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비와 보험이 없어도, 시민권과 이름이 없어도 아픈 사람은 누구나 필요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면 어떨까? 기술과 자본 대신 돌봄이 의료를 이끌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의료인류학자 서보경의 『돌봄이 이끄는 자리』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미래를 현실로 경험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건강권과 의료를 둘러싼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태국 치앙마이를 연구의 무대로 정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HIV 연구를 하면서 태국에서 처음 인류학 현장 연구를 시작하였는데요, 그 과정에서 태국에서 HIV 치료가 확대되는 데 의료보험 제도의 확립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어요. 태국의 경제 수준에서 자국민에게 HIV 치료제를 공급하기에는 당시 약값이 너무 비싸서 기존의 의료 보험 재정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몇몇 치료제에 대한 다국적 제약회사의 특허권을 공적 사용을 위해 일시적으로 유예하는 조치를 2000년대 중반에 취했어요. 태국에서는 이런 적극적인 조치가 가능했던 건 한편으로는 HIV 감염인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사회 운동이 조직되었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이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도 '의약품 접근권'이 중요한 인권 의제라는 걸 알리고, 여기서 정부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례로 여겨졌어요.
결국 이걸 연구하는 과정에서 태국의 의료보험 운영 방식이 한국이랑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고, 실제로 공공 병원 중심의 의료 체계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을 주고 있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그런데 방콕은 너무 대도시여서 이 제도에 주로 기대고 있는 지역민, 농민의 삶을 가까이서 보기 어려워 치앙마이로 가기로 했어요. 방콕에서 큰 집회가 있으면 치앙마이에서 상경한 활동가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때 다들 꼭 놀러 오라고 하고, 왠지 가면 잘해줄 것 같기도 하고, 밥도 더 맛있다고 하고. 한번 놀러 오라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렇다면! 하는 마음으로 갈 수 있었어요.
이 책은 미국에서 먼저 출간되고, 시간이 지나 그것을 번역한 한국어판이 출간되었습니다.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하면서 가장 신경 쓰신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태국의 공공 의료 시스템은 한국 독자들에게 다소 낯설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한국 사회와 어떻게 연결 지어 읽으면 좋을지도 알고 싶어요.
한 사회에서 의료를 제공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게 의료보험 제도인데, 각 사회마다 어떤 방식으로 보험 제도를 구성할지, 또 어떤 방식으로 병원을 운영하는지를 잘 뜯어보면 다 달라요. 의료 제도의 운영은 어떻게 보면 매우 기술적인 과정, 즉 정책가들이나 의료 전문가들이 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한 사회의 운영 원리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사회에 각기 다른 경제적 상황과 조건에 놓인 사람들이 있는데 그 모두가 아프면 치료받을 수 있게 하자, 병원비 때문에 집도 팔고 땅도 팔아야 하는 상황은 생기지 않게 하자. 이런 약속을 만들고, 서로 어떻게 도울지를 결정하고,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함께 애쓰는 과정에서 의료 제도 전반의 큰 틀이 만들어지는 거니까요.
태국이라는 나라는 한국과 같은 규모의 거대한 경제 성장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사회 보장을 실현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오고 있는데, 꼭 이 방식이 한국보다 더 낫다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에요. 다만 우리나라는 이렇게 하는데 저기는 저런 방식으로 하는구나, 이런 차이를 좀 가늠할 수 있으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바뀌는 게 좋을까 논의할 때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일정 소득 이하의 사람들을 따로 분리해서 그 사람들만 본인부담금을 면제해줄지, 아니면 소득에 따라 가난한 사람을 선별하지 않고 누구나 경제적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는 병원을 운영할지, 어떤 방식이 더 나은지를 결정하는 단일한 기준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을 택한 나라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찬찬히 잘 이해하면, 우리 사회의 어떤 부분들을 다르게 조정해볼지를 새롭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현장 연구를 진행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사람이나 순간을 소개해주신다면? 그분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아, 이런 질문 어려워요. 『돌봄이 이끄는 자리』에는 여러 사람들이 나오는데요, 그중 여럿이 제가 아주 긴 기간 동안 만나면서 연을 이어온 이들이고, 몇몇은 이제는 연락이 닿지 않아서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사람들이기도 해요. 연구를 위해 만난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십 대 후반부터 삼십 대 중반까지 제 삶에 정말 중요했던 사람들이기도 하구요. 독자님들도 이 책을 통해 저에게 기꺼이 이야기를 나눠준 사람들이 그때를 어떻게 살아갔는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함께 그리워해주실 수 있으면 좋겠네요.
이 책에서는 돌봄을 이해하는 개념으로 ‘이끌어내기’를 제안하셨죠. 이 개념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돌봄을 일종의 서비스로 생각하면 주고받을 수 있는 것, 혹은 사고팔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요, 저는 이걸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힘으로 보고자 하였어요. 다스리고 보살피는 일은 누군가에게 일정한 힘을 발휘하는 것,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정치 권력이 발현하는 방식이 다양하다고 할 때 도대체 돌보는 힘, 보살피는 힘은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 걸까? 억지로 빼앗는 힘, 명령하고 부수는 힘이 폭력에 기반해서 위협하고 강제하는 힘이라고 한다면, 이런 종류의 힘만으로는 세상이 유지될 수가 없으니까요. 타인의 어려움과 곤란을 알아차리고 거기에 반응하도록 하는 일은 억지로 시킨다고 잘 일어나지 않고, 특정한 상황과 조건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존재감에 이끌릴 때’ 생겨나요. “이끌어내기”는 이러한 성격을 지닌 힘의 동학을 그려내기 위해서 구체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작 『휘말린 날들』에서는 감염을 이해하기 위해 ‘휘말림’이라는 개념을, 이번에는 ‘이끌어내기’라는 개념을 제안하셨는데, 둘 다 누구나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익숙한 표현이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이런 개념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시간 순서로는 『돌봄이 이끄는 자리』를 먼저 영어로 쓴 것이고 당시에는 elicitation이라고 표현했는데요, 이 표현은 누가 뭔가를 의도적으로, 목적을 가지고 하기보다는 어떤 조건 속에서 하다 보니 어느새 특정한 결과가 생겨나는, 불현듯 이뤄지는 상황을 지칭할 때 주로 사용해요. 추천사를 써주신 김영옥 선생님께서도 ‘휘말림’이라는 개념의 원형이 사실 여기서부터 있었던 게 아니냐라는 말씀을 해주시기도 했는데 당시에 이걸 다 미리 생각했던 건 아니고, 기본적으로 ‘수동적 상태’라고 여겨지는 것에 대한 의문을 늘 가지고 있었던 듯하여요. 취약한 상태에 놓인 사람은 정말 무력한가?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지해야 하는 사람은 정말로 사회에 짐이 되는 존재인 건가? 자유로운 의지의 발현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 서로 간에 어느새 일어난 일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저에게는 꽤 오래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걸 저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어요.
꼭 뭔가 새로운 개념을 억지로 만들어내려고 하는 건 아니구요, 한자어로 개념어를 만드는 걸 스스로 좀 어색해하고, 입말에 익숙한 것들을 이리저리 궁글려보면서 추상화의 수준을 높이는 게 더 재미있게 느껴져요.
연구하시는 주제의 특성상 필연적으로 누군가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삶의 고난을 다룰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굉장히 많은 고민과 섬세한 접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의료인류학자로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은 무엇일까요?
겪는 일과 쓰는 일이 다르고, 느낀 것과 말하는 게 다를 수밖에 없는 거여서 그 차이들을 늘 생각하려고 해요. 잘 모르는 일, 함께 겪지 않은 일은 가능하면 쓰지 않으려고 하고, 고통의 경험에는 늘 이면이 있다고 생각하려고 해요. 겪은 사람도 모르는 일이 늘 있기 마련이니 내가 모르는 부분이 당연히 있다는 걸 염두에 두려고는 하는데, 마음이 편치 않을 때도 많아요. “유격을 맞춘다”는 표현을 좋아하는데, 사건과 해석 사이에 너무 간격이 없게 딱 붙어도 안 되고, 또 너무 헐거워도 앞으로 움직일 수 없어서 그 사이를 잘 조정하는 게 저에게 맡겨진 일이라고 생각하려고 해요.
요즘은 어떤 연구 주제에 '이끌리고' 계시는지요?
코로나19 대유행이 남긴 게 뭔지를 여러 나라의 연구자들과 함께 살펴보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 공동 연구자들이 책을 장 별로 나누는 게 아니라 같이 쓰는 실험을 하고 있어서 그걸 열심히 해보려고 해요. 인류학은 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연구가 가능하고 여러 사람이 함께 생각하고 서로 가르쳐주는 걸 중요하게 강조하면서도, 책은 꼭 혼자 써야만 하는 것처럼 여겨지거든요. 그래서 여럿이 같이 쓰는 책은 어떻게 다른 책이 될 수 있을까를 잘 실험해보고 싶어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돌봄이 이끄는 자리
출판사 | 반비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