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세예스24문화재단 동남아시아문학총서
필리핀을 대표하는 근현대문학 3권이 올해 초 한세예스24문화재단의 동남아시아문학총서를 통해 국내에 소개되었다. 이에 필리핀을 대표하는 국민 작가 닉 호아킨의 초기 대표작을 묶은 『배꼽 두 개인 여자』, 호아킨의 희곡과 단편을 담은 『열대 고딕 이야기』, 촉망받는 필리핀의 젊은 작가 미카 드 리언의 『러브 온 더 세컨드 리드』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배꼽 두 개인 여자』는 필리핀 문학의 거장 닉 호아킨의 대표 단편들을 엮은 소설집으로, 과거 식민지 시대의 상처, 종교와 욕망의 충돌, 그리고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방황하는 개인의 내면적 분열을 섬세하고 강렬한 문체로 그려낸다. 총 일곱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었고, 각 작품은 식민지 시대부터 독립 이후까지 필리핀 사회의 다양한 단면을 보여준다. 각기 다른 인물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 갈등과 감정, 존재의 본질에 관한 질문을 깊이 탐구하는 『배꼽 두 개인 여자』에 관해 고유경 번역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필리핀에는 닉 호아킨이라는 장르가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요, 작품 전반에 흐르는 닉 호아킨만의 독특한 문학적 특징이 있을까요?
닉 호아킨의 문장은 ‘열대 고딕’이라는 장르에 걸맞게 몽환적이고 시적이며, 때로는 신화와 역사, 현실이 한데 뒤섞인 신비로운 분위기가 있어요. 어두운 분위기, 초현실적 설정, 종교적 상징, 억압된 욕망 등이 열대 특유의 감각과 어우러져 서구 고딕과는 다른 독특한 매력을 드러내고 있지요. 또한 정체성과 분열의 서사를 통해 전통적 신념과 현대적 가치의 충돌을 솔직하게 풀어낼 뿐만 아니라 가톨릭 신앙과 토착 신앙, 서구적 가치와 필리핀 전통이 혼재된 세계관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어요.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시간의 중첩을 통해 필리핀의 역사적 단절과 연속성을 동시에 보여주기도 하지요. ‘호아키네스크’라 불리는 상징과 은유가 풍부한 서술, 느릿하면서도 장중한 문체 역시 단순한 묘사를 넘어 하나의 정서적 공간을 만들어 냅니다.
단편 「배꼽 두 개인 여자」는 기묘한 제목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이 작품에서 배꼽이 상징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요?
배꼽은 생물학적으로 출생과 모체의 연결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그 단절의 흔적이기도 해요. 한 개의 배꼽이 하나의 시작, 하나의 정체성을 의미한다면, 두 개의 배꼽은 두 개의 출발점, 즉 분열된 자아와 이중적 정체성을 암시하고 있지요. 이는 필리핀이라는 나라가 겪은 스페인 및 미국 식민지 시대, 그리고 원주민 정체성 사이의 분열을 나타내기도 하죠. 역사적, 문화적 이중성을 상징하는 ‘두 개의 배꼽’은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은유로 읽혀야 한다고 생각해요.
「배꼽 두 개인 여자」 외의 작품들에서는 이중성과 자아 분열이라는 모티프가 어떤 방식으로 그려지고 있나요?
「하지」에서는 종교적 질서와 억눌린 욕망, 전통적 가치와 근대적 자아의 갈등으로, 삼대에서는 세대 간의 가치관 충돌로 나타나지요. 각 작품 속 인물들은 결코 단일한 정체성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식민 지배의 잔흔, 종교적 권위의 그림자, 전통과 근대의 대립 속에서 끊임없이 분열된 자아를 마주해요. 그리고 그 내면의 균열은 필리핀이라는 공동체가 겪어온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의 파편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지요.
단편집을 면면히 살펴보면 종교적 요소가 두루 등장하는데, 이러한 요소가 각 작품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요?
닉 호아킨의 작품에서 종교적 요소는 단순한 배경인 아니라 정체성과 권력, 죄의식, 구원 등 핵심 주제를 이끄는 매우 상징적이고 구조적인 장치예요. 필리핀은 식민 지배를 통해 가톨릭이 뿌리내린 나라지만, 그 이전에는 토속 신앙 및 민속 전통이 존재했었지요. 호아킨은 금욕과 욕망을 다룬 「하지」를 통해 두 신앙 세계의 혼합과 충돌이 낳은 문화적 혼종성과 정체성의 분열을 드러내고, 「성 실베스테르의 미사」에서는 정치적 음모와 결탁한 종교의식을 묘사하며 종교가 도덕적 권위가 아닌 지배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해요. 또한 「죽어가는 탕아의 전설」에서는 구원과 회개를 상징하는 종교가 심판의 도구가 되어 진짜 구원은 자기 내면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하지요. 「메이데이 전야」에서는 종교적 요소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가톨릭 사회에서의 성과 사랑에 대한 금기를 반영하고, 인물들의 행동과 감정을 지배하는 무언의 권위로 존재해요. 요약하자면 이 단편집에서 종교는 억압과 해방, 죄와 구원, 권력과 저항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 심층적 장치이고, 닉 호아킨은 이를 통해 필리핀 사회의 내면을 해부하고, 정체성과 역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도 특별해 보여요. 닉 호아킨은 여성 인물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작품 속 여성 인물들은 단순한 주변 인물이 아니라 필리핀 사회의 역사와 문화, 정체성을 드러내는 핵심 존재로 등장해요. 시대적 억압과 개인적 갈등을 극복하려는 저항의 주체이자 전통과 치유의 매개체로 기능하지요. 「배꼽 두 개인 여자」의 코니는 분열되고도 치유되지 않은 역사적 상흔과 심리적 불안을 자기 몸을 통해 폭로하고, 「하지」의 루펑은 얼핏 조용하고 순응적인 여성처럼 보이지만 남편의 전통적 가치관에 대립하며 가부장적 사고에 복종하지 않는 현대 여성의 자의식을 드러내요. 「메이데이 전야」의 아게다는 전통적인 여성상과는 달리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강하고 독립적으로 표현하며 식민지 시대 여성의 억압된 목소리를 대변하지요. 물론 사랑에 대한 낭만적 열망이 현실의 가부장제에 무너지는 아픔을 겪으며 냉소적인 노년을 맞이하지만요. 「의장대」의 나탈리아 고도이는 자신의 감정과 가족의 기대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단순히 누군가의 연인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책임지는 인물로 그려져요. 나탈리아의 결정은 필리핀 사회에서 여성이 점차 자율성과 주체성을 획득해 가는 과정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지요. 운명에 순응하는 또 다른 여성 조시와의 대비를 통해 운명의 굴레 속에서도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주체로서의 여성상을 부각하고 있어요. 닉 호아킨은 작품 속 여성 인물들을 모성의 상징, 순종적인 딸, 열정적인 반항자, 신비로운 중재자 등 다양한 원형으로 구현하며 필리핀 사회가 내포한 성 역할의 고정관념과 문화적 가치관을 섬세하게 고찰합니다.
이번 단편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무엇인가요?
이 단편집의 대표 제목처럼 「배꼽 두 개인 여자」가 가장 인상 깊었어요. 필리핀의 분열된 문화 정체성을 두 개의 배꼽으로 설정했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고 기발한 은유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스페인과 미국의 지배라는 역사적 트라우마가 현실을 외면하고 배꼽이 두 개라는 환상에 갇힌 코니의 정신적 혼란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는 점이 깊은 울림을 남겼어요. 어머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딸의 거짓말이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모녀 관계의 긴장감이 현실적으로 와닿기도 해서 저도 모르게 공감하게 되었지요. 닉 호아킨의 문장 하나하나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고 할까요? 그래서 더욱 몰입하게 하는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번역한 「의장대」도 여운이 많이 남는 작품이에요. 거울이라는 장치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두 세대의 서사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거든요. ‘환상 특급’ 같은 한 편의 기묘한 이야기를 보는 듯한 느낌에 번역 작업도 수월했던 기억이 나요.
마지막으로 닉 호아킨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단편집 『배꼽 두 개인 여자』의 매력을 말씀해 주신다면?
필리핀 문학 작품과 닉 호아킨이라는 작가가 무척 생소하지만, 단순한 지역 문학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인간의 내면 탐구와 역사적 성찰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깊은 공감과 울림을 남긴다고 말하고 싶어요. 작품 속 인물들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흔들리며, 환상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 하고, 현실과 마주할 용기를 갖기 위해 고군분투하지요. 이러한 서사가 스스로의 삶과 기억을 되돌아보게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 같거든요. ‘두 개의 배꼽’ 또는 ‘거울’이라는 닉 호아킨만의 독특한 설정은 우리가 사회나 역사, 가족 안에서 어떻게 정체성을 잃고 또 회복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니까요. 이 단편집을 읽는다는 건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또 하나의 거울을 손에 쥐는 일이라 생각해요. 가볍게 읽을 수는 없지만, 한 번 빠져들면 오래도록 그 아련한 잔향이 따라다니리라 믿습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배꼽 두 개인 여자
출판사 | 한세예스24문화재단

고유경
영국 카디프 대학교 저널리즘 스쿨에서 언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오롯이 내게 물들 수 있는 ‘몰입의 즐거움’을 찾아 번역가의 길을 걷게 되었고, 글밥 아카데미 출판번역과정을 수료하고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배꼽 두 개인 여자』와 『열대 고딕 이야기』를 공역했으며, 『나이트비치』,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등의 영미 소설과 『수학의 아름다움이 서사가 된다면』, 『수학은 어떻게 문명을 만들었는가』, 『숫자없는 수학책』 등 다수의 수학 교양서를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