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윤덕원, 서서히 느슨하지만 짓고 마는 사람
『열심히 대충 쓰는 사람』. 브로콜리너마저의 가사와 노래를 지은 윤덕원 작가의 책 제목은 마치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네요. 그런데 한 번 맛을 보면 빠지게 될 것입니다.
글: 박의령 사진: 표기식
2025.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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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 신조어에 빠져 있습니다. ‘HMH’, ‘GMG’. ‘하면 해’, ‘가면 가’의 영어 약자인데요. 하기 싫을 때(주로 일), 가기 싫을 때(주로 일) 에이치엠에이치, 쥐엠쥐라고 내뱉고 나면 뭔가 후련해지곤 합니다. 싫음을 넘어 어떤 일 앞에 나약해졌을 때 허세 짙은 단어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환기가 되더군요. 『열심히 대충 쓰는 사람』을 보면서도 비슷한 것을 느꼈습니다. 아니 어떻게 ‘열심히’와 ‘대충’이라는 낱말이 한 선상에 있을 수 있는 거지? 의구심이 들었다가 이어지는 역설에 설득당하고 공감을 느끼게 됩니다. 20년 동안 밴드 활동을 하면서 10년 넘도록 라디오를 진행하고 마감이라는 감옥에 갇혀 칼럼을 써온 윤덕원 작가의 꾸준한 짓는 마음. 성실함 속에 잔잔히 깔려 있는 엄격함을 들춰보는 시간이 내내 즐거웠습니다.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차이

 

오늘 인터뷰 전 질문지를 미리 전달해 달라는 요청 역시 책을 통해 읽은 ‘성실함’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번 보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더해 못 받아도 어쩔 수 없다는 느슨함은 있어요. 질문을 먼저 받고 나면 70% 정도는 생각을 해서 가죠. 완벽하게 준비해 깊은 인상을 주고자 하는 것보다 그래도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안 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더라고요.


직접 쓴 가사에 시인들이 꼽은 아름다운 노랫말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요. 오랫동안 쓰는 창작을 했는데 이제 첫 책이 나온 것이 신기하기도 하네요.

지금까지 출간 제안을 받아 미팅을 나눈 적도 몇 번 있는데 그때는 아직 내가 좀 부족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다고 지금 제가 쓰는 글의 내용이나 수준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이전부터 성의 있고 애정 어린 제안을 받았는데 타이밍인 것 같기도 하고요. <씨네21>과 <SBS뉴스> 디지털 콘텐츠를 통해 연재했던 칼럼 중에 쓰는 사람으로서 일관성이 있는 글들을 묶어보니 제가 쓰고 만드는 것 자체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더라고요. 사후적인 판단으로 만들어진 책이지만 이 책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게 됐어요.   

 

『열심히 대충 쓰는 사람』의 한 단어인 ‘대충’의 사전적 의미는 ‘대강을 추리는 정도’이지만 치밀하고 충실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해내었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창작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란 걸 깨닫게 된 순간이 있을 것 같아요. 얘기하신 것처럼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타이밍도 연관이 있을 것 같고요. 

책을 낸다는 결심을 할 때 써야 하는 능동적인 부분보다 책을 내는 행위 자체와 책을 내고 난 이후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에 대한 마음이 좀 더 컸던 것 같아요. 예전에는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이 아니라 음악하는 사람이 쓰는 글이니까 함량 미달이라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았거든요. 이제는 누군가를 실망시킬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였어요. 책을 몇천 권 세상에 내놓았는데 수명과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죠. 

 

음반도 마찬가지거든요. 브로콜리너마저 음반 중에 되게 잘 팔리는 음반도 있지만 오랫동안 재고를 소진하는 음반도 있어요. 그런데 10년 이상 20년 가까이 시간을 보내 보니 자신감이 떨어져 숨기고 싶은 작업물도 만든 것에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으로 계속 연주하고 CD도 전시하면서 시간을 갖고 내보이면 되더라고요. 책 재고가 생기면 공연이랑 북토크에서 계속 노출하면 될 거라는 생각을 가지니 마음이 한결 놓였던 것 같아요. 

 

추천사를 쓴 오은 시인은 단단한 친구, 음악가 요조는 무시무시하다고 작가님의 성실함을 표현합니다. 성실함의 척도를 어떤 하루를 보내냐로 가늠할 순 없지만 일과가 궁금해지는데요. 

저희 집은 아주 느슨합니다. 식구들이 출근하고 등교하는 시간에 맞춰 8시에 일어나요. 점심 먹고 출근해서 멤버들과 합주를 하거나 회의를 하고 퇴근. 저녁 시간에는 친구를 만나거나 운동을 하기도 하고요. 자기 전에 인터넷을 하거나 책을 좀 봐요. 이런 일상을 유지하는 시간은 참 평화롭지만 외부 일이 있거나 공연을 하면 하루를 다 쓰고 그걸 준비하는 시간들이 또 있죠. 바쁠 때는 도망가고 싶고 다 그만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동료 창작자들을 보면 잠시 멈추는 사람들도 있는데 저는 매일매일 하는 편이에요. 오은 시인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자주 나누는 사이이고 요조 작가님도 오랫동안 일을 지속해 오면서 겪는 어려움을 공감하기 때문에 추천사를 통해 존중과 격려를 보내준 거라 생각해요.

 

 


흐릿하지만 단단한 말들을 위해

 

짓는 것들에 대한 책입니다. 먼저 가사 이야기를 하자면 특유의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듯한 ‘요’ 어미가 바로 떠올라요. 

단언하는 게 어려웠어요. 그러다 보니 말투나 표현의 결 자체가 주저하거나 저어하는 어투가 많이 나왔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단단하고 힘 있는 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했거든요. ‘이 말은 부정할 수 없겠지’, ‘이 말은 네가 외면할 수 없겠지’ 하는 표현들이 조합되면서 특유의 결이 생기고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표현들은 오래 쓸 수가 있더라고요. 어떤 시기인지 드러나는 트렌디한 요소나 감성을 담고 있으면 시간이 흘러 민망하거나 어색한 부분이 생길 수도 있어요. 가사에 그런 부분이 적은 점이 오래 노래를 부르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일상에서 쓰던 말들이 노래로 들어가 특별해지는 순간이 가사의 묘미라고 생각하는 편인데요. 예를 들어 ‘윤슬’처럼 낯설었던 말이 갑자기 유행처럼 쓰여질 때 흥미가 떨어진다고 할까요. 그런 의미에서 ‘앵콜요청금지’에서 대번에 ‘안 돼요’가 나왔던 순간의 기분 좋은 충격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여러 아이디어와 문장을 썼다 지우고 덜어내면서 가사를 쓴다고 했을 때 끝까지 남는 것은 어떤 말들인가요?

오랜 시간 쓰면서 드는 생각은 가사를 좋은 질문이자 좋은 답으로 만들고 싶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말이 들어가는 이유가 명확해지는 것 같거든요. 청자들이 들었을 때 쉽거나 뻔하고 익숙한 말이어도 아마 질문이 좋았다면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좋은 답이 있다면 그 질문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실 테죠. 어떤 단어와 말을 써놓고 반문해 봐도 이 표현은 뭔가 마음에 다가오는 게 있으면 쓰게 돼요. 어떤 표현은 뒤집었을 때 얄팍하고 얕아지기도 해요. 그래서 더 일상적인 말들이 끝내 남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음악은 발매 후에 편곡을 바꾸거나 재녹음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가사를 바꾸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만큼 신중하게 쓸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지양하는 바도 확실할 테죠.

누구의 이야기인지를 탈색시키려고 해요. 말을 하거나 노래 부르는 사람이 어떤 프로필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만드는 내용은 거의 안 써요. 외적인 것을 탈색시킬수록 노래를 듣는 사람이 더 가까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20대부터 했어요. 저희 존재감이 좀 희미하다 보니 나의 이야기나 내 노래라는 걸 내세우지 않는 데 유리하기도 했고요.(웃음)

 

가장 최근 메모에 어떤 말을 남겼나요.

“언제까지나 노래할 수는 없다는 감각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다”. 음악이나 공연에 국한된 건 아니고 일하는 많은 분들이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구 구성이나 삶의 모습이 예전과는 달라진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 우리 세대와 조금 윗세대들이 겪는 상황을 노래로 풀어보고 싶어요.

 



한두 가지를 잘하는 전문 맛집 같은 노래 

 

대한민국의 2000년대를 아름답게 만들어준 명반 100 중에 하나라는 눈에 보이는 타이틀도 그렇지만 지금까지 보편적으로 회자되는 곡이 있다는 건 음악가로서 행복한 일일 것 같습니다.
 계속 새로운 것으로 건재함을 증명하는 이들도 있지만 저는 정원을 개척하기보다는 만들어 놓은 정원을 돌보고 가꾸는 것도 중요하다고 보는 사람이에요. 좋은 노래들을 가지고 계속 연주한다는 건 너무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면서 결국은 계속 다듬어 나가는 일이 숙제이기도 하죠. 그래서 노래들에 대할 때 약간 자식 같다는 생각을 해요. 내가 이 친구들의 탄생을 함께 했기 때문에 돌봐야 할 의무가 있는 동시에 온전히 내 마음대로 안 될 때도 있는. 그렇다고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나는 모르겠고 계속 만들래도 아닌 거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얼마 전 2집 <졸업>을 LP로 재발매했어요.  

활동 기간이 20년 가까이 되니 지금까지 나온 작업들 관리가 좀 어렵더라고요. 앨범들을 하나씩 LP화 하고 포맷을 정리해서 다시 재발매하거나 조금 더 오래 남는 방식으로 재정비를 하려는 중인데요. 예전과 똑같은 스펙을 재현하기에는 제조업 시장이 너무 많이 바뀌면서 어려워진 부분들이 있어요. <졸업>의 경우 주얼 케이스 위에 파란 동그라미를 따로 인쇄했는데 이번에는 LP로 제작했어요. 마치 전집처럼 통일성 있는 형태와 규격을 유지하고 싶다가도 새로운 작업물은 그에 맞게 이것저것 만들고 싶은 마음이 상충하고 있어요. 

 

동명의 곡 ‘열심히 대충 쓰는 사람’을 발표하면서 출판사 직원분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어요. 어떤 음악가에게도 드문 경험일 것 같은데요.

책을 만들기 위해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이 필요해요. 밴드 활동을 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팀워크인데 책에서도 팀워크를 북돋아서 만들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소박한 이벤트이기도 했고요. 출판사 회의실에서 두 번 만에 녹음을 마쳤어요. 목소리를 잘 내는 분,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분들의 서투른 부분까지 매력적이었죠. 브로콜리너마저 곡에도 떼창이 자주 쓰이는 편이라 이들을 우리의 동료로 포섭한 기분도 들고 좋았어요.

 

다음 앨범을 내라는 팬들의 촉구는 기쁨 반, 부담 반일 것 같아요. 작년에는 꽤 여러 앨범을 냈는데 올해 다음 앨범 계획이 있나요?  

전반적으로 음악 팬들은 새 앨범을 요구하시는데 저희는 그런 압박이 크게 없어요.(웃음) 제가 생각해도 브로콜리너마저는 되게 희한한 포지션에 있는 것 같아요. 생각보다 더 많은 분들이 저희 음악을 듣고 어떤 시기를 의미 있게 기억해 주시고, ‘계속 아직도 하고 있네’라고 봐주시거든요. 뜨거운 열정을 갖고 응원하는 팬덤들도 많은데 잔잔하고 은은한 사랑을 폭넓게 받고 있어요. 그래서 천천히 갈 수 있는 것 같고. 사실은 올 하반기에 싱글을 낼까 했었는데 너무 바빠서 내년에 정규 앨범을 내자고는 얘기하고 있어요. 뭐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내년에는 냅니다.

 



선명하게 지워지기

 

실물 음반보다 스트리밍이 익숙하고 누구든 집에서 음악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DIY 제작 시대이기도 해요. 음악 산업이 변해가는 와중에 향수를 찾는 사람들도 늘어나는 혼재된 신에서 변하지 않는 ‘짓는 마음’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2010년대 중반에 음악적 환경이 바뀌면서 지속적으로 디지털 싱글을 내면서 활동을 해야 된다, 음반의 시대는 완전히 갔다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새 곡을 내는 월간 프로젝트가 유행하기도 했고요. 저도 2-3개월에 한 번씩 곡을 선보이는 시도를 해봤는데 어느 순간 계속 이렇게 많은 것들을 쏟아내는 게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한 곡 한 곡 충분히 귀로 읽는 시간이 적어지는 거잖아요. 잦은 시도를 하면 홍보가 되고 히트곡이 나올 수도 있지만 음식점으로 따지면 새로운 메뉴가 아니더라도 한 메뉴를 성실하고 안정적으로 내놓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제 저는 창작자로서 후반부를 살고 있어요. 오래 남았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을 만들고 싶고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깔끔하게 잊혀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요. 수명을 다하고 잘 정리되고 싶어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는 표현이 있잖아요. 저는 거절할 수 있는 제안, 거절을 잘할 수 있는 제안을 하고 싶어요. 산뜻하고 깔끔한 마음이요.  

 

밴드도 거의 20년, 라디오도 10년 이상 진행해 온 끈기가 있는 반면 바로 포기했던 일들도 있었을 텐데요. 

한번 시작하면 포기하거나 그만두는 편은 아니에요. 대신 시작하기 전에 엄청난 숙고를 해요.(웃음)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한 달 만에 그만둔 적이 있어요. 바쁜데 시간을 내서 가도 실력이 안 늘더라고요. 구청에서 하는 강의라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스케줄 때문에 자주 못 가게 되면서 결국 포기했어요.   

 

밴드 티셔츠를 즐겨 입어요. 브로콜리너마저의 티셔츠를 자주 만들기도 했고요. 이번에 책을 만든 기념으로 낸 티셔츠 외에 앞으로 새로 만들 티셔츠에는 어떤 문구를 넣고 싶은가요. 

밴드 티셔츠 입는 사람으로는 주변에서 확실히 1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만들고 친구들이 만드니까 자연스럽게 자주 입게 되죠. 결국 가사인 거 같아요. 공연 제목 같은 것도 전부 가사에서 오거든요. 일종의 씨간장 같은 거죠.(웃음) 단순하지만 리듬감 있고 스스로에게나 보는 사람들에게나 용기를 줄 수 있는 말을 넣고 싶어요. 

 

지금까지 긴 시간 그리고 앞으로 남은 시간을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 중요한 사람인 것 같아요. 

스스로에게 질문을 많이 해요. 역지사지 질문들을 하면서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 보는 거죠. 부끄럽지 않게 뭘 하고 싶다는 것은 결국은 자유롭고 싶다는 말과 가까운 것 같아요. 내 자유를 얘기하면서 상대방을 침범하는 것에 무감각한 경우가 많잖아요. 그러고 싶지 않아서 노력하면서 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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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의령

여러 패션 매거진의 피처 디렉터로 일하다 지금은 자유롭게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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