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래와 김해인의 만화 절경
[김해인의 만화절경] 올해의 만화
고양이 쿠니타마가 등장하는 올해의 문제작부터 올해 가장 과몰입해서 읽은 만화까지. 김해인 편집자와 함께 하는 만화 결산.
글: 김해인
2025.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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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을 맞이하여 서점이면 서점, 출판사면 출판사, 분야를 막론하고 다들 올해의 ○○를 꼽고 있다. 한 해 동안 가장 활약하거나 뛰어났던 작품을 치하하는 것인데, 선정 위원이 있는 상도 있으나 대부분은 독자와 같은 소비자의 인기 투표로 정해지고는 한다. 인기 투표가 더 대표성이 있을 수도 있고 전자 같은 선정 방식이 보다 작품에 권위를 부여하는 방법일 수도 있지만(그리고 상금이 있을 확률도 크지만), 하여튼 올해 무엇이 가장 인기 있었고 많이 회자가 되었는지를 지켜보며 나도 후보에 오른 내 담당 작품에 표를 던진다. 친구들아 추운데 잘 지내고 있지? 2025 리디 어워즈 베스트 단편상 후보에 『앨리스, 앨리스』와 『해변의 스토브 오시로 고가니 단편집』이 올랐는데 시간 있으면 투표 좀 해주지 않을래? 알겠다고만 하지 말고 투표 완료한 화면을 캡처해서 보여줬으면 좋겠어! 참고로 투표는 매일 할 수 있단다. 그런 연말 인사를 돌리면 한 해가 끝나긴 끝나는구나 싶다. (얘들아 미안~)

 

물론 가장 재밌는 것은 연말에 가까운 친구들과 만나 꼽아보는 올해의 ○○이다. 누군가가 “인생 만화가 무엇이냐”라는 순진하고도 잔인한 질문을 하면(왜 순진하고 잔인하냐면 어떤 사람은 인생 만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일천구백구십사년 무더웠던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가 세상에 발 디딘 그날부터 전 생애를 훑어보는 회고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생이 무엇인지 먼저 정의해달라”라고 빠르게 상위 개념의 질문을 던짐으로써 상대방의 말문을 막히게 한 뒤 질문을 피하곤 한다. 그렇지만 ‘올해’라는 정해진 기간 동안 즐겁게 본 만화를 꼽아보는 것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심지어 재밌을 것 같다. 이것은 올해 가장 뛰어나고 인기가 많았던 작품을 꼽아보자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가장 의미가 있었던 만화를 꼽아보자는 뜻에서 할 수 있고 재밌을 것 같다는 의미다. 언급량, 인기, 흥행, 성적을 다 떠나서 어떤 시절 혹은 어떤 나이를 지나온 나에게 유의미했던 만화를 기록해보자는 의미로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12월의 〈만화절경〉이 한 해의 마지막 달에 업로드되는 것을 고려하여 나의 ‘올해의 만화’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나는 장편만화(최소 20권 이상)를 읽을 때 계획을 세우는 편이다. 일단 하루 동안 그 만화를 몇 권 정도 읽을 수 있는지 살펴본 후, 일일 할당량을 정해 며칠 또는 몇 주에 걸쳐 읽는다. 이렇게 읽는 이유는 내가 지독한 병렬 독서를 하기 때문에 한 작품만 연달아 오래 읽는 게 힘든 탓도 있지만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취침 시간까지, 주어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만화를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재밌다고 무리해서 밤을 새워 읽어선 안 되고(내일 출근 안 할 거니? 하고 정신의 경고등에 빨간불이 켜진다. 근데 출근이고 뭐고 읽게 되는 만화도 있긴 하다. 솔직히 출근보다 만화가 더 중요한 건 사실이다.) 장편만화 특유의 예열 단계나 늘어지는 구간에 중도 하차하는 일을 막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 구간만 무사히 넘어가면 러너스 하이 상태가 되어, 어느 순간부턴 만화와 한 몸이 된 물아일체 상태로 정신없이 책장이 넘어간다.

 


올해 그렇게 읽은 장편만화 중 인상 깊은 것은 『무한의 주인』, 『천재 유교수의 생활』, 『아이실드21』이 있다. 『무한의 주인』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막강한 검객 아노츠를 죽이기로 결심한 소녀 린과 그녀의 경호원이자, 아빠이자, 오빠이자, 연인인 한 남자 만지의 여정을 그린 복수극이다. 내가 올해 읽은 작품 중에 가장 재밌는 작품이고 이 만화를 읽은 것이 올해 내가 가장 잘한 행동이기도 하다. 정말 재밌었다. 『무한의 주인』을 읽는 동안에는 어떤 약속도 안 잡았다. 만지와 린과 함께 여정을 떠난 나의 고결한(과몰입 중인) 정신을 흩트리고 싶지 않았다. 일상에서, 직장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 가면 아직 안 읽은 『무한의 주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으로 버티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퇴근 후엔 (난폭 운전하는 전재준처럼) 한시 바삐 귀가해 몸을 깨끗이 한 후 정화된 마음가짐으로 책장을 펼치곤 했다. 길고 긴 복수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여정을 좇다 보면 다소 예상할 수 있는 결말에 도착했음에도, 끊어야만 풀리고 마는 원한의 굴레를 끊고 난 뒤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남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아니, 느낄 수 있게 된다. (여담으로 이 만화의 마가츠라는 캐릭터를 본 후 『나루토』의 사스케 초기 원안을 찾아보기를. 웃음이 나올 정도로 닮아 있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은 일전의 어떤 작가님이 “나를 사람 만들어준 만화”라고 했던 것을 기억해 전부터 읽어봐야지 했던 만화인데 올해 드디어 완독했다. 워낙 오래전에, 그리고 장기간 연재가 되었던 터라 작품이 다소 낡고 거칠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그래서 더 좋은 점도 있었다. 야마시타 카즈미 작가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인데 그 작가가 이 만화를 그리는 동안 성숙이라 부를 수 있는 인간성의 변화를 조금씩 겪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주인공이자 천재 교수 유택이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마지막으로 보내주는 부분이다. 타고나기를 공감 능력과 사교성이 부족한 유택은 어렸을 때도 아이다운 애교나 응석이 없었는데 당연히 어머니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에게 돌아가신 어머니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어린 유택은 죽은 어머니의 곁에 누워 한참 어머니를 보다가 이런 생각을 한다. “이런 각도에서 어머니를 본 것은 처음일지도 모른다…” 왜 지금에서야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지금 그 순간을 처음이라 할 수 있겠어?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이겠지. 너처럼 똑똑한 아이가 왜 한 번도 그런 소중한 시간을 보내지 않은 거야? 너무 슬프고 안타까워서 그렇게 어린 유택을 나무라고 싶었다. 

 

가수 이효리가 예능 프로그램 〈라디오스타〉에서 “그냥 그렇던데. 그렇게 소름 끼칠 정도는 아니던데?”라고 농담하는 장면이 캡처 화면으로 많이 회자되곤 하는데, 올해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한 짤이 바로 그 짤일 것이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수상 이력 같은 명성, 평론가들의 고평가, 창작자의 ‘아우라’에 기대는 작품에 대한 싫증이나 염증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아이실드21』를 처음 읽고 그랬다. “그냥 그렇던데. 그렇게 소름 끼칠 정도로 재밌지는 않던데?” 그간 재출간을 염원하는 독자들이 굉장히 많은 작품으로 알고 있었던 지라 다른 만화에 비해 너무 큰 기대를 안고 봐서 그랬던 탓일까? 약체 학교에서 포지션에 걸맞은 동료를 차근차근 모으고 라이벌 학교들을 물리치는, 평범한 왕도 스포츠물이라는 감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며칠 뒤… 나는 『아이실드21』를 올해의 만화로, 데이몬 고교 쿼터백 히루마 요이치를 올해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꼽게 되었다. 오타쿠로 태어나 히루마 요이치라는 남자를… 추앙하지 않을 수 있냔 말이야?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모든 것을 걸 줄 아는 세상에서 가장 무모한 현실주의자이자,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죽여주마!!!”를 외치며 두려워 말고 전진하는 이 초고교급 섹시 미식축구 선수를 말이야… 겁이 나고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히루마의 결정적 한마디를 생각하려 한다. “악마는 신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오직 나 자신에게 모든 걸 거는 거야!!!)



장편 말고도 여러 만화를 보았다. 우오토 작가의 『100미터』가 인상 깊었다. 인생의 대부분의 문제는 100m를 누구보다 빨리 달리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두 소년이 어른이 되기까지를 그리며 그들이 왜 달려야 하는지, 평생을 달려왔는데 그 달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이야기다. 육상을 소재로 하지만 스포츠물처럼 진지한 훈련 장면 같은 건 거의 나오지 않고 오히려 철학적인 만화에 가깝다. 작중에서 일본 최고 기록을 가진 선수 자이츠가 했던 말이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불안은 대처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인생은 항상 상실의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 생명의 묘미가 있지.” 막막하고 흔들릴 때마다 생각하고 싶은 대사다. 어떻게 보면 인생과 ‘살아 있음’을 순전히 즐기라는 아주 명쾌한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지.-지구의 운동에 대하여-』를 교차 편집할 때만 해도 ‘이게 만화야, 잠언집이야’ 하는 생각으로 이 작가를 이렇게 좋아하게 될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어느덧 그의 작품은 물론 작가까지도 좋아하게 됐다. 우리의 인생에 아무 의미가 없다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건 굉장히… 따뜻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따뜻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나.

 

『고향 최고!』, 『네즈미의 첫사랑』, 『더 페이블』도 모두 재밌게 보았다. 각각 시트콤, 로맨스, 개그 장르지만 범죄와 일상을 접목해 만든 것이 공통점이라 같이 언급해보았다. 『고향 최고!』는 게토화된 폐쇄적인 지방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마약 사건을, 『네즈미의 첫사랑』는 최강의 킬러인 네즈미가 첫사랑인 남자친구를 지키려는 분투를, 『더 페이블』은 마찬가지로 최강의 킬러로 불리는 사토 아키라가 일 년 동안 청부 살인을 쉬고 사람들과 어우러져 사는(그렇지만 당연히 어우러지는 게 조금 힘든) 이야기를 그린다. 「범죄의 일상 재구성」이라는 제목으로 세 만화를 다루는 글도 써보고 싶다. 세 만화 모두 대단히 재밌게 보았지만 셋 중 ‘올해의 범죄만화’를 꼽자면 역시 『고향 최고!』다. 무식하고 더럽지만 주먹 하나는 끝내주는 코하루가 굉장히 섹시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올해의 문제작은 『사랑스런 쿠니타마』다…… (말줄임표를 두 번이나 썼다.) 남자 주인공 마코토에게 사랑받고 또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인간 같은 표정을 지으며 얄궂고 잔망스러운 대사를 하는 고양이 쿠니타마에게 붙은 별명은 ‘표독타마’, ‘은교타마’다. SNS에서 무시무시할 정도로 바이럴이 되길래 소문을 듣고 기미해보았다.1 냐옹냐옹거리는 거 말곤 할 줄 아는 것도 없으면서 말만 맹랑하게 하는 고양이가 너무 하찮고 귀여워서 웃으며 보았는데, 사람들이 진심으로 쿠니타마를 경멸하고 있길래 조금 숙연해졌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까지 인간을 닮은 한 명의 고양이를, 고양이를 닮은 한 마리의 여인을 미워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쥐뿔도 없는 고양이가 난 너무 귀여운데 말이다… 그리고 얼마 뒤 악명(?)에 힘입어 정식 단행본으로 출간된 『사랑스런 쿠니타마』를 보면서 ‘퀸Queen니타마’의 승리를 느꼈다. 유명세, 아니 악명세를 제대로 치렀다. 이외에도 『로타 레인』, 『독스레드』, 『돈가스 DJ 아게타로』, 『망각 배터리』 등 재밌게 본 만화들이 많지만 지면의 한계상 짧게 제목만 언급한다. 매회 정해진 분량을 가뿐히 무시하고 있는 나를 배려해주시는 채널예스 담당자님께 감사를 전합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만화를 많이 봤고 또 매일 보고 있지만 세상에는 내가 안 본 만화가 훨씬 많으며 심지어 매일매일 새로운 만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일본에선 하루에 약 200권의 신간이 나온다고 한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우주 팽창설에 대해 들었을 때처럼, 혹은 인간이 아는 바다는 전체 바다의 5%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들었을 때처럼 도저히 내가 정복할 수 없는 만화라는 세상의 압도적 규모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아… 죽을 때까지 매일 만화를 봐도 나는 이 재미에 대해 5%도 모른다니… 작품이 하나의 별이라면 만화라는 우주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팽창하고 있고 만화가 바다라면 내가 본 것은 그것의 5%도 되지 않으며 95%는 영영 미지의 영역일 것이다. 내가 평생을 봐도 그 모든 별과 바다의 끝에 가볼 수는 없겠지. 그래도 밤하늘에 별은 늘 떠 있을 테고 바다는 비가 내려도 젖지 않고 태양이 이글거려도 마를 일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좀, 어이없는 말일 수도 있는데, 가슴이 뛴다. 나는 내가 아무리 봐도 다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세상이 있다는 것이… 너무 즐거운 것 같다. 그 세상 속에서 작년에도 올해도 그리고 내년에도 내가 할 일은 그저 그냥 그대로 만화를 보는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듯이, 파도가 치는 바다를 보듯이. 그렇게 만화를 보고 싶다.



1 주로 SNS에서 ‘시도해보았다’는 의미로 사용되며, 기미상궁에서 유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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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인

만화 편집자. 출판사 스위밍꿀에서 에세이 『펀치: 어떤 만화 편집자 이야기』(2024)를 냈다. 집 가서 만화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