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의 통로가 있다면 우리는 삶으로서 그 통로를 채워나가는 중일까, 비워나가는 중일까. 먹어 채우는 것이 위험할까, 비어 빠져나가는 것이 위험할까. 전작에서 인간의 욕망과 결핍을 다층적으로 형상화했던 작가가 이번에는 지독한 고독이 초래한 뒤틀린 허기를 잔인하면서도 매혹적으로 펼쳐놓았다. 온통 거칠고 질긴 세상에서 보드랍고 달콤한 것을 탐한 한 여성의 삶으로 초대한다.
신작 『죽음과 크림빵』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제목대로 삶과 죽음 사이의 달콤한 허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종수, 허자은, 박상아, 정하늬 등 작중인물들은 모두 저라는 구멍투성이 인간의 일부인데요. 그들은 자기 안의 허무와 끝없이 싸우는 중이죠. 그 구멍은 생래적으로 타고난 것이기도, 외부 세계의 폭력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기도 하고요. 결국엔 그 구멍을 메우는 방식이 각자의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에겐 술이나 예술 혹은 아름다움이 그런 방식이겠죠. 소설 속 인물들이 자신의 구멍을 다루는 기괴하면서도 매혹적인 과정을 목도해주셨으면 합니다. 두렵고 끔찍하지만 타인의 구멍을 들여다보는 것이 가끔은 자신의 구멍을 메워주기도 하더라고요. 독자분들에게도 이 소설이 그런 경험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여성의 ‘삶’을 다룬 소설의 시작점이 ‘죽음’이에요. 죽음의 장면도 다소 충격적이고요. 이 설계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허무나 자기파괴의 충동이 지닌 강렬한 힘이 꼭 변기의 ‘플러시flush’ 버튼 같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튼튼하고 건강한 자아를 건축해온 사람들조차 때론 그런 힘에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가곤 하죠. 육체적으로도 우리 몸의 세포는 매일 죽음을 거듭하고, 그 죽음의 잔해들을 거둬 가는 곳이 변기기도 하고요. 오래된 노트에서 이 소설의 첫 구상을 발견했는데요. “변기가 내 관棺이다”라는 문장이었습니다. 폭식과 구토로 점철된, 삶보다는 죽음과, 인간보다는 텍스트와 친했던 한 여성. 그래서 그 어느 장소에서도 적소감을 느끼지 못했던 인간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을 눕힐 ‘관’으로 변기를 선택한다는 이미지 하나에서 소설은 출발했습니다. 구체적인 서사와 캐릭터는 그 이후에 마련되었고요.
지난 작품에 이어 ‘섭식장애’를 다루셨어요. 폭식, 외모, 강박, 시선, 결핍이 모두 연결선상에 있고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나요?
섭식이란 것은 외부 대상을 자기 몸 안에 집어넣어 소화하는 행위죠.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세계의 자아화 방식이랄까요. 그러니까 ‘일반적인 방식’으로 음식을 먹는다는 건 세계에 대해 ‘일반적인 수준’의 신뢰를 갖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외부 세계에 대해 절망했을 때 음식이란 대상을 거부하거나 남용함으로써 저항하기도 하고요. 『시티 뷰』 『죽음과 크림빵』에서 섭식장애 문제를 다룬 것은 제 연구와 관련이 있습니다. 교수 시절 한강 작가님의 『그대의 차가운 손』을 읽고 「한국 현대소설 속 여성 거식증에 나타난 주체화 전략 연구」라는 논문을 썼던 것이 계기가 되었어요. 폭력을 감내해야 했던 인물들이 언어적 한계 지점에서 자신의 허기진 신체로 발화하는 방식을 분석했었거든요. 사실 제대로 먹어야 한다는 건 제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과 동의어잖아요. 무척 자연스러워야 하는 욕구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는 문제와 고투 중인 인물은 곧 사는 문제와 고투 중인 문제적 인물이라고 봤고, 그게 제가 그러한 인물들에 번번이 매혹되는 이유인 듯합니다.
주인공이 처음으로 ‘크림에 찍은 카스텔라’를 먹은 경험이 인생의 어떤 촉발점으로 작용하죠. 작가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을까요?
딱딱하고 식은 음식만 먹어왔던 허자은, 착한 떡집 딸이자 쓰레기통을 자처했던 그녀를 충격한 것이 제니의 집에서 맛본 생크림과 카스텔라인데요. 달고 보드랍고 교양 있는 그 디저트 타임은 이후 평생의 허기를 조형해버린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를 계속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한 비극적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죠. 저는 떡집 딸도, 착한 아이도 아니었지만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대학 신입생 시절 중앙도서관 서가에서 배수아 작가님의 『독학자』를 읽었을 때 저는 어떤 세계로부터 초대장을 받았다고 제멋대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겐 크림빵조차 텍스트였네요. 비슷한 시기, 외톨이처럼 독강했던 교양 강의에서 서양철학사를 강의하던 강사님께 매혹되기도 했습니다. 학생들과 눈도 못 마주치고 본인 구두만 보며 더듬더듬 니체를 강의하시던 그분을 보며 참으로 순수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죽은 자들의 텍스트를 지키고 있는 묘지기 같다는 느낌도 받았고요. 저도 그런 아름다운 공동묘지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설의 배경이 대학교라는 특수 조직 같기도 또 사회의 여느 공동체 같기도 해요. 이 배경 설정과 주인공의 직업으로 무얼 보여주려 하셨나요?
집단이 집단이 되는 순간 발생할 수 있는 부조리와 폭력성을 다루고 싶었고, 그것을 압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일종의 미시 사회micro society로서 대학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꼭 제가 교수 출신이라 그곳의 생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학교라는 공간 자체가 흥미롭고 모순적인 곳이잖아요. 인간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성장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공간인데 그 ‘바람직’이 누구 보기에 ‘바람직’한지는 알 수 없거든요. 또 그 선한 의도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많은 폭력이 자행되는 공간이기도 하고요. 특히 대학(원)은 진리와 빛을 희구하는 동시에 낡은 악습과 구조가 완고한 곳이고요. 추구하는 정신적 높이와 잔존하는 현실적 문제 사이의 간극이 아찔해서 소설적으로 다뤄보고 싶었습니다.
다 자라다 못해 몸집이 거대해진 주인공의 내면에 아직 크지 않은, 온전히 지켜지지 못한 여린 소녀가 보여요. 여성, ‘현대’ ‘한국 사회’를 사는 여성의 삶이 비치는 것 같은데요.
거대한 외피로 조롱받는, 그 속의 냉기와 허기로 떨고 있던 허자은을 그리며 고통스러웠습니다. 쓰는 내내 “자은아 사랑해” 하고 말해주었어요. 아무도 그녀에게 그 말을 충분히 해주지 않았으니까요. 많은 여성이 자신의 신체에 자행되는 폭력과 평가에 고통받다가 그로 인한 수치심과 분노를 제 신체에 각인해버리곤 합니다. 당하다 당하다 못해 그냥 당해 마땅한 존재로 스스로를 격하시켜버리지요. 저울과 거울 속의 숫자와 윤곽으로 자신을 축소시키며 진짜 삶의 문제로부터 도피해버리기도 하고요. 저 역시 한국 사회를 여성의 신체로 살아가면서 언제, 그 어디서도 제 몸 안에 거주하는 게 편한 적이 없었습니다. 평생 머물러야 할 공간인 육체에서 적소감을 느끼지 못한 거죠. 허자은처럼 눈에 띄는 몸을 가지진 않았지만 제 몸을 둘러싼 발화를 공기처럼 마시고 살아야 했던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그 발화들도 모순투성이였어요. 누군가에겐 부적절하게 작은 몸이라고 평가받고, 또 누군가에겐 부적절하게 큰 몸이라고 감상당했어요. 어느 곳에선 불필요하게 ‘여성스럽다’는 비난을 받았는데 또 어느 곳에선 충분히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질타당했죠. 인정을 갈구하는 모범생답게 모순된 요구들도 허겁지겁 다 맞추고 싶었는데, 그러다 보니 몸도 정신도 이리저리 찢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렇게 여성의 육체를 대상화하는 발화들이 궁극적으로는 여성 스스로 자신의 육체를 대상화하도록 하는 것 같아요. 이런 경험이 당연히 저만의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앞으로도 여성 인물들의 몸이 고통스럽게 증언하는 목소리들을 소설적으로 탐구하려 합니다. 더 이상 그런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요. 독자분들께서도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해주시면 좋겠어요.
현실적이면서도 동화 같기도 한 『죽음과 크림빵』을 보니 또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으신지 궁금해져요.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고, 기괴하면서도 어여쁜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모순적인 것 사이의 진자운동 그 사이에 진실 비슷한 것이 있다고 믿기도 하고요.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겨운 묘사도, 혀를 갖다 대고 싶을 만큼 달콤한 문장도 쓰고 싶습니다. 19금 혹은 29금 소설에 가까운 『죽음과 크림빵』 『시티 뷰』의 작가인 저는 사실 『언제나 다정 죽집』이란 훈훈한 동화를 쓰기도 했습니다. 아마 다음 소설은 서늘하면서 달콤한 복수담―복수의 맛은 언제나 달지요―이 될 것 같네요. 『죽음과 크림빵』 속 허자은처럼 폭력에 노출되었던 한 여성이 등장하는데 이번엔 신기가 있는 ‘구슬 아기씨’랍니다. 귀신을 본다는 이유로 학교폭력을 당하다 한쪽 눈을 잃은 여중생이 애동 무당이 되어 복수를 꾀하는 이야기예요. 세계의 폭력성과 구조적 모순을 돌파하려면 현실 논리만으로는 역부족일 것 같아 무속의 힘(?)을 빌려 오려 한답니다. 『죽음과 크림빵』 속 허자은의 구역질 대신 새빨간 부적을 쏟아낼 구슬 아기씨의 활약도 기대해주세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죽음과 크림빵
출판사 | 자음과모음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