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문학총서] ‘열대 고딕’이라는 장르를 만들어 낸, 닉 호아킨의 『열대 고딕 이야기』
닉 호아킨의 단편과 희곡을 담은 『열대 고딕 이야기』, 서구 고딕과는 또 다른 ‘열대 고딕’ 장르만의 강렬한 작품 세계.
글 : 고유경
2025.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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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세예스24문화재단 동남아시아문학총서

필리핀을 대표하는 근현대문학 3권이 올해 초 한세예스24문화재단의 동남아시아문학총서를 통해 국내에 소개되었다. 이에 필리핀을 대표하는 국민 작가 닉 호아킨의 초기 대표작을 묶은 『배꼽 두 개인 여자』, 호아킨의 희곡과 단편을 담은 『열대 고딕 이야기』, 촉망받는 필리핀의 젊은 작가 미카 드 리언의 『러브 온 더 세컨드 리드』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필리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닉 호아킨의 단편집 『열대 고딕 이야기』는 필리핀의 식민지 역사, 사회 구조, 종교, 인간 내면의 갈등을 초현실적이고 상징적인 이야기들 속에 절묘하게 녹여낸 걸작이다. 닉 호아킨은 고딕 문학의 음울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필리핀의 뜨겁고 혼란스러운 열대적 정서와 융합한 총 네 편의 단편을 통해 예술가의 고뇌, 여성의 자아 찾기, 인간과 신 사이의 경계, 가족과 사회의 갈등 등 다양한 주제를 섬세하고 밀도 있게 다루며 깊은 감동과 철학적 사유를 선사한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 몽롱한 그림처럼 다가오는 『열대 고딕 이야기』는 역사와 문학,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장르적 실험이자, 필리핀의 정체성을 탐색하는 문학적 여정이다.

『열대 고딕 이야기』에 수록된 각 단편을 간단히 소개해 주세요.

『열대 고딕 이야기』는 고딕 문학의 상징성과 필리핀의 열대적 현실을 결합해, 익숙하면서도 낯선 서사적 풍경을 그리고 있어요. 각 단편은 ‘열대 고딕’이라는 장르적 틀 안에서 식민지의 잔재, 가부장적 질서, 사회 구조의 억압, 그리고 개인의 정체성과 내면의 욕망을 섬세하게 탐구하지요. 「필리핀 예술가의 초상」은 예술의 자율성과 국가적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들을 통해 필리핀 근대 사회의 민감한 문화적 균열을 포착해요. 「제로니마 부인」은 종교적 권위에 맞서는 여성의 내적 각성 과정을 통해 여성의 자아와 욕망, 권력 사이의 긴장을 예민하게 조율하고, 「멜기세덱의 반차」는 필리핀의 가톨릭 전통과 토착 신앙이 뒤섞인 신비로운 종교 집단의 이야기를 통해 필리핀의 종교와 문화, 역사적 혼종의 위기를 날카롭게 조명하지요. 「칸디도의 종말」은 도덕과 욕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본질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이상과 현실, 가족과 사회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인간 내면의 복잡성과 윤리적 갈등을 드러내요. 어쩌면 닉 호아킨은 작품 속 인물들을 통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문학이 인간에게 던질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 즉 우리는 누구이고, 무엇을 두려워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현실과 환상의 교차하는 닉 호아킨의 독특한 서사 구조는 각 단편에서 어떻게 묘사되고 있나요?

닉 호아킨은 현실과 환상이 맞물리는 독창적인 서사 방식으로 필리핀 사회의 억눌린 감정과 집단 기억, 그리고 정체성의 균열을 끊임없이 파헤쳐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풍경 속에 환상적인 장면과 상징을 슬그머니 녹여 넣으며 일상적인 현실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지요. 「필리핀 예술가의 초상」에서는 현실 속 생계 문제와 자화상이라는 환상적 가치가 부딪치며 예술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제로니마 부인」에서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종교의 권위라는 현실의 억압 속에서 환상처럼 솟아오르는 자아의 목소리를 통해 정체성의 재탄생을 깊이 있게 전달해요. 「멜기세덱의 반차」는 가족 내 문제, 종교 집단이라는 현실적 배경 위에 불가사의한 사건, 예언자와의 만남 같은 환상적 요소들이 침투하면서 그 경계가 구분되지 않는 흐릿함으로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과 믿음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하지요. 「칸디도의 종말」에서는 가족과 사회 속에서의 도덕적 갈등이 인물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상징적 장면과 심리적 환영에 갇히며 현실적 선택이 환상처럼 왜곡되고, 욕망이 현실을 잠식하는 형식으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져요. 이러한 서사적 장치는 현실의 틀을 흔들고, 환상을 통해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며, 필리핀이라는 공간에서 형성된 내면의 풍경과 존재의 불안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고 생각해요.

 

「필리핀 예술가의 초상」은 “필리핀 국민 희곡”이라 불릴 만큼 오랜 시간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이 작품이 독자와 관객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요?

「필리핀 예술가의 초상」은 문학적 완성도를 뛰어넘어 필리핀 사회의 정체성과 예술의 본질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힘이 있다고 할까요? 자화상을 둘러싼 갈등은 예술의 순수성과 자본주의적 현실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요. 로렌조는 그림을 팔지 않음으로써 예술가의 자존심을 지키려 하고, 딸들은 생존을 위해 그림을 지키려 하지요. 이러한 갈등은 예술이 단순한 상품이 아닌, 기억과 정체성의 상징임을 나타내요. 또한 마닐라의 낡은 저택은 필리핀의 과거와 문화적 유산을 상징하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가족의 갈등은 사회 구조와 세대 간의 가치 충돌을 압축적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예술과 가족의 유산을 지키려는 로렌조의 딸 칸디다와 파울라의 주체적 서사도 침묵을 강요하던 사회 구조에 균열을 만들며 여성의 존재와 목소리를 강렬하게 표현해요. 잊힌 기억과 무너지는 공간 속에서도 예술이 지켜야 할 존엄과 인간의 자존을 되묻는 이 작품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로니마 부인」은 필리핀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돈 카를로스 팔랑카 상을 받은 걸작으로 평가받는데요, 이 작품이 지닌 어떤 문학적 힘이 그처럼 높은 평가를 끌어냈을까요?

닉 호아킨은 이 작품을 통해 개인의 선택과 존재 방식이 어떻게 권력과 역사, 공간에 저항할 수 있는지 고민했던 것 같아요. 주인공 제로니마는 자신을 버리고 권력자가 된 대주교 앞에서 침묵으로 순응하거나 복수로 응답하지 않지요. 권력자의 회한이나 사죄를 바라지 않은 채, 스스로 강가의 동굴을 선택해 자주적인 삶을 이어가요. 이 선택은 단순한 은둔이 아니라 제도와 권위의 질서 바깥에서 자기 삶을 다시 쓰려는 주체적 여성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생각해요. 오늘날 소외된 목소리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방식과도 맞닿아 있지요. 또한 강과 동굴은 제로니마의 개인적 서사뿐만 아니라 필리핀의 역사적 상처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장소로, 식민주의의 침범을 거부하며 토착 문화의 마지막 보루로 기능하지요. 자연 속으로 스며드는 제로니마의 삶은 식민 권력에 종속되지 않고, 필리핀 고유의 정체성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로니마 부인」은 과거의 이야기지만, 오늘의 언어로도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에요. 기억을 복원하고, 권력에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제로니마의 이야기는 지금도 많은 이에게 자기 삶을 다시 써 내려갈 용기를 건네리라 믿습니다.



닉 호아킨은 여러 작품에서 종교적 요소를 활용하지만, 「멜기세덱의 반차」에서는 그 자체가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어떤 철학적 또는 사회적 통찰을 전달하고 싶었을까요?

「멜기세덱의 반차」에서 종교는 단지 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사회적 권력의 상징이며, 개인의 기억과 정체성을 조작하는 장치로 기능해요. 닉 호아킨은 이를 통해 종교적 제도가 인간의 내면과 공동체 구조를 어떻게 형성하고 왜곡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지요. 작품의 중심에 있는 비밀스러운 종교 집단은 성경적 상징을 빌리면서도 필리핀의 토착 신앙과 현대 대중문화를 혼합한 독특한 공동체로 묘사돼요. 비틀스 노래, 퍼포먼스, 환영 등을 종교 의례로 사용하는 이 집단은 전통적인 가톨릭 질서에 도전하며 종교가 어떻게 감각적 자극으로 전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요. 진심이 아닌 보여주기식으로 소비되는 신앙의 모습을 문학적으로 풍자하는 대목이 아닐까 해요. 또한 주인공 시드는 종교 집단의 세계에 휘말리며 점차 자신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되돌아보는 혼란을 경험해요. 개인의 역사를 지우고 새로운 정체성을 주입하는 이단적 종교 집단은 필리핀이 식민 역사를 어떻게 망각하고 재해석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은유라고 할 수 있지요. 한 마디로 멜기세덱의 질서는 필리핀의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갈등을 반영한 복합적 상징체예요. 닉 호아킨은 종교가 구원과 믿음의 공간이 아니라 기억을 재구성하고, 정체성을 조작하고, 윤리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제도적 구조임을 성찰하며 종교를 통해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함께 고민하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칸디도의 종말」은 자아가 분리된 십 대 청소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요, 이를 통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칸디도의 종말」은 필리핀 사회의 위선과 개인의 내면을 거침없이 탐색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주인공 바비는 세상의 허위와 가식에 점점 환멸을 느끼며 사람들의 본질을 X레이처럼 꿰뚫어 보고, 그의 내면에서 분리된 자아 칸디도와 함께 현실을 바라보며 주변 인물이 해골처럼 보이는 환영에 시달려요. 닉 호아킨은 바비가 경험하는 이중적 자아와 시각적 환영을 통해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긴장 속에서 인간 존재와 사회를 되묻고, 필리핀 사회의 문화 혼종성과 정체성의 위기를 드러내지요. 또한, 십 대 주인공의 정체성 형성과 자아 탐색의 불안함을 보여주며 단순한 청소년기의 혼란이 아니라, 역사적 망각과 문화적 위선 속에서 자아를 잃어버린 필리핀의 모습을 되돌아봐요. 이야기 마지막에 바비는 자신의 정체성과 세상에 대한 인식을 재정비하며 칸디도와 분리되지만, 칸디도는 사회의 이중성과 인간의 본질에 의문을 품으며 여전히 도시를 떠돌 것이라는 여운을 남기지요. 이는 정체성의 분열이 끝난 게 아니라 계속되는 역사적 과제로 남아 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어요.

 

한국 독자의 시각에서 봤을 때, 『열대 고딕 이야기』의 공감 포인트는 무엇이 있을까요?

필리핀과 한국은 모두 식민 지배의 역사를 겪었고, 그로 인한 문화적 혼란과 자아 정립의 갈등은 두 사회 모두에서 깊이 새겨져 있지요. 그래서 작품 속 인물들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선택의 고통은 한국 독자에게도 낯설지 않은 감정일 것입니다. 더불어 이야기 속 갈등은 종종 가족 내 가치관의 충돌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유교적 가족 중심 사회인 한국에서도 자주 목격되는 문제이다 보니 가슴 뭉클한 공감을 끌어내지 않을까 해요. 특히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개인의 해방과 여성의 자아 탐색을 섬세하게 그려낸 「칸디도의 종말」이나 「제로니마 부인」은 한국의 현대 가정이나 수많은 여성 서사와 정서적으로 밀착해 있어 더욱 깊은 울림을 남길 것 같아요. 이 책을 읽다 보면 익숙함 속의 낯섦, 낯섦 속의 익숙함이 교차한다고 할까요? 우리에게는 무척 생소한 필리핀 문학이고 타국의 과거사를 다룬 이야기지만, 그 속에 담긴 인간의 갈등과 감정은 우리와 다르지 않아요. 낯선 배경이지만 익숙한 고뇌, 이국적인 서술이지만 보편적인 질문이 우리를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이죠. 필리핀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는 한국이라는 나라, 그리고 우리 자신의 내면을 다시 바라볼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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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 고딕 이야기

<닉 호아킨> 저/<고유경>,<배효진>,<백지선> 역

출판사 | 한세예스24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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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경

영국 카디프 대학교 저널리즘 스쿨에서 언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오롯이 내게 물들 수 있는 ‘몰입의 즐거움’을 찾아 번역가의 길을 걷게 되었고, 글밥 아카데미 출판번역과정을 수료하고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배꼽 두 개인 여자』와 『열대 고딕 이야기』를 공역했으며, 『나이트비치』,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등의 영미 소설과 『수학의 아름다움이 서사가 된다면』, 『수학은 어떻게 문명을 만들었는가』, 『숫자없는 수학책』 등 다수의 수학 교양서를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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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호아킨

1917년 5월 4일 필리핀 마닐라의 부촌 파코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니코메데스 호아킨 이 마르케즈(Nicomedes Joaquin y Marquez)다. 일찌감치 문학적 재능을 보였던 호아킨은 14세에 학교를 자퇴하고 17세부터 단편 소설, 에세이, 시 등을 발표하며 문학가로서 명성을 쌓아갔다. 20대에 이미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그는 1950년대부터 언론인으로도 일했다. 1940년대부터 1960년대 중반, 즉 20~40대에 발표한 작품들로 호아킨은 ‘이야기꾼으로서 정점에 이르렀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필리핀 사회와 역사, 문화, 정체성을 초현실적으로 그려낸 자신의 문학 세계를 호아킨은 ‘열대 고딕’이라는 용어를 직접 만들어 칭했다. 대표작〈배꼽 두 개인 여자〉는 1957년 하퍼출판사의 지원을 받아 집필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호아킨은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또한 1965, 2017년 영화화된 〈필리핀 예술가의 초상〉을 비롯하여 호아킨의 여러 작품이 현재까지도 꾸준히 연극과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 호아킨은 평생 수많은 상을 거머쥐었다. 필리핀 대표 소설상인 해리스톤힐상을 제정 첫해인 1961년에 받았고, ‘필리핀의 퓰리처상’이라 불리는 돈 카를로스 팔랑카 기념 문학상을 세 차례 받았을 뿐 아니라, 1976년‘필리핀 국민 예술가’로 선정되는 영예를 얻었다. 1996년에는 ‘작가로서 60년 동안 필리핀인의 몸과 영혼의 신비를 탐구한 공로’로 라몬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다. 2004년 4월 29일, 호아킨은 86세의 나이로 메트로 마닐라 산후안에 있는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