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포X이희주] 완전한 여자
『돈 덴』 주위를 느슨하게 걸으며, 만리포 작가와 이희주 작가가 사랑과 여자에 관한 에세이를 교환합니다.
글 : 이희주
2025.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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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덴』을 읽고 꿈을 꿨다. 조용한 도서관이었다. 출구를 찾다가 밟아선 안 될 곳을 밟아서 보안요원에게 머리를 맞았다. 때리고 나서 태연하게 밟으시면 안 돼요, 라고 하길래 외쳤다. 저 때렸어요? 지금? 왜 때려요? 지금 때렸잖아요! 경찰 부르겠습니다. 지금 저기 씨씨티비 있으니까. 경찰한테 가죠. 라고 한 뒤 이건 내가 겪은 일이고 내가 할 법한 일이다. 라고 생각하며 깼다. 한동안은 희미하게 남은 증오로 바들바들 떨었다. 이런 종류의 악몽은 종종 꾸지만 증오의 표출이 아닌 억압된 성욕의 분출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은 순전히 인찬 때문이다. 인찬이 그런 남자를 좋아하니까. 손바닥에 밴 돈 냄새를 맡는 남자. 때리는 남자. 제복을 입은 남자. 저쪽의 남자를!

 

그렇다면 인찬이 아닌 여자는 어떤 남자를 좋아할까? 이름을 지어보자. 이김호(어쩐지 김포공항 같은 이름이네)가 좋아하는 건 시체 같은 남자다. 절대 때리지 않는 남자. 주먹질하지 않는 남자. 맞고 때리는 걸 하나의 역할극으로 만들어 신뢰의 영역으로 끌어당기는 인찬과는 반대로 김호는 절대, 절대 때리는 남자만은 싫다고 생각한다. 둘 다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경험을 했다. 그리고 폭력의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손에 넣으려는 인찬과 달리, 김호는 보다 안전한 방법을 고안한다. 인찬이 몸을 써서 폭력과 엎치락뒤치락하는 동안 김호는 소설이라는 작은 세계를 만들어서 그 안에 폭력을 욱여넣었다. 이해할 수 있는 걸로 만들려고 했다. 물론 그런다고 세계의 폭력은 사라지지 않고 어느 날 눈에 불을 켜고 싸우다가 퍽, 하고 머리를 세게 맞았을 적에 산뜻하다! 라고 생각했던 것을 분명 기억하지만 저항한다. 김호는 더 이상 맞는 순간에 올 것이 왔다는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고 싶지 않다. 김호가 편안함을 느끼고 싶은 건 절대적인 평화 안에서다. 세계가 순간의 연속이라는 거. 기쁨도 슬픔도 모두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한다는 걸 부정하고 싶어 한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내가 몰라서 그렇지 영원한 평화같은 게 있다고 믿는다. 김호가 아는 미련한 여자처럼 구원을 바라며 전전한다. 여기서 실패하면 저쪽으로 이전하며 중얼거린다. 분명히 있을 거야. 나를 구원해 줄 무언가가.

 

그런 김호는 최근 들어 아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건 터무니없이 허무맹랑한 얘기다. 왜냐하면 김호는 결혼도 안 했고, 남자친구나 남자친구로 발전할 만한 남자도 없는 데다 아이를 귀여워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김호가 아이를 예쁘다고 할 적에, 그 말은 사회적인 약속의 실천이다. 아이를 조형적으로 귀엽다고 생각하거나 매혹을 느끼지 않지만 그럼에도 아이라는 관념을 떠올리는 건 김호가 더는 어리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 김호는 <해피 엔드>를 감상하지 않고 관음해 버린 자신에 놀랐다. 거기 나오는 젊은 육체들의 스킨을 뒤집어쓸 수 없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김호는 그런 몸이 되고 싶었다. 충돌하고, 부딪히고, 실컷 싸우고, 엉엉 울고 싶었다. 아름다운 것을 갖고 싶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손에 넣고 싶다고 생각해 버린 나머지 그렇다면 그런 인간을 만들면 되지, 하고 임신의 상상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니까 김호의 상상 속의 아이는 반드시 아들이고 게이다. 나의 분신. 동시에 내가 아닌 것. 동시에 세계에서 비껴 나간 것만을 김호는 사랑할 수 있으니까. (김호처럼 자기혐오가 심한 사람이 어떻게 딸의 모습을 상상하겠는가!)

 

김호는 아이를 가지면 완전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보수적인 김호에게 여전히 아이는 행복의 증표.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약속 같다. 그런 동시에 김호는 아이를 낳는 걸 두려워한다. 다들 『아오노 군에게 닿고 싶어 죽고 싶어』에 나오는 무서운 엄마. 아오노 히토미를 보고 치를 떨거나, 그 여자를 귀엽게 여겨서 공포에서 탈출하려는 것과 반대로 김호는 저 여자는 나다, 내가 저 여자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를 하며 제가 아이를 너무 멋대로 주무를까 봐 걱정돼요, 라고 하자 친구들이 말했다. 김호 씨 말 잘 듣는 딸이었구나. 자식만큼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없는데요. 

 

그 말을 듣고 김호는 엄마와의 관계를 떠올렸다. 곰곰 생각하니 정말 그랬다. 말을 잘 듣는 건 몰라도 매여있는 자식이긴 하다. 김호가 글의 세계에서 아무리 깽판을 쳐봤자 현실에서 김호의 엄마를 이기진 못한다. 울음으로 자책으로, 엉망진창인 인생에서 그래도 너는 딸이 있잖니, 라는 말을 들었다며 얼굴을 밝히는 김호의 엄마 앞에서 김호의 지랄이나 반항이나 무용지물이다. 딸 하나가, 고작 딸 하나가 그가 가진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다른 낙원을 찾기에 김호의 엄마는 너무 늙고 지쳤다. 그래서 김호는 자신이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당신의 인생을 구하기엔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 구체적으로 열거하며 조목조목 따지진 않는다.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인간에게는 해결보다 마취가 나으니까. 그리고 김호의 엄마가 자신의 문제를 김호를 통해 일거에 해결하려고 하듯, 김호 역시 자식을 낳아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한다. 내 배에서 나왔지만 다른 인격체로 존중하느니 뭐니 하는 헛소리를 때려치우고, 내가 만든, 나만을 위한 인간을 갖고 싶어한다. 마치 세계를 손에 넣고 싶어 소설을 쓴 것과 같이 인간을 만들고 싶어한다. 신이 되고 싶어한다. 그리고 신은 자웅동체라서 무엇이든 혼자서 만들 수 있다. 그것이 김호의 아이를 낳고 싶은 욕망에 남자의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빠져 있는 이유다. 

 

이런 김호를 알아챈 사람들이 종종 묻는다. 김호 씨. 김호 씨는 김호 씨 아니고 다른 사람 사랑할 수 있어? 그 말에 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하지 못한다! 무서운 질문에 답변하기를 피하며 김호는 그 대신 다른 여자들의 사례를 모은다. 임산부 배지를 단 사람들의 눈에서 무언가 발견하려고 한다. 우리 자신, 혹은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아닌 존재로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인찬은 어째서 아이를 갖고 싶어하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서? 그런 용기는 어디서 출발하지?

 

용기를 갖고 싶다.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김호는 중얼거린다. 『돈 덴』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김호는 <게르니카>를 떠올린다. 벌거벗은 여자들이 옷 입고 서 있는 남자들을 향해 우르르 달려가는 모습. 그건 뛰어들어 안기는 모양새이기도 하고 거꾸로 밀어내는 모양새이기도 하고 그보다 먼저 세계를 두 가지로 구분하는 행동이라고 김호는 생각한다. 남자라는 것. 그리고 여자라는 것으로. 그리고 이분된 세계에서 나 아닌 타인에게 뛰어드는 일은 두렵다. 폭력의 전조 같고 그게 곧 공포야! 그렇지만 동시에 벌거벗은 채로, 피 흘리는 채로 다른 몸에게 뛰어들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도 김호는 안다. 다칠 각오를 하고 뛰어드는 것이 아니면 사랑은 불가능하다. 먼저 믿지 않으면, 벗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도착하고 김호는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린다. 김호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이야. 그 사람이 김호에게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너는 나르시시스트야, 라는 말이었다. 이제 김호는 그 말을 아프게 받아들인다. 그런 동시에 이제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언젠가는 진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한 손에 납작하게 접어 들어오는 종이의 세계나 반짝반짝 빛나는 모니터 너머의 세계가 아닌 이곳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을까? 벌거벗을 수 있을까? 답은 아직 모른다. 다만 김호가 확신하는 건 하나뿐이다. 만약에 그게 가능하다면. 정말로 가능하게 된다면 그날 김호는 진짜 여자가 될 것이다. 완전한 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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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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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두팔

2025.05.27

<해피 엔드>를 감상하지 않고 관음한 사람으로서 김호 씨의 이야기 너무 궁금해집니다... 우리는 어떤 '여자'가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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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짱

2025.05.26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이 글 읽고 나니 『돈 덴』 이 미치게 궁금해지네요... 저는 인찬에 가까울지 김호에 가까울지 고민해보게 되기도 해요. 어쩌면 그 사이 어딘가에서 유유히 지내고 있는 청조(어쩐지 청주공항 같은 이름이네)일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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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덴

<만리포> 글그림

출판사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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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주

2016년 「환상통」으로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사랑의 세계』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