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시를 고치지 않는다. 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빨리 다음 시를 쓰거나, 같은 소재로 완전히 새로 쓴다. 그것이 내 방식이다. 퇴고를 지양하기. 내가 진행하는 시 창작 수업의 느슨한 규칙이다.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강력히 권장한다.
당신이 <김승일의 시 수업> 연재를 몇 편 읽어봤다면 아마 눈치채셨을 것이다. 나는 쓰기 싫은 상태에서 업무의 일환처럼 시를 쓰는 일을 극도로 경계한다. 그런데 퇴고는 너무나도 쉽게 하기 싫은 일이 되어버리곤 한다. 시는 한두 시간 안에 썼으면서, 퇴고는 밤을 새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밤새 고치고 있으면, 자신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시를 고치고 있는지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다. 그 시를 떠나야 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만 더 고치면 기적처럼 마음에 들 것 같다. 어디를 더 고쳐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되면 그건 더는 시 쓰기가 아니라 기도에 가깝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김승일은 아니니까……. 정 퇴고를 하고 싶거나 해야만 한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서도 다뤄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직접 내가 내 시를 퇴고하는 퍼포먼스 수업을 만들었다. 나는 이 수업에서 2012년에 나온 내 첫 시집 『에듀케이션』을 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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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이 여러분 앞에서 퇴고함
시를 고치기 전에 친구에게 보여준 적이 있으신가요? 친구의 피드백을 반영하여 퇴고를 하고 나서 다시 보여준 적 있으신가요? 아마 당신의 친구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음, 좋아졌는데, 처음이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해…….”
저는 퇴고를 하지 않습니다. 처음 시인으로 데뷔했을 때는 퇴고를 많이 했어요. 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계속 고쳤어요. 좋아질 때까지 계속 고치면 사람들이 제 시를 좋아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운이 좋게도 그게 잘 통했습니다. 며칠 밤을 꼬박 24시간 카페에 앉아서 계속 다듬고, 넣고, 뺐습니다. 기도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좋아져라, 좋아져라, 좋아해라……. 그런데 언젠가부터는 아무리 퇴고를 해도 만족스럽지 않더군요. 퇴고를 하면 할수록 제 시의 개성이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제 집착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퇴고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쓰기 전에 더 철저히 준비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엽적인 부분을 고치는 대신, 완전히 지워버리고 처음부터 새로 씁니다.
그러나 저라고 퇴고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쓴 지 아주 오래된 시를 퇴고하기도 하고, 비교적 최근에 쓴 시를 건드리기도 하고, 원고 마감일이 가까워서 새로 쓸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을 때는 피치 못 하게 퇴고를 하곤 합니다.
여러분이 자기가 쓴 시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끔은 집착하고, 어떻게든 구하고 싶어 하는지는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서 이번 수업에서는 여러분 앞에서 직접 제가 과거에 쓴 시들과 최근에 쓴 시들을 퇴고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몇 편의 시를 쓸 것이고, 과거에 쓴 시도 가지고 올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수업은 어떻게 합평해야 하고, 어떻게 퇴고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수업입니다. 합평과 퇴고는 시 내부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시 밖에서 쓰고 있는 시인을 바꾸는 과정입니다.
- 2023년 1월 6일에서 3월 3일까지 진행했던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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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평은 여러 사람이 한 편의 시를 읽고 비평하며 의견을 나누는 과정이다. 많은 경우 퇴고는 합평에서부터 시작되곤 한다. 모든 합평에는 암과 명이 공존한다. 사람들이 내 시에 대해서 평가를 내린다. 어느 부분이 좋으니까 그 부분을 좀 더 강조하면 좋겠다고 한다. 어느 부분이 쓸모가 없으니까 지우면 어떻겠느냐고 한다. 어떤 사람은 다짜고짜 그냥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인신공격이 일어나기도 한다.
물론 합평은 굉장히 중요하다. 남의 시를 훌륭히 해석하는 사람만이 자기가 쓴 시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다. 내가 내 시를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면, 시인은 독자에게 자기가 쓴 시의 가치를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비평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쓴 비평을 많이 읽어야 한다.
하지만 누가 좋다고 한 부분을 더 재밌게 만들고, 누가 별로라고 한 부분을 지운다고 시가 좋아지지는 않는다. 이유는 시가 역설이기 때문이다. 예술로서의 시는 사실상 말이 되지 않는 말, 모순으로 가득 찬 말, 고장 난 말을 자처하여 역설로서의 위상을 가진다. 시가 진리를 담보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시가 논리적인 동시에 전혀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해석할 수 없는 말을 쓰라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라는 뜻도 아니다. 분명히 각 행은 논리적이고 맞는 말인데, 이상하게 행과 행이 만나면, 연과 연이 만나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시를 읽고 해석하는 도중에, 결코 해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면했을 때의 당혹감. 그것이 시 읽기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다. 시는 역설이다.
그러나 친구들의 합평 코멘트는 대부분 역설을 제거하거나 설명하라는 요청이다. 그 부분이 좋으니까 더 친절하게 풀어서 전달해 줘. 말이 되지 않잖아? 걸리적거리니까 지워줘. 독자의 요청을 모두 들어주면 역설은 사라지고 만다. 역설은 친절할 필요가 없다. 역설은 말이 되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시인들은 시에 갑자기 사족(TMI)을 달기도 하는데, 수준 미달의 합평을 거친다면 그런 말들은 모두 제거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합평회에 시를 가져온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시를 쓴 사람도 이미 알고 있다. 사족처럼 보일 것을 아는데도 그 부분을 지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나 그 말을 넣고 싶었으면 보기 흉한데도 거기 그대로 남겨두었을까? 어쩌면 다른 멋들어진 문장보다도, 그 지루한 부분이 시인이 가장 쓰고 싶었던 부분일 수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 바로 그 덜 떨어진 문장이 우리가 쓴 시를 역설로 만든다.
쓴 지 오래된 시의 퇴고는 시에 내재된 역설을 제거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통해서만 정당화된다. 실제로 나는 <김승일이 여러분 앞에서 퇴고함>을 진행하면서, 과거의 내 사유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 한 부분만 잘못 건드려도 더는 역설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나는 시에 새로운 맥락을 추가했다. 발굴된 유물에, 현재의 내가 각주를 다는 일. 10년 전과 같은 관점을 유지하지 않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원본에 이질적인 새로운 형식의 연과 행을 추가하는 일. 그게 내가 오래된 시를 퇴고하는 방식이다.
나는 시를 쓴 사람이 주도하는 합평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나는 일단 시를 쓴 사람이 잘됐다고 생각하는 부분, 아쉽다고 생각되는 부분, 의도했던 것 등을 미리 다 설명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면 친구들이나 강사가 돕기 더 수월해진다. 합평의 궁극적 목적은 문장 단위의 수정을 요청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형식의 문제, 즉 화자 선택에 관한 논의이거나 운용 방식에 대한 제안이 되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최근에 쓴 시를 퇴고하고자 한다면, 세부적으로 문장을 수정하고자 한다고 해도, 말했듯이 일단 즐거워야 한다.
하지만 이미 한 번 결정된 사항들을 찔끔찔끔 바꿔보는 것으로는 즐거울 수 없을 것이다. 퇴고를 할 때에는 언제나 자기가 쓴 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나 해석을 지니고 접근해야 한다.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면 그 말을 찾느라 스스로를 고문하게 된다. 결국 그 말을 못 찾게 될 수도 있다. 어쩌면 그런 말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새로운 문법으로, 방식으로 다시 말해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접근한다면, 아까 썼던 문장을 다시 쓸 때도 어쩐지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기억하라. 우리는 언제나 밟아보지 않은 땅을 밟을 때만 모험가가 된다. 오직 모험가만이 세계에 직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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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케이션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김승일
2009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데뷔. 시집으로 『에듀케이션』, 『여기까지 인용하세요』, 『항상 조금 추운 극장』, 산문집으로 『지옥보다 더 아래』가 있다. 2016년 현대시학 작품상. 2024년 박인환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