 연극의 결말부, 휴마윤과 바불이 호수 위의 새 떼를 목격하는 장면은 재공연의 새로운 연출 중 단연 압권이다. 커튼콜까지 이어지는 물안개의 사용이 관객으로 하여금 캐릭터들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체험하도록 한다.
연극의 두 주인공으로는 최재림과 백석광이 ‘휴마윤’을, 이승주와 박은석이 ‘바불’을 연기한다. 초연 때부터 자신의 첫 연극인 <타지마할의 근위병>에 애정을 드러내던 최재림은 8년 만에 다시 작품에 참여해 한층 섬세해진 시선으로 캐릭터의 행동과 주변 관계를 탐구한다. 백석광은 개막 불과 몇 주 전에 작품에 합류했으나 짧은 연습 기간이 무색하게 완성도 있는 연기로 휴마윤이라는 인물, 또 그가 사는 세계의 복잡한 면모를 빠짐없이 보여주고 있다. 박은석이 특유의 캐릭터성이 강한 연기로 마치 대본 속에서 튀어나온 듯이 완벽하게 바불의 자유로운 영혼을 표현하고 있다면, 이승주는 늘 그렇듯 안정적인 톤을 가져가면서도 배우에게서 느껴지는 대체 불가능하고 시니컬한 분위기를 이야기 속에 녹여 인물과 작품에 신선한 색깔을 입히는 중이다.
저 멀리 낯선 땅에서부터 낯선 이름을 가지고 도착한 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은 사실 항상 우리 앞에 놓여있던 익숙한 갈림길이다. 그 길 위에 선 관객에게 <타지마할의 근위병>은 정답을 속삭이지 않는다. 이 연극은 절규한다. 제발 형제의 손을 자르지 말라고 비명을 지른다. 나 아닌 다른 이가 겪는 참혹함을 눈을 뜨고 똑바로 보라고 울부짖는다. 만약 그렇게만 해준다면, 미치광이 왕이 죽여버린 아름다움을 당신이 살려낼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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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나
만화가. 『요나단의 목소리』는 그의 데뷔작이다. 『요나단의 목소리』는 딜리헙에서 연재되던 중 탁월한 연출과 스토리텔링만으로 화제가 되었고, 제 5회 무지개 책갈피 퀴어 문학상을 수상했다. 갈등과 슬픔, 그리고 그 안에서도 살아갈 이유를 놀라운 섬세함과 통찰력으로 펼쳐놓은 이 작품은 연재 당시에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중학생부터 직장인, 동료 작가들을 비롯한 넓은 독자들 사이에서 명작으로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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